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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중앙신인문학상] 소설 부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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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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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중앙신인문학상 당선자들. 왼쪽부터 단편소설 부문 이재은씨, 시 부문 김소현씨, 문학평론 부문 방인석씨. [강정현 기자]

소설 당선 소감
썼다 지운 얘기, 지금 시작하겠습니다

마주앉은 사람의 빈 잔을 보면서도 누군가 채워주겠지, 내가 아니어도 되겠지, 그 시간이 꽤 길었다. 내 잔은 내가. 앞에 사람이 없어도 괜찮다고 중얼거린 시간 또한 하염없었다. 오랫동안 이야기를 썼다 지웠다.

 인도에서 오토바이를 얻어 탄 적이 있는데, 등에 볼을 기대고 앉아서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은 싫어요” 바람에 속삭였다. 부끄러워하며 살았다. 내가 싫어하는 내가 되지 않으려고.

 기쁘다. 결국 사람의 힘으로 사랑하며 살 수밖에 없다는 걸 이제 나는 안다.

 고마운 사람이 너무 많아서 그들이 나를 잊었을지 모른다고 염려하면서도 톡톡, 엄지를 건드려 감사를 전했다. “심사위원 두 분이 당신을 뽑았어요.” 성석제, 정미경. “잘했어.” 최인석. “너의 날이다.” 신수정. “뜻을 견지한 걸 축하해.” 김용호. 선생님, 고맙습니다. 파를의 이유, 현진, 현수. 손 잡아준 은지. 마음과 못, 목성 사이에서 맴도는 수많은 얼굴들. 손바닥 사진책 수강생들이 여름 내 내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면 나는 호명되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 시작하겠습니다.

◆이재은=1977년생. 명지대 대학원 문예창작과 졸업. 성공회대 문화대학원 재학 중. ‘인천in’ & 인천시 인터넷신문 ‘I-View’ 객원기자.

소설 심사평
새로운 화법, 진지한 사유 갖춰 든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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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심심사 중인 성석제(왼쪽)씨와 정미경씨.

일정한 완성도를 인정받아 단편소설 본심으로 넘어온 작품의 숫자는 16편이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는 이야기가 폭발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실종, 육체와 영혼의 병리, SF로 환원한 현실, 분신과 투신으로 이어지는 왕따 문제, 예술가에게 창작과 표절, 모방의 차이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 등등은 익숙한 주제이지만 새로웠다.

각각의 세부가 달랐고 개별성과 경험의 깊이가 더해졌다. 주목을 받은 작품은 ‘영수증’, ‘척추 질환에 대한 비의학적 고찰’, ‘꽃’, ‘옥수수와 외계인’, ‘봄밤’, ‘기프트’, ‘동굴의 우화’, ‘지구로 돌아온 우주비행사의 중력에 관한 인터뷰’ 등인데 지면상 제목을 언급하는 정도에서 멈출 수밖에 없음을 양해 바란다.

 당선작으로 뽑은 ‘비 인터뷰’는 뜨거운 작품이다. 흥분부터 하기 쉬운 소재임에도 서술의 톤은 차분하다. 많은 것을 담을 수 있음에도 억지로 우겨넣지 않았다. 소년의 특이한 조어법, ‘내가 만든 언어’는 익숙한 것 같은데도 콜럼버스의 달걀처럼 독특한 표현이다. 새로운 발화법과 진지한 사유, 작가로서의 균형감각을 두루 갖춘 신인인 듯해서 마음이 든든하다. 당선자에게 아낌없는 축하를, 인연이 늦춰진 분들에게는 멈추지 말고 세상에 계속 이야기를 건네주기를 당부한다.

◆본심 심사위원=성석제·정미경(대표집필 성석제)
◆예심 심사위원=김도연·백가흠·백민석·백지은·윤성희

소설 본심 진출작(16편)
● 고유나 : ‘남아있는 사람들’
● 김수연 : ‘기프트’
● 김지윤 : ‘발’
● 김형진 : ‘지구로 돌아온 우주 비행사의 중력에 관한 인터뷰’
● 김혜지 : ‘꽃’
● 박상연 : ‘옥수수와 외계인’
● 박혜인 : ‘척추 질환에 대한 비의학적 고찰’
● 변선재 : ‘영수증’
● 이시언 : ‘스퐁아’
● 이우현 : ‘봄밤’
● 이재은 : ‘비 인터뷰’
● 이한셀 : ‘선데이, 베이커리’
● 장형순 : ‘열대야 댄스’
● 전양정 : ‘인터체인지’
● 최유리 : ‘동굴의 우화’
● 홍순정 : ‘피부’

소설 부문 당선작비 인터뷰 이 재은

꼬마는 아직 초등학생인 게 분명했다 … 그나저나 조그만 게 웬 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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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화가 김태헌]

통신 노동자와 인터뷰하기로 했는데 웬 꼬마가 나타났다. 약속장소인 카페에서 용케 나를 찾아내고는 갖고 있던 휴대전화를 내밀었다. 내가 보낸 문자메시지를 가리키며 “맞죠?”하는데 확, 술 냄새가 났다.

사실 꼬마는 아니었지만 술 마실 나이가 아닌 건 확실했다. 중학교 입학 전 겨울 무렵 남학생들의 키가 훌쩍 큰다는 것을 속설로 믿는다면 꼬마는 아직 초등학생인 게 분명했다. 꼬마, 아니 소년은 깡마른 체구에 테가 가는 은색 안경을 끼고 있었다. 검은색 티셔츠는 목 부분이 잔뜩 늘어나 있었다. 그나저나 조그만 게 웬 술?

술 마셨니?

반말을 했다.

조금요.

소년이 마주 앉았다.

맥주겠지?

전 소주만 마셔요.

