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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 중앙신인문학상 평론 당선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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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수한 주체, 고유한 보편-이수명의 시세계

1. 타자-매트릭스
삶의 완전한 소멸을 전제하지 않는 한 우리는 죽음을 영위할 수 없다. 이런 이유로 죽음은 현실을 초월한 미지의 공간 또는 실현 불가능한 욕망으로 번역된다. 동일한 방식으로 주체는 끊임없이 타자를 욕망하지만 번번이 좌절할 수밖에 없다. 타자는 오직 주체의 죽음과 함께 활성화되기 때문이다. 타자는 주체의 무한성을 보증하는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주체와 그 경계를 무화시키는 유일한 기제다. 엄밀하게 말해 우리는 죽음 또는 타자에 대하여 단 한 마디의 말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의 ‘바깥’에 존재하며-이러한 수사 또한 그것에 대해 말할 수 없음을 재차 확인하는 것이지만-인식의 범위를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자는 자못 당당하게 이렇게 이야기할지도 모른다. “우리의 한계를 극복할 구원자가 탄생하지 않겠는가. 여기 ‘죽음을 무릅쓴 도약’을 수행하는 ‘위대한 인간’이 있지 않느냐”라고. 그러나 혹자의 말은 ‘주체의 위대한 상상력’이 될 수는 있어도 현실화될 가능성은 없다. 십분 양보해서 당신이 위대한 인간이 된다 하더라도 그 위대함이 마주할 실상은 그리 녹록지 않다. 어쩌면 당신은 당신이 마주하게 될 환멸적 현실 앞에서 당신이 발휘한 위대성을 스스로 경멸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시는 어떨까.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스스로 타자가 되거나 타자성을 전유하고 향유한 시인들을 통해 죽음을 담보로 제공하지 않으면서 ‘인간을 넘어선 세계’를 상상하고 즐길 수 있었다. 2000년대 이후 낯설고 때론 고통스러운 감각을 내세워 새로운 시를 선보인 시인들이 일으킨 파장은 실로 강렬했다. 그 파장은 현재까지도 여전히 유효한 듯하다. 그런데 이 충격적 사건에 휩싸여 우리가 간과한 사실이 하나 있다. 이들의 시가 인식적 기반을 갖추고 다원화되는 동안 우리는 그 양상을 추적하는 데 급급했을 뿐 그 기원을 망각하고 말았다. 이를테면 물밀듯이 터져 나오는 시의 기반, 즉 이들의 시가 기존의 문법에 대한 불신과 현실에 대한 환멸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 말이다. 이들이 세계를 ‘읽는’ 주요 개념인 타자, 주변, 이질성. 소수자, 비주류 등은 서정의 기본 개념인 자아와 그로부터 파생된 중심, 동일성, 다수자, 주류 등을 겨냥한 상대적 개념이었다. 따라서 이들의 시가 누릴 수 있었던 강력한 파괴력은 시에 대한 기존의 인식과 감각을 전제하지 않고는 형성될 수 없는 것이었다. 2000년대 이후의 시의 특수한 경향을 ‘탈주’로 규정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기본적으로 어떤 대상, 즉 거부하고 벗어날 수 있는 대상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가 반드시 진리를 추구할 필요는 없지만 “진리는 지식과 비추이적(intransitive) 관계를 맺으며, 심지어 근본적으로 지식으로 환원될 수 없는 것”이라는 바디우의 역설(力說)을 참조하면 2000년대 이후의 시는 최소한 진리를 비추는 거울은 아니다. 그것은 아마도 ‘타자’라는 새로운 매트릭스로 기존의 매트릭스를 대체한 경우에 해당될 것이다. 엄밀하게 말해 이들이 보여준 것은 흔히 말하는 주체의 분열이나 죽음이 아니라 낡은 주체를 갱신한 더욱 강력해진 주체였다. 주체를 대체한 주체의 지적 유희. 어쩌면 이러한 상상과 놀이는 매트릭스에 갇힌 자들이 현실을 영원히 유폐하면서 도달할 수 있는 최후의 위안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들과 함께 ‘죽음’의 문턱에 가까이 갔지만 끝내 그 문턱을 넘지 못했다. 이러한 의미에서 황병승의 ‘실패담’은 주목할 만하다. “나는 보여주고자 하였지요, 다양한 각도에서의 실패를. 독자들은 보았을까, 내가 보여주고자 한 실패. 보지 못 했지… 나는 결국 실패를 보여 주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쓸모 없는 독자들이여, 당신들은 어디에 있었는가.”

