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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환영의 직격 인터뷰

영원한 ‘국민 오빠’ 송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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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김환영
김환영 기자 중앙일보 실장
권혁재 기자 중앙일보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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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따라를 멋있는 말로 바꾸면 대중문화예술인이다. 코미디언·가수·사회자·배우인 송해는 자칭 딴따라다. ‘대표 실향민’이기도 하다. 그는 오늘도 어머님 뵐 날과 남북통일을 손꼽아 기다린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Black is beautiful.” “깜둥이 피부는 아름답다”라고 번역해도 무방한 표현이다. 이 말이 나온 즈음에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자긍심을 갖게 됐다. 맥락은 다르지만 ‘영원한 국민 오빠’ 송해(89)에 대한 평전인 『나는 딴따라다』도 비슷한 사회사적 의미를 갖는다. 이제 흑인이 백인·황색인보다 더 나을 것도 못할 것도 없는 그저 사람이다. 딴따라 또한 한 직업일 뿐이다. 오히려 부러움의 대상이기도 하다. 젊었을 때 송해는 딴따라 소리를 들으면 속이 많이 상했다. 외길로 인생 우물을 파다 보니 훈장도 받았고, 대구에 ‘송해공원’이, 부산에는 ‘송해거리’가 추진된다. 12월 6일은 ‘웃자 대한민국 송해 90수 기념 헌정공연’으로 빛날 것이다. 인간 송해가 궁금해 20일 인터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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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해의 삶을 다룬 『나는 딴따라다』의 저자인 단국대 오민석(영문학자·시인) 교수와 송해.

-고(故) 정주영 현대 회장이 ‘사람 많이 아는 송해 선생 같은 사람이 부자’라고 했다는데.

“국민께 즐거움 드리는 대중문화가 진짜 문화지요”
“국가가 부르면 달려간 우리 위해 대통령님, 회관 하나 지어주세요”
“저를 이해해주고 아는 척해주는 고마운 분들 위해 열심히 살겠다”

 “고향이 같은 이북이라 그런지 저를 만나면 남달리 반가워하셨다. 우리 생활을 아시겠지만, 일반인들의 평가가 귓전에 맴돌기 때문에 처신이 힘들고 휴가 때 마음 놓고 놀지도 못한다. 하지만 정주영 회장님 말마따나 시청자 여러분, 또 저를 보고 아는 척하시는 분들이 제게 재산이다.”

 -지난해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는데.

 “과분한 훈장이다. 한길 인생을 걸어온 보람이 있었다. 저 나름대로 참 열심히 살다 보니 인정받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건강 비결은.

 “특이하게 몸을 관리하는 것은 없다. 한 40년 전 건강이 악화돼 6개월 동안 입원한 적이 있다. 담배를 하루 4~5갑이나 피웠다. 의사 선생님이 ‘저하고 친하든지 담배와 가깝든지 둘 중 선택하세요’라고 했다. 담배 끊지 않으면 죽는다는 얘기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단칼에 끊었다.”

 -그렇다면 주량은.

 “자랑은 아니지만 즐겨 먹는다. 나름대로 분석해보면 저는 고독을 챙기는 것 같다. 매일매일 감당하기 힘든 양의 술에 지지 않고 이겨왔다는 게 참 천행(天幸)이라고 생각한다. 천지신명이 봐준 거다. 요새는 많이 줄였다.”

 -전국의 팬들이 보내주는 보약 덕은 아닌지.

 “걱정해주시는 분이 많다. 특산품을 챙겨주신다. 경험한 바로는 체질이 다 다르기 때문에 만병에 다 좋은 것은 아니다. 맞는 게 한두 가지다. 장복해보니 버섯이 제 체질에 맞는 것 같다. 청중이 즐거운 비명을 터트리는 ‘전국노래자랑’ 녹화가 끝나고 나면 즐겁고 행복하고 홀가분하다.”

 -그런 흥은 어떻게 유발하는가.

 “출연자들이 아마추어인 데다 방송상의 제한이 많아 더 긴장하신다. 예컨대 사투리를 쓰지 말라고 한다. 제가 마음을 풀어드리는 것밖에는 약이 없다. 그래서 녹화 전에 출연자를 만나 대화를 한다. ‘작가·연출가 몰래 그냥 하세요’라고 말씀드리면 많은 게 쏟아진다.”

 -큐카드(cue card, 대본이 적힌 카드)를 안 쓰는 것으로 유명하다.

