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과 멋의 만남, 전통주 ‘술상 차림’

중앙선데이

입력 2015.09.20 0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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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5호 8 면

1 봄이 제철인 두릅과 죽순으로 만든 냉채요리와 진달래로 담근 두견주.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오곡백과가 풍성한 가을과 이만큼 잘 어울리는 속담도 없을 것이다.


추수에 즈음해 집집마다 푸짐하게 음식을 장만해 잘 먹고 잘 마시고 잘 노는 명절 추석을 앞두고 ‘맛있는’ 기획전이 하나 열린다.


재단법인 아름지기(이사장 신연균)가 25일부터 10월 30일까지 서울 통의동 사옥에서 전통주와 안주를 주제로 선보이는 ‘맑은 술·안주 하나’전이다. 아름지기는 2004년부터 전통 의식주 문화를 현대적 관점에서 재해석해 매년 주제를 바꿔가며 대중에 소개해왔다.


올해는 ‘우리 그릇과 상차림’ ‘도시락’ ‘끽다락(차와 하나되는 즐거움)’에 이어 식(食)문화와 관련한 네 번째 전시다.


예부터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는 술이 빠질 수 없었으니, 술과 안주를 통해 우리의 전통문화를 현재의 실생활에 맞도록 제안한다는 취지다.

2 연계 속을 쇠고기·버섯 등으로 채우고 갈비 양념으로 찐 연계찜과 과하주. 3 도미 배를 갈라 쇠고기·숙주 등으로 속을 채운 도미찜과 제주 허벅주.

술은 음식 문화 중에서도 가장 역사가 오래됐다. 실생활과도 밀접한 만국 공통의 문화다. 무엇보다 서민의 희로애락과 같이 해온 ‘벗’과 같은 존재다.


특히 선조들은 세계 어디에서도 유례를 찾을 수 없을 만큼 독특한 가양주(家釀酒·집에서 만든 술) 문화를 갖고 있었다. 주식인 쌀을 주재료로 집집마다 다른 기법을 사용해 술을 빚어왔는데, 산과 들에서 나는 모든 식재료가 함께 쓰였다. 지천에 핀 꽃으로도 술을 담갔으니 우리 산천에 피는 꽃의 종류만 헤아려 봐도 가양주 수는 수천 수만 가지에 이른다. 이를 또 때에 따라, 계절에 따라 빚었으니 우리 술 문화는 자연의 품만큼이나 깊고 넓다고 할 수 있다.


아름지기 문화기획팀에서 1년간 전시를 기획해온 김혜진씨는 “일제 강점기 때 가양주 문화의 맥이 끊긴 후 전통주가 사라졌다. 이제는 축하주·만찬주라면 와인이나 샴페인부터 떠올리게 됐다”며 “이것을 대신할 만한 우리 술의 근본을 찾아야 할 때라고 생각해 이번 전시를 기획했다”고 했다.


아름지기가 이번 전시를 통해 제안하는 것은 전통과 현대가 조화를 이루는 ‘술상차림’이다. 문화기획팀이 술을 예로 배웠던 향음주례(鄕飮酒禮)와 가양주 문화를 바탕으로 전국의 명주와 숨어 있는 술 10가지를 찾아냈다. 또 전통 음식을 연구하는 온지음 맛공방에서는 여기 어울리는 전통 음식을 만들었다. 그리고 현대공예·디자인 작가 30여 명과 함께 술병과 술잔, 그릇 등을 제작했다. 김씨는 “전통주, 전통음식이라고 하면 무겁게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에 갖고 싶을 만큼 예쁘고 세련된 현대공예품으로 그릇과 잔을 만들어 일상의 밥상에서도 자연스럽게 ‘즐길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고 설명했다.

4 남녀가 결혼할 때 함께 마시면 좋은 합환주로 제안한 백화주. 철마다 피는 100여 가지 꽃으로 빚었다.

5 서울시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삼해주를 만들기 위해 준비한 누룩. 6 봄을 대표하는 꽃 진달래(두견화)로 두견주를 만드는 모습.

술과 안주의 즐거운 만남


때를 즐기는 술


도소주: 새해 첫날 마시는 술. 도(屠)는 ‘죽이다’, ‘잡다’를 의미하며 소(蘇)는 ‘사악한 기운’을 뜻한다. 즉 도소주는 ‘사악한 기운을 몰아내는 술’이다. 여러 가지 약재를 베주머니에 넣어 섣달 그믐날 밤 마을 우물 밑바닥에 걸어두었다가 새해 첫날 꺼내어 미리 만들어둔 청주에 넣어 끓인 다음 차게 식혀 만든 뒤, 온 가족이 모여 동쪽을 향해 앉아서 마셨다. 청주를 끓이는 과정에서 알코올 도수가 낮아지기 때문에 어린 아이도 마실 수 있었다. 특히 연장자보다 어린 아이를 먼저 마시게 한 것은 전염병에 약한 아이들을 위한 배려다. 약재를 우물에 담가두는 것은 자기 가족 뿐 아니라 마을 사람들 모두 질병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도소주에 어울리는 안주로는 겨울철 전통 안주로 애용되던 족편을 준비했다.