이수명은 2000년대 이후에 활발하게 활동한 시인들의 문학적 문제의식을 조망하는 글에서 “비주류의 창궐이 오히려 세계에 대한 이분법적이고 도식적인 이해를 추인한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썼다. 이는 이들의 문제의식이 가져온 파급력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주류에 대한 비주류의 비판이 어떤 형식으로든 주류를 승인하게 되는 모순을 지적하고 있다. 이런 판단의 근원에는 시의 본질이 기존 질서에 대한 비판이나 담론으로부터의 해방을 꿈꾸는 것이 아니라 의식과 감각의 확장, 즉 지금까지 우리가 향유해 왔던 시의 공간을 확장하는 것이라는 확고한 인식이 깔려 있다. 우리는 기존의 시의 문법에 전혀 관심을 갖지 않는 이수명의 시에서 역설적으로 특수한 주체에 의해 촘촘하게 구획된 세계의 불모성을 확인한다. 이수명의 ‘횡단’ 방식은 그녀의 의도와 상관없이 익명적이고 불확실한 보편성을 향하고 있다.

2. 특수한 주체의 불모성
이수명의 시는 읽히지 않는다. 언어는 뚜렷한 대상에 접속하지 못 하고 표류한다. 그녀의 시를 읽는다는 것은 거대한 침묵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일종의 묵언 수행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거기가 어디인지 가늠할 수조차 없는 미궁 속을 헤매다 어느 순간 시의 공간에 들어선 나를 발견한다. 구분선이 무화된 광활한 공간, 현재와 과거, 미래가 뒤섞인 시간, 활성과 비활성이 반복되는 단속적(斷續的) 시공간 속에 우리가 당도해 있음을 확인한다. 그곳은 이미 우리가 제어할 수 있는 공간을 넘어서 있다. 우리는 존재가 언어를 압도하는 사태에 휩싸이는 중이다.

한 사나이가 들판을 달리고 들판이 뚜껑이 없어서 들판의 시대는 사나이를 닫는다. 들판을 닫는다. 들판을 달리고 있는 사나이가 들판을 끌고 온다. 들판은 늘어나는 사용이다. 사나이는 사나이에게로 밀려난다. 시멘트 야채 종이 같은 것들을 끄집어낸다.
-‘시멘트 야채 종이 같은 것들’ 부분

우리는 “시멘트 야채 종이 같은 것들”이 무엇인지 전혀 알 수 없지만 최소한 그것이 어떤 대상을 가리키고 있을 것이라 짐작한다. 이를테면 “시멘트 야채 종이 같은 것들”은 대상을 ‘알 수 없는’ 기표, 달리 말하면 대상 ‘없는’ 기표다. 우리는 언제부턴가 ‘알 수 없는 것’과 ‘없는 것’을 동일시하고 스스로 존재와 무를 구분하는 필터가 되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이제 우리는 그 필터가 매우 낡고 오래되었으며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안다. 인간의 감각과 인식은 얼마나 제한적이고 자기중심적인가. 우리는 너무나 쉽게 욕망에 사로잡히고 윤리에 고정되고 이데올로기에 휘둘리지 않았는가. 우리는 인식할 수 없는 대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멘트 야채 종이 같은 것들”은 존재를 드러내는 강렬한 기표인 동시에 의미 없는 기표다. 그것은 다른 기표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자질을 갖추지 못한 채 홀로 존재한다. 주지하듯이 기표의 의미는 다른 기표와의 차이에서 발생한다. 기표는 독자적으로 의미와 결합할 수 없다. 기표의 의미엔 이미 그것과 구별되는 다른 기표가 내재되어 있다. 따라서 “시멘트 야채 종이 같은 것들”이 의미와 결합하려면 차이를 생성할 수 있는 다른 기표가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는 아쉽게도 그러한 기표를 가지고 있지 않다. 이처럼 언어 체계의 완고함은 “시멘트 야채 종이 같은 것들”이 의미의 차원으로 부상하는 것을 차단한다. 인식 불가능한 대상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언어의 결핍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언어 체계는 이러한 대상을 ‘부재하는 것’으로 공인함으로써 자신만의 특수한 세계를 완강히 구축한다.