요 녀석 봐라. 눈앞에서 혀를 끌끌 찰 수도 없고, 내 새끼도 아닌데 섣불리 충고할 수도 없고, 안주는 챙겨먹었느냐고 물을 수도 없고, 같이 한잔 하러 가자고 권할 수도 없고.

인터뷰는 어쩐다? 감정노동자 기획기사를 연재 중이었고, 건너 건너 아는 사람에게 연락처를 받아 어젯밤 상명씨와 통화했다. 마침 파업 중이라 시간이 나지만 오후에는 집회에 참석해야 한다며 오전에 만나자고 했다.

나는 티 나지 않게 한숨을 삼켰다. 당장 다른 사람을 어떻게 섭외한담? 책상 앞에 앉아 머리를 쥐어짠 것은 좋았지만 인터뷰 대상자를 찾기는 쉽지 않았다. 찾았다 해도 “안녕하세요, ‘감정노동자들의 고충을 말하다’ 기획연재 중인데, 감정노동자로 일하기 괴로우시죠? 인터뷰 한번 해주세요”라고 들이댈 수는 없지 않은가. 뉘앙스가 조금 과잉됐지만 어쨌든 섭외에도, 승낙 요청에도 어려움이 있었다. 고르고 고른 말을, 다듬고 다듬은 음성으로 ‘아주 잘’ 설득해야 했다. 비행기 승무원, 대형마트 판매원, 학습지 교사, 간호사에 이어 통신 수리기사가 다섯 번째 인터뷰 대상자였다.

전화로 취소하면 될 걸 굳이 왜 너를 보냈대?

저보고 하래요.

뭘?

인터뷰요.

인터뷰를?

소년의 은테 안경이 위아래로 흔들렸다. 그런 것쯤 저도 잘 알아요, 내게 다짐시키는 듯 소년은 엄지로 흘러내려온 안경을 치켜 올렸다.

하하, 이 부자(父子) 보게. 상명씨는 이상한 사람 같지 않았는데. 자신의 상실감을 알리고 싶다고, 연락 주셔서 감사하다고 몇 번이나 반듯한 음성으로 말했는데. 술 냄새가 나는 걸 빼면 소년도 별나 보이지는 않았다. 결연한 표정이 마음에 걸렸지만 그거야 장점일 수도 있고. 애나 어른이나 가벼운 얼굴로 사람 구실 할 수 있겠나? 표정도 권력이고, 힘이다. 뭔가, 있어야 산다.

소년은 머리카락을 닦은 수건을 던져놓고 냉장고를 열었다. 속이 보이는 플라스틱 반찬통 몇 개. 계란도 우유도 떨어진 지 오래였다. 윙- 냉장고 모터가 거친 숨을 쉬었다. 코드를 뽑고 가방을 멨다. 다녀오겠습니다, 같은 인사는 없었다. 익숙한 침묵으로 등 돌린 채 낡은 현관문을 밀어젖혔다. 점퍼에 달린 모자를 뒤집어쓰고, 양손은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학교는 집에서 3분 거리. 골목을 두 번 꺾어 길을 건넌 뒤 언덕을 올라가면 되었다. 횡단보도 앞에, 초록색 조끼를 입은 학부모 봉사자가 깃발을 들고 서 있었다. 투명하다고 해도 좋을 만큼 얇은 깃발. 팔 대신 깃발이 ‘앞으로 나란히’를 하면 맞은편으로 가도 된다는 뜻이었다. “조리사하고 배식, 복귀했대?” 초록색 조끼에게 묻는 뚱뚱한 아주머니의 목소리는 사뭇 도전적이었다. “안 올걸? 교육청 앞에 천막까지 쳤다잖아.” 급식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소년은 오늘도 밥과 반찬이 나오는 점심을 먹기는 틀렸다는 걸 알았다. 지난주 수요일이 마지막이었다. 무슨 사연인지는 몰라도 다음 날부터 학교에서 음식 냄새가 풍기지 않았다. 아이들은 아줌마·아저씨들이 시위를 한다고 수군거렸고, 임시 담임은 사정이 있다고만 했다. 마지막 급식 반찬에는 감자조림이 있었다. 소년은 색이 밴 감자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배가 고팠다. ‘가난한 사람에게는 편식이 어울리지 않아, 딥.’ 정말 싫은 건 하지 말았어야 했다. 음식을 남김없이 먹은 이후로 기분이 축 처지는 게 그때 먹은 검은 감자 탓인 것만 같았다. 전날 급식은 밥이 아닌 샌드위치와 두유, 초코파이였다. 소년은 빈 봉지를 버리고, 양이 차지 않아 정수기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그래서 난 요즘 우리 애 꼬박꼬박 아침 먹여서 보내잖아. 아무리 자기 밥그릇이 중요하다지만 왜 다른 애들한테 피해를 줘? 자기 자식이면 그러겠어?” 깃발을 손에 쥔 봉사자는 맞장구를 치는 둥 마는 둥 했다. “초등학생 밥도 제대로 책임 못 지면서 중학교 무료급식은 어떻게 한다고….” 수업 시간에 소년은 자꾸 눈이 감겼다. 자꾸 눈꺼풀이 내려앉았다. 턱을 괴고 있다가 책상 위로 고개를 처박았다. 소년 아닌 다른 아이들은 또래답게 분주하고 어수선했다. 소년은 기운이 없었다. 집에 오자마자 냄비에 물을 부었다. 밥 없는 식사이므로 라면은 언제나처럼 한 개 반이었다. 찬장에서 소주를 꺼내 컵에 붓고 생수를 채웠다. 소년은 3학년 때부터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지금은 6학년이다. 소년이 술 마시는 걸 아는 사람은 아버지뿐이었다. 센 건 좋지 않아. 물을 가득 부어 마셔라.