백화주: 철마다 피는 100여 가지 꽃으로 빚은 술. 향기가 뛰어나 현대적인 합환주(合歡酒·결혼할 때 남녀가 함께 잔을 나누어 마시는 술)로 적격이다. 이번 전시를 위해 박록담 한국가양주연구소장의 제자인 정상숙씨가 1년 여 동안 채취한 100여 가지 꽃으로 직접 술을 빚었다. 꽃 향 가득한 백화주에는 자손의 번영을 상징하는 대추와 밤으로 만든 대추단자 안주를 제안했다.


교동법주: 관례(冠禮)는 관혼상제의 4례 중 하나인 성년례를 의미한다. 관례주는 아이가 어른이 되어 처음 접하는 술이다. 매년 5월 셋째 주 월요일 ‘성년의 날’에 어울리는 현대적인 관례주로 경북 경주시 교동 최 부자 댁에서 대대로 빚어온 교동법주를 꼽았다. 역사적 뿌리가 깊은 명주로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술이다. 화려한 금빛과 부드럽고 깊은맛에서 느껴지는 단정한 품격이 성인이 갖춰야 할 마음가짐과 어울린다. 안주로는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김말이떡, 밤과 포를 제안했다.

7 ‘성년의 날’에 마시기 좋은 관례주로 적합한 교동법주와 김말이떡, 밤, 포.

8 부재료로 오미자를 사용한 발포주 오희는 보통 막걸리와는 달리 불그스레한 빛을 띤다.

9 한 번 마시면 멈출 수 없다는 ‘앉은뱅이 술’ 한산소곡주. 쌀과 9~10월에 딴 들국화로 만든다.

계절을 즐기는 술 봄(두견주): 충남 당진 지역의 술로 봄을 대표하는 꽃 진달래(두견화)가 주재료다. 두견주는 본래 충남 당진 박씨 가문의 술로 현재는 ‘면천두견주 보존회’가 만들고 있다. 안주로는 봄 제철 요리인 두릅죽순채를 준비했다. 온지음 맛공방의 박성배 조리장은 “산미가 높은 두견주에는 해물이 어울려서 새우와 채소, 그리고 쇠고기를 넣고 끓인 육즙을 식혀 만든 걸쭉한 소스를 뿌렸다”고 했다.


여름(과하주): 냉장고가 없던 시절에는 미리 빚어놓은 술도 여름을 넘기기가 쉽지 않았다. 이런 환경을 극복하기 위해 조선 후기에는 ‘혼양주’ 양조기법이 발달했다. 발효시기에 증류주인 소주를 부어 도수를 높임으로써 여름철에도 변질되지 않도록 한 것이다. 경상북도 시도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과하주는 혼양주 특유의 감칠맛을 자랑하는 술로 특별한 청량감이 특징. 안주로는 여름철 보양식 재료인 연계를 사용했다. 박 조리장은 “닭의 모양을 그대로 유지한 채 뼈를 모두 제거하고 쇠고기·표고버섯·두부·감자·은행 등으로 속을 채워 갈비양념을 끼얹어가며 쪘다”고 설명했다.


가을(소곡주): 충청남도 한산 지방에서 백제 시대부터 전해오는 명주. 며느리가 술맛을 보느라 젓가락으로 찍어 먹다가 저도 모르게 취해 일어서지 못하게 됐다고 해서 ‘앉은뱅이 술’로도 불린다. 9~10월에 피는 들국화를 넣어 그윽한 향과 황금색 빛깔을 띤다. 이번 전시에 사용하는 술은 충청남도 시도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충남 한산면 호암리 김영신 명인의 며느리인 유희열씨가 만든 것이다. 달지 않고 깔끔한 술과 어울리는 안주로는 송이섭산적을 제안했다. 쇠고기를 잘게 다진 후 두부·잣가루와 함께 반대기를 지으면 육질이 부드러워진다. 고서에 나온 방법대로 숯불 위에 한지를 올리고 그 위에서 구우면 육즙이 빠져나가지 않아 풍미가 좋아진다. 가을 송이를 구워 함께 곁들였다.


겨울(허벅주): 비교적 도수가 높은 증류주는 몸을 따뜻하게 해 겨울 술로 적격이다. 제주 허벅주는 불룩한 배 모양의 ‘허벅’이라는 제주 전통 옹기에서 유래했다. 이번에 내놓은 허벅주는 제주 향토기업인 ‘한라산’에서 만든 현대식 증류주다. 안주로는 예부터 귀한 손님에게만 대접했다는 도미찜을 준비했다. 이틀간 숙성한 도미의 뼈를 모두 제거한 후 속에 미나리·콩나물·표고버섯·쇠고기 채를 채우고 국 간장으로 간을 했다.

10 새해 첫날 먹는다는 도소주. 여러 가지 약재를 베주머니에 넣어 섣달 그믐날 밤 우물 밑바닥에 걸어두었다가 그 물을 길어 청주와 함께 끓여 만든다.

b>11 많이 마셔도 머리가 아프지 않은 막걸리로 유명한 전라도 해남의 두륜탁주.