그런데 “시멘트 야채 종이 같은 것들”은 일반적인 언어와 다른 구조를 가지고 있다. 예컨대 일반 언어가 ‘A는 B와 같고 C와 같고 D와 같다’의 구조를 취함으로써 A를 B, C, D와 각각 연결함으로써 의미를 생성한다면 “시멘트 야채 종이 같은 것들”은 ‘A는 B, C, D와 같다’의 구조를 취함으로써 의미의 결핍 또는 과잉을 자초한다. 이러한 진술 방식은 대상 A를 언어 체계에 귀속시키는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탈락시키는 것처럼 보인다. 의미를 명확히 하기보다 흐트러뜨리고, 기존의 세계로 끌어들이기보다 그저 ‘거기’에 둠으로써 ‘여기’와는 다른 ‘거기’를 실제화하고 있다.

창을 바라본다. 창문이 비추고 있는 것

이것이 누군가의 생각이라면 나는 그 생각이 무엇인지 모르는 채 누군가의 생각 속에 붙들려 있는 것이다.

내가 누군가의 생각이라면 나는 누군가의 생각을 질료화한다. 나는 그의 생각을 열고 나갈 수가 없다.

나는 한순간,
누군가의 꿈을 뚫고 들어선 것이다.

나는 그를 멈춘다.
-‘창문이 비추고 있는 것’ 부분

“창문이 비추고 있는 것”은 일단 비문(非文)이다. 바르게 쓰면 ‘창문에 비친 것’ 정도가 될 것이다. 원래 이 구절의 중심은 ‘비친 것’으로 어떤 대상을 떠오르게 해야 하지만 그 중심을 살짝 이동시킴으로써 예기치 않은 효과를 창출한다. 이를테면 “창문이 비추고 있는 것”의 중심은 ‘비친 것’이 아니라 ‘비추고 있는 창문’이다. 문법을 고려하지 않고 이 구절을 받아들이게 되면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창문이 스스로 비출 대상을 결정하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그런데 창문의 결정에 따라 창문을 통해 바라보는 풍경이 바뀔 수 있다는 생각은 의심할 여지없이, 단연코 착각일까.

창문이 일종의 프레임이고 창문이 비추고 있는 것이 풍경이라면 창문에 비친 풍경은 거기에 있는 무한하고 광활한 풍경의 일부, 즉 프레임을 통해 본 특수한 풍경이 된다. 같은 방식으로 인간이 프레임을 자처하면 세계는 항상성을 잃고 우연성으로 대체된다. 요컨대 주체에게 세계는 이미 항상 거기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특수한 요구에 의해 구성되고 와해되기를 반복할 뿐이다. 세계는 주체의 특권과 환상을 경유해야만 존재할 수 있는 특수한 대상으로 전락한다. 따라서 세계의 개시라는 거창한 이념은 사실 스스로 초월적 권위를 부여한 주체가 세계를 구성하는 방식인 셈이다.

‘나’는 창문이 거기에 놓인 의도를 알지 못한 채 창문이 비추는 풍경을 바라본다. ‘내’가 바라보는 풍경을 결정하는 것은 이미 주어진 프레임인 “누군가의 생각”이다. 이 경우 최소한 프레임의 이동, 축소/확장, 변형 등의 가능성은 남아 있다. 하지만 ‘내’가 직접 창문이 되면 주어진 프레임은 ‘나’를 구성하는 질료로 고착된다. 더 이상 프레임의 변경 가능성을 기대할 수 없는 멈춰버린 풍경이 형성되는 것이다. 이때 창문에 새겨진 특수한 풍경은 보편성을 획득하고 프레임에서 비켜난 풍경은 무화된다. 따라서 “창문이 비추고 있는 것”은 보편으로 치환된 특수한 풍경이며, 이는 인간이 초월적 존재가 되는 순간, 세계는 주체와의 특수한 관계가 복원되지 않는 한 영원히 봉인될 수밖에 없음을 드러낸다.