소년은 귓가를 울리는 진동에 잠에서 깼다. 집안은 컴컴했다. 벨은 쉬이 끊기지 않고, 아버지도 깨지 않았다. 아버지의 점퍼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저장돼 있지 않은 번호였다. 응답 버튼을 눌렀다. “파파이슬.” “야, 이 자식아.” 저쪽에서 건너온 고함. 소년은 가만있었다. “너, 당장 와. 너 때문에 지금 내가 얼마나 피해를 본 줄 알아? 그 칼이 얼마짜리였는지 알아? 이 개새끼야.” 소년은 어떤 상황인지 예상할 수 있었다. 이전에도 몇 번 이런 일이 있었다. “어딘데요?” “뭐?” “주소요.” “천만 원짜리라고, 천만 원. 오기만 해봐. 너 오늘 내 손에 죽었어.” 소년은 주소를 머릿속에 기억했다. 새벽 다섯 시가 넘었다. 아버지는 언제 들어왔을까. 아버지의 휴대전화를 들고 집을 나왔다. 모퉁이에서 헤드라이트를 환하게 켠 차가 들어왔다. 불빛에 눈이 부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뒤늦게 소년을 발견한 차가 브레이크를 밟았다. 야아옹, 이 밝기와 소란은 자기와 전혀 상관없는 일이라는 듯 소년의 발밑으로 고양이 한 마리가 지나갔다. 소년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노란 눈의 회색고양이었다. 꼬리로 소년의 발목을 툭 건드린 것도 같았다. 소년은 길가로 비켜나 사라진 고양이를 눈으로 좇았다. 남자가 말한 빌라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벨을 누르자마자 문이 열렸다. 남자는 칼을 들고 서 있었다. “왜 이렇게 늦어, 이 새끼야.” 소년은 남자를 올려다봤다. 남자는 이만저만 큰 게 아니었다. 소년은 고개를 뒤로 완전히 젖히다시피 했다. “너 뭐야? 왜 네가 왔어?” 칼을 든 오른쪽 팔이 아래로 살짝 기우는 걸 소년은 놓치지 않았다. “아버지 자요. 그리고 요즘 우리 아버지 일 안 해요.” 제법 무게 있는 목소리였다. 소년은 샛노란 눈을 가진 회색 고양이를 생각하고 있었다. 겁도 없이 자가용 앞을 천천히 지나가며 꼬리까지 흔들던 나비. “뭐?” 남자는 당황한 눈치였다. 소년은 잔뜩 기가 죽어 고객 앞에 넙죽 엎드리는 AS기사가 아니었다. 묘한 상황에 남자는 기세가 꺾인 듯했다. “아버지? 잘난 너네 아버지는 왜 일을 안 하는데?” “파업해요. 183일째예요. 해 뜨면 184일째.” 현관 조명등이 꺼졌다. 남자가 칼을 들지 않은 팔을 들어 머리 위에서 흔들자 다시 불이 들어왔다. “잘난 너네 아버지는 왜 파업을 하는데?” 아저씨 같은 사람들 때문에요, 라는 말은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우두머리 회사랑 싸워요.”

그 남자랑 술을 마셨다고?

딥딥.

딥딥 하는 거, 그건 뭐니?

소년은 안경 너머로 나를 빤히 쳐다봤다.

내가 만든 언어예요. 딥은 예스, 딥딥은 노.

왜 만든 건데?

심심해서요.

그리고 또?

여보세요는 파파이슬이고요.

다른 건?

없어요. 쓸 일이 별로 없어서요.

이름이 뭐니?

비라고 부르세요. 올해까지만요.

내년에는?

아닐 수도 있고요.

소년에게 스무디를 권했더니 커피를 마신다고 했다. 캐러멜마키아토 같은 걸 말하느냐고 했더니 아메리카노가 좋단다. 나도 아메리카노를 한 잔 더 시켰다.

오전이라 카페는 한가한 편이었다. 녹음하고, 녹취를 풀고, 그걸 다시 기사화하는 시간을 절약하려고 평소에는 노트북을 앞에 두고 타이핑하는데 그날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노트북을 덮고, 녹음기만 켰다. 질문을 적어온 노트를 펼쳤다가 가방에서 볼펜을 꺼내 번호가 매겨진 질문을 쓱쓱 지웠다. 커피가 담긴 종이컵을 왼쪽으로 15도, 오른쪽으로 15도쯤 돌리면서, 플라스틱 캡을 열었다 닫았다 하면서, 목이 늘어난 소년의 티셔츠를 눈으로 따라가면서 인터뷰를 했다. 아니, 소년의 이야기를 들었다.

“술 마실 줄 아냐?” 소년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찌를 테니까 들어 와. 다치게 할 생각은 없었다. 겁만 주려고 했어.” “왜요.” “그래야 사람들이 무시하지 않으니까.” 소년이 신발을 벗었다. 남자는 부엌에서 술과 술잔을 가지고 나왔다. 이거라도 마셔라. 캔커피를 소년 앞에 놓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소년은 담배꽁초가 수북하게 쌓인 페트병을 남자 쪽으로 밀고 엉덩이를 붙였다. 여기저기서 주워온 것처럼 제각각이고 어울리지 않는 의자, 서랍장이 늘어서있고 조명은 어두웠다. “아버지가 속해 있는 회사 사장이 또 다른 사장한테 회사를 넘기고 그 사장이 또 다른 사장한테 회사를 넘기고 그 사장이 또 다른 사장한테 회사를 넘겼대요. 그런데 맨 위에는 그걸 다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우두머리 사장이 있대요.” 야아옹, 노란 눈의 고양이가 귓불을 핥는 듯 목덜미가 간지러웠다. 소년의 머릿속에서 수백 마리의 나비가 날았다. “그러니까 우두머리 사장이 있는 게 왜 문제가 되는데?” “다단계 하도급 모르세요? 안정고용 보장해라,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조그만 게 똑똑하네. 그런 건 너네 아버지가 말해줬냐?” “지난번에 서울에 갔었어요. 거기서 전단지도 읽고 다른 아저씨들이 하는 말도 들었어요.” 남자는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웠다.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셨다. 남자의 줄담배에 소년은 눈이 따가웠다. 남자가 준 캔커피를 비운 뒤 “이만 가볼게요. 인터넷 장애 접수는 고객센터로 하시면 돼요.” 말하며 일어섰다. 남자는 대답 대신 잔을 비웠다. “신청 당일 방문은 어려울 거예요. 대체인력이 적어서 오래 걸린댔어요.” 문을 열자 계단 창문으로 해가 들어와 있었다. 소년은 운동화에 머문 햇살을 한참 내려다봤다.