12, 13 전통주와 어울리는 안주로 온지음 맛 공방에서 제안한 대추단자와 민어포다식.

알려지지 않은 술 두륜탁주: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는 심마니들은 여러 지역의 술을 마실 기회가 많다. 두륜탁주는 심마니 부부가 전라도 해남에 바위손을 캐러 갔다가 많이 마셔도 머리가 아프지 않아 반했다는 막걸리다. 더덕·야생당귀·봉삼 등 약초와 함께 숙성시킨다. 전라도 두륜산에서 이름을 따왔다. 현재 전남 해남군 삼산면에 있는 삼산주조장에서 빚고 있다. 이증자(76) 할머니가 시아버지에게 막걸리 기술을 전수받아 운영하는 곳이다.


발포주 오희: 막걸리보다 투명하고 탄산 맛이 강한 발포주. 주재료인 쌀 이외에 오미자를 부재료로 써서 불그스레한 빛이 감돈다. 오미자 막걸리를 1차 발효 후 다시 2차 발효시키면 오희가 완성된다. 알코올 도수는 8.5% 정도다.


삼해약주: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삼해주는 고려시대부터 전해 내려온 궁중 술. 쌀과 누룩을 원료로 해마다 정월 첫 해(亥)일마다 세 번에 걸쳐 빚는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조선 후기부터 한양의 술로 불리던 서울의 전통주이지만 현재는 조선시대 안동 김씨 가문에서 빚어지던 삼해주 기능 보유자인 권희자씨에 의해 전승되고 있다.

14 황갑순 교수와 서울대 미대 공예과 연구팀이 제작한 백자 술병. 15, 16 현대적인 실용성과 세련미를 위해 백자와 나무·유리·금속·은 등을 이용해 만든 공예품.


술과 문화가 익어가는 풍경 - 공예와 디자인 술은 풍류를, 그리고 희로애락을 담는 매개체다. 조상들은 술 마시는 예를 중시해서 하나의 문화로 발전시켰다. 때문에 술 자체 뿐 아니라 술을 담는 병과 잔, 안주를 담아내는 그릇과 상차림 등이 한데 어우러져 맛과 멋을 빚어내는 일이 중요하다. 이번 전시는 우리 전통주와 전통 음식을 구현하고 이를 현대에 맞는 ‘풍경’과 어우러지도록 제안했다.


우선 눈에 들어오는 풍경은 사진작가 구본창이 2004년부터 국내외 16개 박물관과 개인 소장품을 찾아 촬영한 조선백자 사진이다. 또 황갑순 교수를 중심으로 한 서울대 미대 공예과 연구팀은 10여 가지 술과 이에 어울리는 안주를 담는 백자 술병과 그릇을 만들었다. 1년간 아름지기 팀과 함께 안주의 종류와 술에 관해 수시로 자료를 공유한 덕분에 술과 안주에 딱 어울리는 상차림이 완성됐다.

17 성정기 디자이너가 제작한 청주 공용병. 술의 도수에 따라 병 표면의 각과 투명도를 달리했다 18 현지연 작가의 술잔과 쟁반 19 강웅기 작가의 술잔과 주전자


26명의 공예작가들은 은·스테인리스 스틸·가죽·대리석 등 색다른 소재를 이용해 다양한 모양의 잔·그릇·병·도구를 만들었다. 손으로 두드려 만든 은잔, 앙증맞은 주전자, 옻칠 코팅을 한 가죽 매트, 퍼즐을 맞추듯 형태를 자유롭게 조합할 수 있는 반찬 그릇이 대표적이다. ‘전통주’ 하면 흔히 나무 소반에 사기 그릇만 떠올리게 되는데, 현대적인 식탁에 바로 올려도 멋지게 어울리도록 했다.


이와함께 성정기 디자이너는 청주 공용(共用)병을 디자인했다. 청주를 대표하는 병으로 만들어 생산과 유통에도 도움이 되도록 한다는 취지다. ‘다감다정(多感多情)’이라는 컨셉트로 전통주의 주재료로 쓰이는 쌀에서 영감을 얻었다. 볍씨를 벗겨 낸 쌀의 형태를 본 딴 것인데 부드러운 술은 볍씨를 많이 도정한 매끈한 모양을, 센 술은 거칠게 도정한 느낌의 각진 병을 제안했다. 성씨는 “기존의 화려한 도자기 스타일의 전통주 병은 술보다 겉포장에 치중한 듯 보인다. 실제로도 그런 병을 만들기 위해 술값이 비싸지는 경우가 많다”며 “포장은 내용을 보호하고 내용물에 더 집중할 수 있도록 디자인하는 것이 좋다”고 설명했다.


이번 전시에는 상설전 외에도 음식전문가 허시명(막걸리학교 교장), 황교익(음식칼럼니스트)의 강연과 온지음 맛공방이 진행하는 쿠킹 클래스가 준비돼 있다. 상설전시장에서는 하루에 두 번 선착순으로 전시된 술과 음식을 맛보는 시간도 준비했다. 문의 02-741-8373, 8376 ●


글 서정민 기자 meantree@joongang.co.kr, 사진 (재)아름지기 ⓒ이종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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