3. 대상 없이 존재하는 언어
주체-언어는 단어의 배열 방식을 바꾸거나 문장을 살짝 비트는 것도 감당할 수 없는 취약한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작은 균열에도 휘청거릴 만큼 나약하다. 사실 우리는 ‘나’의 특수성과 불모성을 초월적 권위를 내세워 무마하거나 은폐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이수명은 주체의 자기동일성에 대한 비판이나 주체로부터의 해방을 꿈꾸지 않는다. 그녀의 시는 낡고 오래된 주체를 대체할 새로운 주체의 탄생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저항의 수단도 갖지 못한 채 주체에게 자리를 내준 항상적이고 무한한 세계를 향해 있다. 주체의 한계를 직시하고 그것을 넘어서는 방식이 ‘타자’라는 가면을 쓰고 더욱 강화된 주체의 제 2막을 여는 것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주체의 역동성, 세계의 통일성이라는 환상에서 벗어나면 어떻게 될까. 특수한 주체의 불모성이 드러난 자리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

그가 다시 마네킹을 끌고 간다.
아직 그의 몸에 꼭 맞지 않는
한 덩어리의 시신을 끌고 간다.

상점의 유리 너머에서
마네킹들이 그를 보고 있다.
그가 마네킹에 끌려가는 것을
땀을 뻘뻘 흘리며 끌려가는 것을
-‘마네킹’ 부분

마네킹은 인간이 인간의 몸을 본떠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인간이다. 그러므로 마네킹은 어떤 사물보다도 완벽하게 인간의 몸을 구현하고 있다. 그것도 아주 이상적인 형태로. 이러한 의미에서 마네킹은 주체에 의해 구성된 세계에 대한 환유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의 ‘마네킹’은 단숨에 우리의 인식을 벗어난다. “마네킹들이 그를 보고 있다”는 진술은 단순히 주객을 전도함으로써 의미의 확장을 꾀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진술의 핵심은 인식의 확장이 아니라 오히려 인식의 무화에 있다. 사물의 의미를 비틀고 주체와 객체의 관계를 왜곡함으로써 궁극적으로 대상의 의미를 무화하는 방식. 이를테면 “마네킹들이 그를 보고 있다”는 진술은 뚜렷한 대상을 가지지 않으면서(이런 마네킹은 실제 존재하지 않는다) 마네킹에 대한, 인간과 마네킹의 관계에 대한 인식을 한순간에 무너뜨린다. 우리에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보는’ 마네킹이라니. 이처럼 주어가 될 수 있는 대상을 제한하지 않으며 주어와 호응하는 목적어와 서술어를 특정하지 않을 때, 역설적으로 기존의 인식을 넘어서는 모종의 사태가 드러나는 것이다.

시가 감각이든, 감정이든, 생각이든 간에 무엇인가를 재현하고 있다는 두터운 장막을 걷어내면 시는 본질 또는 전통 등과 같은 전언(傳言)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이때 시는 질료로서의 언어가 아니라 언어 그 자체가 되며 ‘그것’에 골몰하기보다 ‘그것이 아님’을 천착할 수 있다. 이수명은 대상의 의미가 한결같을 수 없다는 것과 언어가 대상을 장악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안다. 그래서일까. 그녀의 언어는 아이러니하게도 대상 없이 존재한다.

한 마리의 새 뒤에 수백 마리의 새들이 있다. 수백 마리의 새들을 뚫고 나는 나아간다. 그들을 침범하지 않는다. 새들이 들끓고 있다.