“애 앞에서 말조심 합시다” “누군 애 없나, 나도 자식 생각하면 피눈물…”

아버지를 따라 여의도에 간 적이 있었다. 일요일이었고, 소년은 나가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무심코 바라봤다. 시선을 느꼈는지 신발을 신던 아버지가 “궁금하면 가볼래?” 하고 물었다. 일도 하지 않고 매일 서울에서 뭘 하는 걸까, 소년은 궁금한 것도 같았다. 버스를 타고 역에 도착해 지하철을 두 번 갈아탔다. 5호선을 타자 아버지와 같은 옷을 입고 있는 사람들이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젊은 여자도 있었다. 모두 입술을 꽉 다문 채 웃지 않았다. 먼저 온 사람들이 줄을 맞춰 가지런히 앉아 있었다. “지회별로 모여 앉는 거야.” 아버지가 설명했다. 아버지가 앞장섰고 소년은 아버지를 따라갔다. 걸음이 빨라 소년은 종종걸음을 쳤다. 무대가 있고 플래카드가 있고 깃발이 있고 종이가 있었다. 큰 카메라를 들고 사진 찍는 사람도, 삼각대를 세워놓고 촬영하는 사람도 있었다. 아버지는 가방에서 휴대용 방석을 꺼내 소년의 발밑에 깔았다. 아버지는 앞줄, 그 앞줄에 앉은 사람들에게 인사했고 그들은 한 번씩 더 뒤를 돌아보며 소년을 확인했다. 불편한 기색인지, 귀찮다는 내색인지, 걱정하는 마음인지 알 수 없었다. 열 시가 되자 붉은 조끼를 입고 머리에 붉은 띠를 두른 남자가 마이크를 잡았다. 원청. 소사장. 오징어다리. 고용안정. 다단계 하청. 생존권. 근로기준법. 비정규직. 반복되는 단어가 머리에 남았다. 한 어른이 소년을 가리키며 “노래 한 곡 할래?” 물었다. “딥딥.” “애들이 경험할 만한 일은 못되지.” “오늘은 적당히 합시다.” 남자 목소리였다. “뭐요? 내가 잘못한 게 뭔데? 애들도 세상이 이렇다는 걸 알아야 해. 씨발.” “욕까지 할 건 또 뭐요? 애 앞에서 말조심 합시다.” “누군 애 없나. 나도 자식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고. 피눈물이!” 소년이 아버지를 돌아봤다. 아버지는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열한 시 반에 배식차가 도착했다. 시민단체에서 무료로 밥을 제공한다고 했다. “후원금이 들어올 때까지만이야.” 파업 초반에는 도시락을 시켜 먹었는데 조합원 숫자가 늘어나면서 비용을 감당하기 힘들어졌다고 했다. 소년과 아버지는 2호차에 배정됐다. 순서가 되자 식판을 들고 밥과 반찬을 배식 받았다. 남자들은 식판에 밥을 산처럼 쌓았다. 다들 그랬다. 학교에 저렇게 먹는 선생님이 한 명 있었다. 옆 반 담임이었는데 언제나 한가득 밥을 펐다. 아이들 사이에서는 애인과 헤어졌다는 소문이 나 있었다. 전에 있던 학교에서 쫓겨나서 그렇다고도 했다. “충격으로 많이 먹는 거래.” “옛날 학교에서는 안 그랬는데 우리 학교 와서부터 저렇게 된 거래.” 아이들은 옆 반 선생님을 돼지밥통이라고 불렀다. 소년은 그 선생님이 정말 밥을 다 먹는지 슬금슬금 훔쳐봤지만 항상 먼저 식당을 나오느라 확인하지 못했다. 천막도 돗자리도 없이, 맨바닥에서의 식사는 어색했다. 다들 말이 없어서 더 그랬다. 후식은 없었지만 학교에서 먹는 것보다 나았다. 이따금 식판에 담겨 나오는 주스나 젤리, 과일 등으로 입가심을 하곤 했다.

오후가 되자 무리에서 이탈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삼삼오오 짝을 지어 어딘가로 갔다가 얼굴이 빨개져서 돌아왔다. 수염을 깎지 않은 남자가 아버지와 소년을 불렀다. 편의점 앞 파라솔에서 붉은 조끼를 입은 사람들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수염은 가게에서 소주와 아이스크림을 사들고 나왔다. 소년에게는 종이컵 대신 플라스틱 스푼을 건넸다. 아버지는 수염에게 술을 따라주고, 자신의 잔에도 따랐다. 안에서 종이컵 하나를 더 들고 나와 소년 앞에 놓았다. “이 녀석도?” 수염이 물었다. “어려서부터 둘이 살았더니 술친구가 돼버려서요.” 소년은 술을 삼키고 플라스틱 스푼으로 아이스크림을 퍼먹었다.

아버지가 제대했을 때 전 벌써 세상에 나와 있었대요. 결혼식은 못하고, 그래도 취직은 했는데 그때는 지금보다 보수도 좋고 근무환경도 나았대요. 사장이 자꾸 누군가에게 회사를 넘기기 전까지는요. 월급도 점점 깎이고 휴가비도 안 나왔대요. 갈 데 없는 처지란 걸 아니까 목숨 줄을 갉으며 붙잡고 늘어지는 거라고 아버지가 말했어요.