 “손에다 뭘 쥐고 있으면 보게 된다. 1초의 100분의 1, 일순간이라도 시선을 빼앗기면 분위기가 그냥 가라앉는다. 사회자로서 몇 가지 지켜오는 게 있다. 사회자는 사투리를 안 쓰고 표준어를 써야 한다. 사회자는 죽은 나무를 산 나무로 만들어줘야 한다. 꽃봉오리가 다 떨어져도 꽃을 피게 해주는 게 사회자다. 출연자를 존중하는 태도가 제가 움직일 때마다 우러나와야 한다. 그래서 저는 앉지 않고 녹화 끝날 때까지 서서 진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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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딴따라다』의 표지.

 -선생의 전기인 『나는 딴따라다』는 어떤 계기로 세상에 나왔는가.

 “다 인연이 닿았기 때문이다. 인연만 있으면 몇 십 년 지난 다음에도 다시 만나게 돼 있다. 단국대 영문학과 오민석 교수와 저도 그런 경우다. 거리에서 스쳐 지나가고 수십 년 있다가 목욕탕에서 마주쳤다. ‘저는 딴따라입니다’라고 했더니 오 교수가 ‘저는 교수 딴따랍니다’라고 했다. 그래서 책 이름이 『나는 딴따라다』가 됐다. 오 교수는 책을 쓰기 위해 저를 1년 반 동안 따라다녔다.”

 -한국 연예사의 산증인이신데, 대중예술 발전을 위해 정부는 정책적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문화 융성이라는 이야기를 지금 많이 쓴다. 『나는 딴따라다』라는 책 이름에는 정부의 문화정책에 대한 아쉬움도 담겼다. 궁전에 있는 고급스러운 것만 문화가 아니다. 일반 대중 국민의 삶도 소중한 문화다. 정부가 우리 계통에 보탬을 줄 게 하나 있다. 이미 연예인 회관을 지어달라고 네 분 대통령님께 직능 대표로서 제안을 드렸다. 정부에서 땅만 주시면 최원석 동아그룹 회장이 회관을 지어주겠다고 했다. 공연장은 많지만 사실 연예인들이 설 수 있는 전용 공연장이 하나도 없다. 공연장이 있는 8층 건물에서 3층만 우리에게 주면 운영할 수 있다. 대통령들의 반응은 긍정적이었지만 항상 소식이 없다.

 우리는 지금까지 집 없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30명이 아니라 10명도 어디 들어가 편하게 밥 먹을 데가 없다. 이거는 국가 예산을 따질 문제가 아니지 않은가. 국사(國事)가 있을 때마다 우리 대중문화인들이 항상 나섰다. 6·25전쟁 판에서도 국군장병 위문을 다 우리가 했다. 베트남 파병을 두고 ‘젊은이들 피를 판다’는 논란도 있었지만 파병으로 우리가 국방을 튼튼히 했다. 우리 대중문화인도 병사들을 위로한 공로가 있다. 저 또한 ‘죽어도 이의 없다’는 각서를 쓰고 베트남에 세 번 갔다 왔다. 한번은 수송기 프로펠러 중 한 개가 멈춘 적도 있다. 문화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게 아니다. 국민을 즐겁게 해주고 국민의 아픔을 어루만져주기 위해 노력하는 가운데 문화가 흥한다. 대중문화야말로 진짜 문화라고 자부한다.

 -올해 초 어머님을 그리는 애절한 노래를 취입했는데.

 “금강산에 있는 만물상에서 북측 안내인이 ‘보고 싶은 사람도 볼 수 있소. 누구 보고 싶습네까’라기에 ‘어머니가 보고 싶다’고 했더니 ‘정중하게 앉아서 어머니 모습을 그리다가 어머니 하고 불러보시오’라고 했다. 정말 간절한 마음으로 어머니를 부르니까 어머님이 달 덩어리같이 만물상으로 올라오셨다. 달려가니까 물거품같이 영상이 부서졌다. 그러곤 꿈에도 나타나지 않으셨다.

 어머니를 꿈에서라도 다시 보고 싶은 심정을 담은 게 오민석 교수 작사, ‘전국노래자랑’ 신재동 악단장 작곡의 ‘유랑청춘’이다. 가사가 이렇다. ‘눈물 어린 툇마루에 손 흔들던 어머니. 하늘마저 어두워진 나무리 벌판아. 길 떠나는 우리 아들 조심하거라. 그 소리 아득하니 벌써 칠십 년. 보고 싶고 보고 싶은 우리 엄마여···’.