나를 옮긴다. 돌을 옮긴다. 새들이 돌 속으로 들어가고 돌을 빠져나간다. 새의 반대 방향으로 돌을 옮긴다. 새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새를 전개하다’ 전문

나를 나른다. 잠시 여기로 나른다. 여기를 보여라. 내가 여기로 들어서도 여기는 나에게 오지 않는다. 여기가 나에게 온다면 나는 비로소 여기와 어깨를 맞대고 어깨들은 사라질 텐데 여기에 이어질 텐데 여기는 거기에 있고 여기는 저기에 있다. 여기는 여기저기에 있다. 여기저기에 붙었다가 떨어져 나간다. 나는 부질없이 아침과 겨루고 저녁과 겨룬다. 나를 나른다. 여기로 나른다. 나는 단 한 번 여기를 보여라. 나는 기어이 여기를 앞지르고 만다. 그러나 또다시 여기가 내 앞에 있다. 결코 여기에 온 적이 없는 어떤 것이
-‘나를 나른다’ 전문

이 시들에 등장하는 새, 돌, 여기, 거기, 저기, 여기저기 등은 특정 사물이나 공간을 지시하지 않는다. ‘나’ 또한 우리에게 익숙한 서정적 자아 또는 단일하고 확고한 주체가 아니다. 따라서 이들은 꼭 ‘새’이거나 ‘돌’일 필요 없이 얼마든지 다른 기표로 대체될 수 있으며 ‘여기/거기/저기/여기저기’는 어떤 공간이어도 상관없다. ‘나’는 ‘돌’을 만나면 ‘돌’이 되었다가 ‘새’를 만나면 ‘돌’을 빠져나와 ‘새’가 된다. 이때 ‘나’ ‘돌’ ‘새’의 선후차성은 고려되지 않는다. 앞서 말했듯이 ‘나’ ‘돌’ ‘새’는 특정 사물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나’를 ‘여기’로 나르든(“내가 여기로 들어서도”와 동일한 의미에서) ‘거기/저기/여기저기’로 나르든 ‘나’와 ‘미지의 그 공간’의 관계는 동일하게 유지된다. 어차피 “여기는 거기에 있고 여기는 저기에 있”으며 “여기는 여기저기에 있”으니까. 요컨대 ‘나’를 포함하여 이 모든 사물과 공간 명사들은 의미를 형성하기보다 대상들 간의 관계를 형상화한다. 이와 같이 특정 대상을 전제하지 않고 존재하는 언어는 의미의 영역을 확장하기보다 언어 그 자체의 공간을 확장한다. 이수명의 시는 대상 없이 존재하는 언어들을 펼쳐놓는 한편 이들의 반복적 만남과 중첩, 변형, 대체를 자유자재로 수행함으로써 시의 공간을 무한으로 확장하고 있다.

‘새’ 안에 “수백 마리의 새들”, 아니 수천, 수만 마리의 “새들이 들끓고 있다”. 이런 상황이라면 ‘새’는 이미 우리가 아는 새가 아니다. 시의 언어는 대상에 고착되는 것이 아니라 상황과 맥락 속을 거닐며 대상을 창출하는 것이다. 예컨대 ‘나’는 나를 옮겨 ‘돌’이 되고 ‘새’와 만나면 ‘새’가 들어가고 빠져나간 ‘돌’이 된다. ‘나’는 언제나 “여기저기에 붙었다가 떨어져 나”갈 준비가 되어 있다. 이수명에게 언어의 ‘바깥’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여기’에서 ‘거기’ ‘저기’ ‘여기저기’로 달아나는 언어가 있을 뿐이다. 이처럼 이수명의 시는 그 자체로, 아무런 목적 없이, 자족적으로 존재하며 구성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의미화에 저항함으로써 해석의 불가능을 초래하는 낯선 언어다. 그녀의 시는 재현이 아니라 관계를, 의미가 아니라 존재를, 해방이 아니라 유희를 구현한다.