아버지라는 호칭은 드라마에서나 쓰는 줄 알았는데.

그렇게 부르지 않으면 아버지를 깔보게 될 것 같아서요. 별 볼일 없는 인생인 거 저도 아는데, 다른 사람이 아버지 무시하는 건 짜증나요.

엄마나 다른 형제는?

딥딥.

벨이 울렸다. 소년은 아버지가 있는 욕실에 잠깐 시선을 뒀다가 소리를 찾아 이동했다. “비냐, 나 기억 하겠냐, 규만 아저씨다.” “딥, 알아요.” “늦은 줄은 안다만.”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자정이 넘었다. “또 칼을 떨어뜨렸어요?” “그런 거 아니다. 지금 좀 올 수 있냐. 너랑 상의할 게 있는데.” 소년은 규만이 무섭지 않았다. “딥.” “따듯하게 입고 와라.” 규만은 라면을 먹고 있었다. 음울한 집안 풍경은 전과 비슷했다. “너도 먹을래?” 소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년이 라면을 먹는 동안 규만은 담배를 피웠다. 소년이 기침을 하자 얼른 담배를 비벼 껐다. 규만은 지난번과 달라 보였다. 점잖아진 것 같았다. 소년이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나랑 어디 좀 가자.” “어디요? 가보면 알아.” 규만은 베란다에서 돌돌 말아 끈으로 묶은 현수막을 들고 나왔다. “이게 뭐예요?” “가보면 안다.” 소년에게 들게 한 비닐봉지 안에는 가위와 끈, 테이프 같은 것이 담겨 있었다. 규만은 현수막을 자전거 뒤에 싣고 소년에게 건넸던 봉지는 핸들에 걸었다. “이건 네가 끌어라.” 소년에게 자전거를 넘겨주고 접이식 사다리를 어깨 위에 올렸다. “하늘대공원까지 걸을 수 있겠지?” “딥.”

공원 입구에서 규만은 현수막 묶음을 바닥에 펼쳐놓고 하나하나 분리했다. “너는 옆에 있기만 하면 돼. 내가 다 할 테니까.” 위아래 나무토막이 하나씩 있고 가로세로 1미터 정도 되는 천이 붙어 있었다. 노란색 천에 검은 글씨는 인쇄체가 아닌 손글씨였다. “아저씨가 적은 거예요?” “그래.” 소년은 현수막에 쓰인 글을 읽었다. 어떤 건 한 줄이고 어떤 건 단어 하나만 크게 적혀 있었다. 삐뚤빼뚤, 글씨가 점점 작아져 우습게 보이는 현수막도 있었다. 세어 보니 전부 열 개였다. “이걸 어떻게 하려고요?” “나무에 매달 거다. 길 쪽에서 글씨가 보이게끔 말야.” “왜요?” “왜라니?” “허락받은 거예요?” “누구한테 허락을 받냐. 대한민국 국민에게는 표현의 자유가 있는 거다. 사다리가 흔들리지 않게만 잡아줘라. 끈도 다 달아 왔으니 나무에 둘러 매달기만 하면 된다.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일단 열 개만 걸 거다. 욕심 부리지 않고 조금씩 할 거야. 대자보라고 들어봤냐. 매일 수십 장을 썼지. 플래카드도 많이 만들었는데 간만에 하려니 쉽지 않더라. 내 나이도 곧 오십이야. 이십 년도 더 된 일이지. 나를 게임만 하는 멍청이라고 생각했겠지.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니었다. 또리를 잃은 뒤 너무 오래 방황했어.” 규만은 끈을 이빨로 꽉 물고 있다가 팔을 뻗어 다른 쪽 끈을 당긴 뒤 나무에 묶었다. 위가 묶이면 아래를 고정하는 건 쉬웠다. “이제부터는 또리 찾는 일에 집중할 거다. 또리 이름이 바람에 나부끼게 해야 한다. 사람들이 볼 수 있어야 해. 일단 현수막에 붙은 끈으로 한 번 묶고 비닐봉지에 담아온 끈으로 한 번씩 더 묶을 거다. 테이프도 붙일 거야. 안전하게 해야 하거든. 혹시나 강풍에 떨어져 누가 다치기라도 하면 어떡하냐. 횡단보도 근처나 버스정류장, 상가 앞에는 걸지 않을 거야. 운전자의 시야를 가리면 안 되거든. 하늘대공원 주변은 괜찮지. 상가도 없고 길게 가로수가 이어져 있잖아. 현수막을 더 제작하고, 추가로 걸 만한 곳도 알아볼 거다. 도시는 넓어. 얼마든지 걸 수 있을 거다.” 사다리의 위치를 옮기고 그 위를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규만은 한없이 중얼거렸다. 혼잣말 같지만 음성에 힘이 넘쳤다. 플래시가 있었더라면 규만을 밝게 비춰줬을 텐데. 가로등 불빛은 너무 멀고 희미했다.