 구월산의 북한군을 피해 ‘어머니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집을 나오는데 어머니가 어떤 느낌이 있으셨는지 ‘이번에 조심해라’라고 하셨다. ‘한 이틀 있으면 오지요’ 하고 갔는데 생이별이 됐다.

 지나온 이야기에 대한 노래라 젊은이들에게는 잘 안 맞을 수도 있지만, 미래를 끌고 갈 사람들이라면 이런 노래를 통해 한 번쯤 간접적으로나마 경험을 해야 더 빛나는 장래 계획이 나올 거라고 생각한다.”

 -무엇이 성공이고 또 행복인가.

 “자기의 직분을 천직으로 소중히 여기며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다. 어려운 분야라도 천직이라고 생각하고 노력하면 된다. 또 아주 다양한 직업이 우리 앞에 생겨나고 있다. 제가 요즘 새삼 느끼는 것은, 세상에 흔히 말하는 것처럼 비밀하고 공짜는 없다는 것이다. 비밀과 공짜를 바라는 사람은 헛 사는 사람이다. 흙일 하는 게 제일 힘들다. 나무 그늘에서 막걸리 한잔하시는 걸 보면 그 얼마나 행복해 보이는가.”

 -부인(석옥이)께서 불만이나 그런 거 없는지.

 “석씨들이 좀 고집이 세다. 전국으로 밤낮 돌아다니니 제가 미안할 따름이지 거기서는 불만이 없을 거다. 신랑감으로 제가 최고라는 우스갯소리를 들었다. 이 나이에 나가서 돈 벌어오지, 집 안에 죽치고 앉아서 귀찮게 하지 않지, 또 특산품들 전부 갖다 주지 ··· 그 말 듣고 제가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은.

 “하고 싶은 말은 ‘절대 굴하지 말고 용기 가지고 하라’이다. 단역이라도 좋다. 하인 역도 좋고 물지게 지는 역도, 행인 역도 좋다. 남의 집 사랑방에서 잠자는 역할도 좋다. 10가지, 100가지···. 체험이 많은 사람은 그 누구도 못 당한다. 지금 어렵더라도 많은 체험을 하라. 정말 어렵지만 대중과 한 약속을 지켜라. 어머니께서 돌아가셨을 때도 노래를 해야 하는 게 우리 직업이다. 우리의 팬은 한 분 한 분 얼마나 소중한 분들인지 모른다. 사람이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만큼 어려운 게 없다. 그분들은 우리를 이해하는 분들이다. 그러니 우리가 그분들을 지켜야 한다.”

 -추석을 맞아 어머님이 지금 이 자리에 계신다면 어떤 말씀을···.

 “꿈자리에서라도 뵈려고 어머님 생각하다 자도 어머니는 왜 안 오시는가요. 못 오시죠. 한 번만이라도 보여주세요. 어머니 제가 내년이면 구십입니다. 꿈에라도 한 번 오세요. 보고 싶습니다. 한 번만이라도 끝으로 안아주세요. 어머니. 어머니···.

 설날이면··· 명절이면··· 차례를 못 올렸습니다. 살아 계실지도 몰라서. 애들이 ‘할머니 보고 싶다’라고 조르던 것도 오래됐어요. 어렸을 때는 ‘왜 못 봐? 왜 못 봐?’ 그러더니 크니까 고것들도 알아서 할아버지가 아플까 봐 그런 얘기 안 합니다. 어머님 모습 생생하게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번 추석에는 꼭 꿈에라도 오셨다 가세요. 안녕히 계십시오. 열심히 살겠습니다. 열심히 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면.

 “투신(投身)이죠. 기자님들도 몸을 던져가며 글을 쓰시는 거죠. 어려움을 사명으로 아시고 극복하시는 기자님들 또 관계되시는 여러분들 불철주야 수고가 많습니다. 모든 언론에서 다 바라는 게 그저 하루빨리 남북통일을 기원하는 거 아닙니까. 남북통일과 이산가족의 마음을 달리 생각하시고 이렇게 다뤄주신 데 대해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우리 통일·이산가족 문제에 대한 기사 많이 쓰셔서 많이 위로해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글=김환영 논설위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송해는…  1927년 황해도 연백군 해월면 토현리에서 송제근과 박신자의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49년 해주음악전문학교 성악과에 입학했다. 50년 부산항에 도착했고 50~54년 3년8개월간의 대한민국 군 복무를 마치고 제대했다. 55년 ‘창공악극단’에서 가수로 데뷔했다. 87년 ‘전국노래자랑’ MC를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