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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당·황순원문학상 수상자] 시인 최정례·소설가 한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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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미당문학상 시인 최정례

지리멸렬한 일상의 고통 … 시라도 써 탈출을 꿈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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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산문의 경계를 허무는 작업을 하는 최정례 시인. “자유로워 강렬한 느낌의 시를 쓰고 싶다”고 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개천은 용의 홈타운


 용은 날개가 없지만 난다. 개천은 용의 홈타운이고, 개천이 용에게 무슨 짓을 하는지는 모르지만 날개도 없이 날게 하는 힘은 개천에 있다. 개천은 뿌리치고 가버린 용이 섭섭하다? 사무치게 그립다? 에이, 개천은 아무 생각이 없어, 개천은 그냥 그 자리에서 뒤척이고 있을 뿐이야.
 
 갑자기 벌컥 화를 내는 사람이 있다. 용은 벌컥 화를 낼 자격이 있다는 듯 입에서 불을 뿜는다. 역린을 건드리지 마, 이런 말도 있다. 그러나 범상한 우리 같은 자들이야 용의 어디쯤에 거꾸로 난 비늘이 박혀 있는지 도대체 알 수가 있나.

  신촌에 있는 장례식장 가려고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햇빛 너무 강렬해 싫다. 버스 한 대 놓치고, 그 다음 버스 안 온다, 안 오네, 안 오네…… 세상이 날 홀대해도 용서하고 공평무사한 맘으로 대하자, 내가 왜 이런 생각을? 문득 제 말에 울컥, 자기연민? 세상이 언제 너를 홀대했니? 그냥 네 길을 가, 세상은 원래 공정하지도 무사하지도 않아, 뭔가를 바라지 마, 개떡에 개떡을 얹어주더라도 개떡은 원래 개떡끼리 끈적여야 하니까 넘겨버려, 그래? 그것 때문이었어? 다행히 썬글라스가 울컥을 가려준다 히히.
 
 참새, 쥐, 모기, 벼룩 이런 것들은 4대 해악이라고 다 없애야 한다고 그들은 믿었단다. 그래서 참새를 몽땅 잡아들이기로 했다지? 수 억 마리의 참새를 잡아 좋아하고 잔치했더니, 다음해 온 세상의 해충이 창궐하여 다시 그들의 세상이 되었다고 하지 않니, 그냥 그 자리에서 뒤척이고 있어, 영원히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린다 해도 넌 벌컥 화를 낼 자격은 없어. 그래도 개천은 용의 홈타운, 그건 그래도 괜찮은 꿈 아니었니?

저지방 우유, 고등어, 고무장갑…, 자질구레한 쇼핑 물품을 차 트렁크에 싣는데 외국 사는 친구가 국제전화로 한가한 소리를 늘어 놓는다. 방심한 사이 웬 사내가 내 차를 들이받고, 친구는 전화를 끊지 않는다. 설상가상 동전을 돌려받겠다며 카트를 반납하러 간 사람은 돌아오지 않는다. 건너편 차 안에 갇힌 개는 차창을 긁으며 울부짖는다. 제발 날 놓아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팝송 가사가 오늘 따라 가슴을 친다.

최정례(60) 시인의 2007년 현대문학상 수상작 ‘그녀의 입술은 따스하고 당신의 것은 차거든’의 내용 일부다. 최씨는 이처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난감한 상황을 실감나게 그리곤 한다.

요컨대 지리멸렬해 고통스러운 삶 혹은 일상이 그가 즐겨 사용하는 시 소재다. 언제라도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릴 수 있는 함정 같은 일상, 그곳에서 시인은 탈출을 꿈꾸거나 자주 신세 한탄에 빠진다.

수상작 ‘개천은 용의 홈타운’도 마찬가지다. 흔하디흔한, 그래서 일상적인 속담 ‘개천에서 용 난다’를 비틀었다. 시효가 지난(요즘은 어려서 잘 살아야 성공하기 때문에) 속담에 대한 반감을 익살로 버무렸다.

시인은 왜 일상을 고집하는 것일까. 최씨는 “일상성이 힘이 세기 때문”이라고 했다. 시의 언어는 관념적이기보다 구체적이어야 한다는 것, 그래야 강렬하다는 얘기다.

문제는 일상을 담다 보니 시가 산문화된다는 점. 시인은 “내 산문시와 그냥 산문은 엄연히 다르다”고 했다.

가령 “결론을 대놓고 말하지 않고 주변을 건드린다”고 했다. 일종의 에둘러 말하기다. 그러기 위해 잘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단어들을 갖다 붙이는 경우도 있다. ‘레바논’이라는 중동의 나라 이름에 ‘감정’이라는 단어를 이어 붙여 낯선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시 ‘레바논 감정’(2006년 시집 『레바논 감정』의 표제시)은 그렇게 태어났다.