마지막 열 개째였다. 규만이 사다리에서 내려오더니 소년 앞에 약지 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왼손 약지와 오른손 약지를 나란히 들어 올렸다. 길이가 달랐다. “왜 그런지 아냐?” “딥딥. 돈을 못 갚았어요? 영화에서처럼 나쁜 놈들이 손가락을 자른 거예요?” “공장 사람들 많이 원망했지. 지금은 잊었어. 그래도 가끔 못 견디게 아플 때가 있다. 술도 마셔보고 멀쩡한 사람에게 시비도 걸어봤지. 그래봤자 눈곱만큼도 치유되지 않아. 게임으로 시간을 소모하는 것도 마찬가지고….” 자정이 지나도 도시의 밤은 분주했다. 잦은 헤드라이트 조명에 규만의 얼굴이 하얘졌다 까매졌다 했다. 가면놀이를 하는 것 같았다. “너를 만나기 전까지는 몰랐다. 네 앞에 칼을 들고 서 있던 나는 잊어라. 내게는 또리뿐이었다. 자식처럼 키웠지. 칼에 칼로 맞서는 것 말고 다른 방법도 있지 않겠냐. 머리를 써야지.” 규만은 사다리를 접어 자전거 옆에 기대 세웠다. 현수막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보며 사진을 찍었다. 플래시가 터져 밝게 나오는 바람에 글씨가 보이지 않는 것도 있었다. 초점이 맞지 않고 흔들린 사진이 태반이었다. “너는 공부 잘하냐.” “딥. 1등이에요.” “좋아, 계속 열심히 해라. 또리를 찾기만 하면 너도 녀석에게 반하게 될 거다.” 규만은 휴대전화를 점퍼 안에 넣었다. “다 됐다. 이렇게 증거를 남기는 거야.” 현수막을 싣고 왔던 자리에 사다리를 고정시키고 규만이 안장을 가리켰다. “앉아라.” 소년을 자전거에 태우고 핸들을 잡았다. 키가 큰 규만은 흔들림이 없었다. 그가 끄는 자전거에, 소년은 앞만 보며 앉아 있었다.

소년과 헤어지면 얼른 땜빵 기사를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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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화가 김태헌]

다음 날 집에 오는 길에 소년은 하늘대공원에 가봤다. 간밤에 규만이 걸었던 현수막이 한 개도 없었다. 바닥에 짧은 끈 몇 개가 떨어져 있었다. 혹시나 해서 인도를 두 번 왔다 갔다 했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규만에게 전화를 걸어야 했다. 공중전화를 찾아야 했다. 소년은 집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공중전화는 보이지 않았다. 슈퍼에 들어가 할머니에게 휴대전화를 빌려달라고 말했다.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웅웅. 잘 들리지 않았다. “아버지, 어젯밤에, 자정쯤에 걸려온 전화 발신번호 좀 알려줘. 통화목록에 있을 거야.” 30초 후에 다시 전화를 걸어 번호를 받아 적었다. 소년은 비상금을 꺼내 할머니에게 건넸다. “한 통화만 더 할게요.” 발신음이 오래 울렸다. “파파이슬? 아저씨, 현수막 다 떨어졌어요. 어젯밤에 건 거 다 떨어졌다고요. 하나도 없어요. 끈은 제가 주워왔고요.” “그러냐. 하루는 버틸 줄 알았는데. 비, 제대로 해야겠다. 철저하게 준비해야겠어. 일단 끊자.” 소년은 집에 돌아와 규만의 연락을 기다렸다. 텔레파시라도 올 것처럼 앉아 있었다. 한두 개도 아니고 열 개를 모두 떼버리다니. 두 번씩 단단히 묶었는데도. 아버지에게 전화했을까 봐 집에 돌아온 아버지의 휴대전화부터 확인했다. 다음 날 아저씨가 혼자서 현수막을 걸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하늘대공원에 갔다. 가로수와 전봇대는 깨끗했다. 아무것도 걸려 있지 않았다. 그 다음 날, 그 다음 날도. 낙담해서 다시 게임에 빠진 건 아닐까. 놈들에게 흠씬 맞아서 기절해버린 건 아닐까. 또리는 어디에 있을까. 소년은 규만의 집에 가보기로 했다.

 

 소년은 내가 질문할 틈도 주지 않고 이야기를 쏟아냈다. 이걸 어떻게 기사로 푼담? 이게 감정노동자 기사가 될 수 있어? 걱정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인터뷰를 멈출 수 없었다. 소년을 떠날 수 없었다. 편집장에게 아쉬운 소리 하는 게 싫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소년과 헤어지면 얼른 땜빵 기사를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손잡이를 돌리니 문이 열렸다. 거실에 있던 가구며 쓰레기들이 말끔하게 치워져 있었다. 대신 넓게 신문지가 깔리고 그 위에 천과 물감, 붓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소년은 규만이 쓰다 만 글귀를 눈으로 좇았다. 또리를 찾습니다. 재발방지·진실·생명…. 규만이 화장실에서 나왔다. “왔냐. 들어와라.” “궁금해서요. 사고로 손가락이 다 잘려서 전화도 못하는 건 아닐까 걱정했어요.” “이것저것 알아보느라 시간이 좀 걸렸다. 혼자 하려니 만만치 않더라. 색깔 있는 천을 샀다. 노란색하고 연두색이야. 단풍과 잘 어울리지 않겠냐. 기왕이면 예쁜 색이 좋지.” 며칠 새 규만은 튼튼해진 것 같았다. 키가 더 자라고 얼굴도 이전보다 깨끗해 보였다. “금요일 밤에 걸고 일요일에 찾아오는 거야. 토요일, 일요일에는 공무원도 쉬니까. 주말에 특근해서 뗀다는 건 스스로 나쁜 놈이란 걸 증명하는 꼴밖에 안 돼. 그렇게는 안 할 거다. 하늘대공원 관할 구청에 전화를 걸었었다. 범법자 취급하면서 폐기를 당연하게 말하더라. 돈으로 물어내라고 큰소리쳤다. 다섯 개씩만 걸 거다. 눈에 띄는 듯 안 띄는 듯, 그 편이 좋아. 새로 만든 문구가 마음에 든다. 베낀 건 없어. 이번에는 글귀 아래 이름을 적었다. 실명으로 말야. 아직도 졸업앨범을 갖고 있었지 뭐냐. 동창들 이름을 좀 썼다. 독특한 이름은 일부러 안 썼어. 이 나라에 동명이인이 한 둘이냐?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은 많으니까 항의 들어올 일도 없다. 여기 봐라, 네 이름도 있어. 철이가 너다.” “철이요?” 소년이 되물었다.