4. 거대한 침묵
점들로 가득한 무형의 공간이 있다. 이들의 활동 반경이 공간의 크기를 결정한다. 고착된 점이 있고 움직이는 점이 있으며 그 방향은 제각각이다. 이 무수한 점들이 시의 언어임을, 그리고 이 점들이 만들어내는 무형의 공간이 시의 공간임을 알게 되면 “공란이 많아서 울고 싶었다”(‘이 건물에 대하여’)는 시인의 자괴감과 “공란이 걷기 시작한다”에 담긴 강렬한 희열을 이해할 수 있다. 이수명의 시는 결절점이 없는 언어와 언어를 끊임없이 마주치게 하면서 솟아나고/탈선하고/휘어지고/돌파하고/쏟아지고/저 혼자 열리고/춤을 추거나(‘비인칭 그래프’), 연결되고/합쳐지고/흠집을 내고/도려내고/시들고/채워지고/짓씹고/일치하고/질식하고/창궐하고/터져 나오는(‘나는 연결된다’) 중이다. 이 과정에서 펼쳐지는 언어의 중첩, 대체, 변형, 자기 복제와 상호 파괴 등은 시의 공간을 혁신적으로 확장하고 있다.

마치
흘러넘치듯이
끝없이 부풀어 오르듯이
그러면 나는 마치 꿈꾸고 난 후처럼
하얀 양들을 보러 가요
양 떼들이 별안간 걸어 나오는 것을 보러 가요
마치
여기를 묻어버려요
여기가 떠내려가요
내 마음이 죽은 잎들을 뒤집어쓰고

죽은 잎들이 땅을 덮으리
죽은 잎들이 땅을 온통 덮으리
마치
꿈꾸고 난 후처럼
-‘마치’ 부분

잠재된 언어가 솟구쳐 오르는 광경을 보라. “마치/흘러넘치듯이/끝없이 부풀어 오르듯이” 언어가 폭발하고 있다. 예컨대 “하얀 양들”이 “양 떼들”(동일한 대상을 지시하더라도 언어가 형성하는 감정은 실로 다르다)이 되어 “별안간 걸어 나오는 것”은 양에 대한 이미지를 훌쩍 뛰어넘을 뿐만 아니라 양을 단숨에 끔찍한 대상으로 변형시킨다. 어쩌면 우리는 이 장면에서 매트릭스가 감추고 있는 환멸적 현실을 목격할지도 모른다. “여기를 묻어버”리고 “여기가 떠내려”간 텅 빈 자리에 홀로 서서 자기 이외의 모든 것을 질료화해 비대해질 대로 비대해진 주체와 일상에 파묻혀 꿈조차 꾸지 못하는 욕망 부재의 현실을 바라볼지도 모른다. 수면 위로 떠오르는 낯설고 공포스러운 ‘언어 떼’ 앞에서 우리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매순간 “내 마음이 죽은 잎들을 뒤집어”쓸 가능성에 노출되어 있으며 “죽은 잎들이 땅을 온통 덮”어 버리는 황량한 사태에 무방비로 방치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이 당혹스러운 현실을 “마치/꿈꾸고 난 후처럼” 아련하게 기억한다.

이수명은 자아로부터 끊임없이 벗어나는 ‘탈자아적 글쓰기’를 시도하지만 그것이 환기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녀가 벗어나고자 했던 왜소하고 나약한 자아다. 그렇다고 해서 허탈할 필요는 없다. 다행히도 이수명의 시의 특장은 시가 도달한 지점이 아니라 그 지점에 도달하는 과정, 이를테면 해석이 불가능할 정도로 현란하고 다채로운 언어의 활용 방식에 있다. 이수명의 시는 우리가 영원히 유폐한 치명적 결함에 다가가 “너의 모습을 보여줘 너는/풍요합니다”(‘너의 모습’)라고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을 만큼 넓은 공간을 확보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이수명에게 시는 언제나 존재하지만 우리에게 이수명의 시는 가끔만 존재한다. 이수명의 시는 지극히 제한적인 시간을 영위하기 위해 오늘도 우리 앞에서 침묵하고 있다. “잠에서 천천히 깨어났다. 울면서 깨어났다. 잠의 안에서 밖으로 영문 모르는 눈물이 흘렀다. 어깨가 흩어져 있다. 누가 울고 있었던 걸까 누가 잠시 숨어 있었나”(‘누가 잠시’). 잠의 안과 밖을 가로지를 ‘눈물’을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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