최씨는 “평소 불만이 시에 나타나는 것 같다”고 스스로 진단했다. 경제적으로 만족스럽지 못한 개인 사정도 있지만 ‘북창동식 미시꿀통’ 같은 낯 뜨거운 이름의 술집이 버젓이 번화가에 자리잡은 우리의 천박한 유흥문화에 대한 불만도 있다. 사회적 불만이다. “시인이 그런 걸 바꾸지는 못하겠지만 그래서 시라도 쓰는 것”이라고 했다.

거침 없이 활달한 시인의 다음 행보가 궁금해졌다. “큰 상을 받아 앞으로 어떻게 써야 할지 막막한데, 어렵거나 지겹지 않아 젊은이들도 좋아하는 시를 쓰고 싶다.” 그의 후속작이 기다려진다.

글=신준봉 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최정례=1955년 경기도 화성 출생. 90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캥거루는 캥거루이고 나는 나인데』 등. 백석문학상·오장환문학상 등 수상.

미당문학상 심사평

대상들이 서로 비추고 산란, 매혹의 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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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당문학상 본심 심사 장면. 왼쪽부터 고형렬·권혁웅·황현산·김기택·이시영씨.

산문시는 우리 시사에서 개척되지 않은 영역에 속한다. “행갈이하지 않은 시, 운율이 없는 시”라는 형식적인 규정이 오해를 낳았다. 그동안의 산문시가 느슨한 시작 메모에 그친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최정례의 산문시에서는 한 이야기가 자유로운 연상을 타고 다른 이야기로 건너가고, 한 이미지가 변신담의 주인공처럼 모습을 바꾸면서 다른 이미지가 된다. 시가 진행되면서 중첩되어 있던 이야기들은 하나의 큰 이야기로 통합되고, 이미지들은 계열을 이루면서 중심 테마에 수렴된다. 이것은 한 번에 여러 개의 삶을 사는 일이자 여러 개의 현재가 이곳에서 웅성거리고 있음을 증언하는 일이다.

 이번 수상작도 그렇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속담을 뒤틀어 얻어낸 저 유머는, ‘개천은 아무 생각이 없어’라는 현실주의에 의해 부정되고, 화를 내는 한 사람(그는 ‘용용 죽겠지?’의 대상이다)에 대한 묘사로 옮겨가며, 장례식장 가는 길에서의 상념(우리는 모두 죽으러 가거나 죽은 자를 위로하러 가는 길 위에 서 있다)을 거쳐, 참새/해충이라는 알레고리로 귀결된다. 여기에 이르면 어느새 해충은 사라지고 참새와 용의 대립이 민중과 권력자의 대립으로 전환된다. 누가 해충이니? 참새들이니, 아니면 참새를 멸절시켜 재앙을 부른 자니? 흥, 화내는 너도 개천에서 났잖니? 이야기가 거듭되면서 모든 대상들이 서로를 비추며 무수한 의미들을 산란시킨다. 이 매혹적인 경지에 수상의 영광이 가야 한다는 데 의견이 일치했다. 수상을 축하드린다.

심사위원=권혁웅·고형렬·김기택·이시영·황현산(대표집필 권혁웅)

황순원문학상 소설가 한강

타인 아픔 온전히 끌어안기 불가능하겠지만 계속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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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의 죽음이라는 쓰라린 체험을 소설로 쓴 한강씨. “고통이 커 쉽게 써지지 않았다”고 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시적인 정취가 물씬 풍기는 제목의 소설집 『여수의 사랑』, 육식의 폭력성을 과격하게 고발한 연작 장편 『채식주의자』. 소설가 한강(45) 하면 얼른 떠오르는 작품들이다. 1993년 시(詩)로, 이듬해 소설로 연거푸 등단한 그는 정연한 바깥 세상의 질서보다는 우리 내부의 혼돈, 정상보다는 강박, 빛보다는 어둠을 주로 응시해 왔다. 언어 사용에 민감한 시적 촉수로 세공한 그의 소설 문장들은 후벼파듯 가슴을 휘저어 놓는 경우가 많았다. 그걸 ‘한강표 소설’이라고 하자. 등단 20년을 넘기며 한강표는 장편소설 6권, 소설집 3권, 시집 한 권으로 불어났다. 수량이 만만치 않은 물줄기다.

황순원문학상 수상작인 단편 ‘눈 한송이가 녹는 동안’ 역시 이전 소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소재는 잡지사 내 노동쟁의. 사십대 초반의 여성 화자 k에게 죽어 유령이 된 옛 직장 남자 선배가 찾아와 역시 고인이 된 여자 선배를 함께 회상한다는 줄거리다. 생전 여자 선배는 짧은 인생을 살면서도 서로 상처 주고받기를 멈추지 못하는 인간들을 벌레 같다고 여겼다. 벌레 같은 인간이 타인의 고통을 진정으로 이해할 길은 없다. 하지만 소설은 제목대로 짧은 시간일 망정 마음이 서로 통해 평안함을 얻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한강표가 변하는 걸까.