 “아빠가 지금 병원에 계시다는구나, 근무 중에 감전 사고를 당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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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화가 김태헌]

“철이면 어떻고 비면 어떠냐. 너를 생각하면서 썼으니 그걸로 됐다. 옳은 일이야. 옷장을 뒤져 똑딱이 카메라도 찾았다. 막차를 타고 갈 거야. 올 때는 택시를 타야지. 모아놓은 돈이 좀 있었다. 현수막은 그다지 돈이 들지 않아. 내가 글씨를 쓰니 인쇄비도 절약할 수 있고 다행 아니냐.” “글자를 또박또박 쓰면 안 돼요? 크기도 일정하게 맞추고요. 너무 허접해 보여요.” 소년이 충고했다. “크기가 중요한 게 아니다. 중요한 건 자신감이야. 깃발은 자신감이다, 비.”

 일요일 낮에도 현수막은 그대로 있었다. 소년은 규만과 교회로 올라가는 길목에 돗자리를 펴고 앉았다. 행인들에게 방해 되지 않게 최대한 벽 가까이에 등을 붙였다. “책 가져왔지?” “딥.” “몇 시간만 버텨보자. 사람들 반응을 보는 거야.” 예배드리러 온 신도들이 길에 걸린 현수막을 쳐다봤다. 성경을 손에 들고 나무 아래 서서 주의 깊게 보는 사람도 있었다. “또리가 뭐요?” 지나가던 시민이 물었다. “제 아들 이름입니다. 딸이기도 하고요. 아주 영리하고 꿈 많은 놈이었죠.” 규만이 대답했다. 소년은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손에 들고 있었지만 집중이 되지 않았다. 중절모를 쓴 노인이 현수막 아래 섰다. 안색이 좋지 않았다. 소년과 규만이 동시에 서로를 쳐다봤다. 노인은 눈도장 찍듯 하나하나 꼼꼼히 현수막을 읽었다. 규만은 잠시 생각하는 것 같더니 엉덩이를 들고 일어나 노인에게 다가갔다. 기다렸다는 듯 노인이 쯧쯧 혀를 찼다. “뭐가 잘못 됐습니까, 어르신.” “이 글, 당신이 썼나?” 노인은 규만을 돌아보지 않고 여전히 시선을 위에 둔 채로 물었다. “뭐가 잘못 됐습니까?” “잘못 됐지. 잘못 돼도 한참 잘못 됐어. 세상이 점점 옛날로 돌아가는 것 같애. 더 나빠졌어.” 노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무고한 양민이 학살당하고 친일파들이 애국자 행세를 하고…. 안 될 일이지. 안 될 일이야. 어디서 똥물이 흘러들어온 건지….” 노인은 규만과 하늘을 번갈아 올려다보더니 지팡이로 통통 바닥을 두들기며 멀어졌다.

 아버지가 소년을 흔들어 깨웠다. 소년이 눈을 비비며 이불을 젖혔다. “아버지 오늘부터 출근해.” “파업 끝났어?” “끝나지 않았어. 하지만 그만하기로 했어.” “나 때문이야?” “너랑 나 때문이지. 파업도 아버지가 선택한 거고 출근도 아버지가 선택한 거야. 네 잘못은 없어.” 소년은 기쁘면서도 가슴이 아팠다. “우산 챙겨가라.” “딥.” 소년은 세수를 하고 냉장고를 열었다. 물밖에 없었다. 아버지가 월급을 타면 슈퍼에 가야지. 아버지가 월급을 타면 머리를 잘라야지. 신발장을 열어 우산을 꺼냈다. 두 개를 펼쳐보고 온전해 보이는 걸 집었다. 앞으로 당겨도 보고 뒤로 밀어도 봤지만 녹슨 문은 잘 열리지 않았다. 습한 날은 현관문이 더 말썽이었다. 살이 부러진 우산을 모자처럼 머리 위에 쓰고 소년은 이제 딥딥이 지겹다는 생각을 했다. 어떤 걸로 바꿀까. 뢀? 얕? 닫닫. 팟팟. 브, 푸푸, 풉? 입술을 벌렸다가, 다문 채 앞으로 내밀었다. 횡단보도 앞에 섰다. 초록색 조끼에 비닐우의를 입은 학부모 봉사자가 얇은 깃발을 들고 서 있었다. 3일 전부터 다시 급식이 나왔지만 맛은 형편없었다. 이틀에 한 번꼴로 감자조림이 나왔다. 가난한 사람에게는 편식이 어울리지 않아, 딥. 아무리 되새기고 곱씹어도 식판을 깨끗이 비우기 힘들었다. 창밖의 이슬비는 좀처럼 그치지 않았다. 점심시간, 교실로 피자가 배달됐다. 반장과 부반장 엄마는 피자를 받으려고 안달 난 아이들에게 두 조각씩 나눠줬다. 아이들은 환호하고, 누군가 맛없는 급식 같은 건 아예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복도에서 물을 마시고 있는데 옆 반 선생님이 손짓으로 소년을 불렀다. 선생님은 무릎을 꿇을 것처럼 자세를 낮추더니 소년의 눈을 보고 말했다. “아빠가 지금 병원에 계시다는구나. 근무 중에 감전 사고를 당했대. 선생님이랑 같이 가자.” 소년의 담임은 출산 휴가 중이었다. 임시 담임을 맡은 선생님은 보이지 않았다. 소년은 울고 싶었다. 우리 아버지 파업 중이에요, 일 안 해요, 대답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옛날이, 지금처럼 인터넷이 보급되기 전이 더 편했어. 그때는 고객이 음료수도 주고 심지어 돈을 주는 사람도 있었거든. 고맙다는 말을 많이 들었지. 요즘 고객들은 참지 못해. 접수하자마자 당장 달려오길 바란다니까. 선생님이 소년의 어깨를 살짝 쳤다. “가자.” 응급실에서, 아버지는 산소호흡기를 달고 누워 있었다. “지금으로써는 어떤 상황이라고 말씀드리기 어렵네요. 검사를 좀 더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사업장이었다고는 해도 고압전력이 흐르지 않았기 때문에 생명에 위험을 끼칠 수준은 아니었을 거라고 짐작되지만…. 비가 와 습도가 높은 데다 사고 당시 충격으로 의식을 잃은 걸 수도 있고요.” 단발머리 의사가 설명했다. 소년은 아버지의 새파란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심장마비는 아니겠지. 영영 깨어나지 않는 건 아니겠지. 엄마처럼 나를 버리는 건 아니겠지, 아버지…. 고객이 욕을 해도 그 욕을 듣고만 있어야 돼. 한마디라도 했다가 민원이 제기되면 꼼짝없이 죄인이 되거든. 아버지가 무슨 죄를 지었냐. 사는 게 죄는 아니잖아, 비. 아버지와의 술자리에서 들었던 얘기가, 파업 현장에서 들었던 얘기가, 아버지가 잠꼬대처럼 했던 얘기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시에서 운영하는 병원이 싸다는구나. 그쪽으로 가는 것이 병원비 지원도 받을 수 있고 여러모로 안정적일 것 같다. 선생님이 알아서 할 테니까 너는 여기에 이름만 적어라. 너희 담임과도 통화했다. 정말 연락할 사람이 없는 거냐?” 소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규만이 떠올랐지만 가족도 친척도 아닌 아저씨가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다.