한씨는 “쓰는 데 8개월이 걸렸다. 유난히 힘들었던 작품”이라고 했다. “그래서 ‘계속 쓰라는 격려로 알겠다’는 남들의 흔한 수상 소감이 그저 상투적인 표현이 아니라 진심이 담긴 말이라는 걸 실감했다”고 했다. 황순원문학상이 그런 격려로 느껴졌다는 얘기다.

쓰기 어려웠던 이유는 상처가 여전히 생생해 욱신거리는 실제 사건을 다뤄서다. 소설 속 k처럼 한씨는 옛 직장 선배가 죽은 지 3년 후에 그 사실을 알게 됐다고 했다.

한씨는 최근 ‘논픽션’에 집중하고 있다. 지난해 80년 광주항쟁 피해자들의 아픔을 다룬 장편 『소년이 온다』를 출간했다. 소설은 즉각 반향을 불렀다. 17쇄 5만 부가 팔렸다.

- 실제 사건들을 잇따라 소설로 썼다.

“아홉 살 때 어른들 어깨 너머로 광주항쟁에 대해 듣고 큰 공포를 느꼈다. 인간의 폭력성에 대해 끈질긴 의문을 품게 됐다. 『소년이 온다』는 그 의문에 정면으로 맞서 본 거다. 폭력에 맞서 인간적 존엄을 지키고자 했던 사람들도 그리려고 했다. ‘눈 한송이…’는 『소년이 온다』와 통한다. 해고가 뻔히 예상되는데도 부당한 사측에 맞서 윤리적 선택을 하려 애쓰는 사람들을 그리고 싶었다.”

- 화자 k는 타인의 고통을 충분히 이해할 수 없어 절망한다. 100% 입장 바꾸기가 가능한가.

“가능하지 않겠지. 그러나 그래도 시도해야 한다. 불가능하지만 순간적이나마 가 닿으려고 노력하는 것, 그게 문학이 할 수 있는 전부일 것 같다.”

- 누군가 소설이 너무 무겁지 않냐고 평한다면.

“괜찮다. 내 소설을 읽고 기분이 나빠지더라도 그건 순간이니까. 그렇게라도 그 독자와 나는 만난 거다.”

- 신나는 일이 많은데 왜 소설을 읽어야 하나.

“인간의 내면, 삶에 대한 의문을 깊숙이 파고 들어 생생하게 보여주는 데 문학만한 예술은 없다. 언어는 완벽하지 않지만 그만큼 유용한 도구도 없다. 살아 있는 인간을 가깝게 느끼고 싶다면 역시 답은 문학이다.”

『채식주의자』를 쓸 때 한씨는 손목이 아파 노트북을 못 칠 정도였다. 볼펜을 거꾸로 잡고 자판을 두드려 작품을 완성했다. “지독한 구석이 있는 것 같다”고 하자 “달리 방법이 없어 그런 것” “대단할 것 없다”고 덤덤하게 답했다.

글=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한강=1970년 광주광역시 출생. 연세대 국문과. 동리문학상·이상문학상 수상.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교수.

황순원문학상 심사평

고통과 구원, 아름답고도 정교하게 맞물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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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순원문학상 본심 심사 장면. 왼쪽부터 임철우·성민엽·최윤·심진경·서영채씨.


이번 황순원문학상 본심에서 집중적으로 논의된 한강과 권여선, 조해진의 소설은 모두 세월호 사건으로 인한 현실의 변화와 심리적 파장을 반영이라도 하듯 죽음과 고통, 죄의식 등과 같은 문제를 그들 고유의 윤리적 감각으로 그려내고 있었다. 일본 유학생 간첩단 사건을 소재로 한 조해진의 ‘사물과의 작별’은 뒤늦게 모습을 드러내는 이 세계의 ‘어떤’ 진실 혹은 죄의식의 윤리를 깊은 정서적 울림과 함께 전달하는 소설이다. 권여선의 ‘이모’ 또한 다른 각도에서 악의와 적대의 그로테스크한 순환, 그 속에서 뒤늦게 도착한 죄의식의 문제를 날카롭게 포착한다. 본심 위원들은 이 두 소설의 미덕에 깊이 수긍하면서도 간단치 않은 논의 끝에 결국 한강의 ‘눈 한송이가 녹는 동안’을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눈 한송이가 녹는 동안’은 고통과 죄의식에 관한 소설이다. 고통은 죄의식을 불러일으키고 죄의식은 마음의 평화를 교란한다. 이 끊임없는 고통으로 인해 구원은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지만, 작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능할 수 있을지도 모를 어떤 구원의 순간을 모색한다. 현실의 시간을 정지시키는, ‘눈 한송이가 녹는 동안’으로 상징되는 비현실적인 찰나의 시간 속에서 어쩌면 구원은 가까스로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것. 개인의 존재 조건과 사회 현실, 그리고 고통과 구원이라는 보편적인 주제의식이 아름답고도 정교하게 맞물려 있는 이 소설의 성취에 본심위원들은 흔쾌히 설득되었다. 작가에게 축하를 건넨다.

심사위원=서영채·성민엽·심진경·임철우·최윤(대표집필 심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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