 소년은 매일 아버지 곁을 지켰다. 의식은 없지만 느낌은 있을 거라고 믿었다. 무표정에도 숨어 있는 감정이 있는 것처럼. 식사는 편의점 컵라면으로 해결했다.

“바다를 본 적 없다고 해도 어딘가에 바다가 존재한다는 것을…”

구청 직원이 소년을 찾아와 조만간 다시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갔다. 종종 아버지의 휴대전화가 울렸지만 모르는 번호는 받지 않았다. 혼자만 살겠다고? 대오에서 이탈한 배신자. 너만 자식 있냐. 너만 자식 있어? 아버지를 비난하는 메시지는 읽자마자 지워버렸다. 비, 새로운 장소를 찾았다. 듣자 하니 그 동네 병원 원장이 좋은 사람이라더라. 직접적인 도움은 못되겠지만 그 근처에 걸어보려고 한다. 환하게 노란색만 걸 거야. 소년은 규만의 메시지를 보고 또 봤다.

 
 잠깐, 아버지가 병원에 있다고? 어제 나랑 통화했는데?

 제가 아빠인 척 했어요. 아빠 목소리 흉내 냈어요. 기자님과 이야기하고 싶어서.

 …….

 고맙다는 말도 못하고 어벙한 표정을 지었던 것 같다.

 어른 흉내 낸 꼬마 목소리가 아니었는데…. 연락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분명 어른의 음성이었는데….

 해 뜨기 전, 사위는 어둡지만 병원의 네온사인은 밝았다. 소년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비스듬히 위를 올려다보고 건너편 길가를 쳐다보기도 했다. 어슴푸레한 빛 속에서 얼마나 걸었을까. 눈에 익은 현수막, 낯익은 글씨체가 눈에 띄었다. 가까이 가보니 노란색 현수막이 몇 개 걸려 있고 바닥에 찢겨 떨어진 잔해가 보였다. 발로 짓밟힌 것도 있었다. “아저씨, 글씨가 다 쪼개졌어요.” 소년은 좀 더 걸어갔다. 억지로 끌어내리다가 찢어졌는지 하체 없는 몸처럼 덜렁거리는 것도 있었다. 가슴이 쿵쾅거렸다. “아저씨, 누군가 현수막을 떼어서 수풀 속에 돌돌 말아놨어요. 칼로 자른 것도 있고 힘껏 당겨 찢어진 것도 있어요. 합법적으로 신고했다면서요. 민원이 들어오면 직접 대응하겠다고 구청에 말해두었다면서요. 그런데 누가 그런 거예요. 왜 그런 거예요.” 소년은 엉엉 울음을 터트렸다.

 규만이 택시에서 내렸다. 떨어진 끈을 묶다 말고 가위를 찾는답시고 가방을 뒤집어엎었다. 테이프와 가위, 칼, 카메라, 종이와 펜이 바닥에 쏟아졌다. 사다리가 없어서 꼭대기까지 손이 닿지 않는다며 짜증을 냈다. 규만은 전에 없이 허둥거렸다. “이 글 어떠냐? 바다를 본 적 없다고 해도 어딘가에 바다가 존재한다는 것을….” 아래는 사라지고 없었다. 규만은 잠시 멈춤 했다. “바다를 본 적 없다고 해도 어딘가에 바다가 존재한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마음에 드냐? 응? 여기에도 네 이름을 달았다. 해줄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어서 미안하다.” 규만의 목소리가 떨렸다. “사람들이 얼마나 보겠느냐고? 찾아주기나 하겠냐고? 쓸데없는 짓이 아니야. 아저씨는 바보가 아니다. 분명히 보는 사람이 있고, 또리를 아는 사람들이 있을 거고, 곧 정보를 공유해 줄 거다.” 규만은 소년이 아주 멀리 있는 것처럼, 소년 아닌 다른 이에게 말하는 것처럼 목청을 높이고 있었다. “아침을 먹으러 가자. 따뜻한 국물을 먹자. 비, 기죽으면 안 돼. 알았냐? 알았느냐고?”

 딥. 딥딥. 딥. 딥딥. 딥. 딥딥. 딥. 딥딥딥. 디디디디비디비딥. 디비디비….

 소년은 눈물 젖은 입술을 뻥긋거리며 어둠 속에서 소리를 질러대는 규만을 바라만, 바라만 보고 있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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