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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 요약 ⑩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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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5호 1 면

?1931년 9월 18일 밤 10시20분 무렵, 심양(瀋陽·옛 봉천) 북쪽 7.5㎞ 유조호(柳條湖) 부근 남만(南滿) 철도의 한 선로가 폭파되었다. 관동군사령부 조례 제3조에 따르면 남만철도가 끊기면 관동군이 출동할 수 있었다. 관동군은 즉각 ‘장학량 군대의 소행’이라면서 북대영(北大營)을 공격했다. 9·18사변, 즉 만주사변(滿洲事變)의 시작이었다. 선로 폭파 역시 장작림 폭살처럼 관동군의 자작극이었다. ? 13세기의 승려 일련(日蓮:1222~1282:니치렌)은 정법(正法), 상법(像法), 말법(末法)이란 불교의 종말론적 세계관을 갖고 있었는데, 일련종은 19세기 다나카 지카구(田中知學:1861~1939)가 일본국체학(日本國體學)을 주창하면서 일왕을 중심으로 하는 국가 내셔널리즘으로 변질시켰다. 다나카 지카구의 강연을 듣고 국주회에 입회한 이시하라는 제1차 세계대전 후 전 세계가 소비에트연방, 미주, 유럽, 동아시아라는 4개 국가연합으로 나뉘었다고 분석했다. 4개 연합 사이에 일종의 준결승이 벌어져 소비에트와 유럽이 탈락하고 일본과 미국이 결승전을 벌인다는 것이 최종전쟁론이었다. 최종전의 결과 일본 아니면 미국이 세계를 지배한다는 것이었다. 이시하라는 ‘세계전쟁의 준비가 덜 되었다’면서 1937년 중국 본토 침략을 반대하고, 1944년에는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총리의 암살에도 관여해 전범 재판에서 제외되지만 만주사변 이후 군국주의자들의 행보는 그의 최종전쟁론을 실천한 셈이었다.? 이시하라는 일본의 모든 전략과 국력은 최종전쟁에 맞춰져야 한다면서 이를 위해 만주가 꼭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시하라는 “재만(在滿) 3천만 민중(民衆)의 공동의 적인 군벌과 관료를 타도하는 것이 우리 일본 국민에게 주어진 사명”이란 궤변으로 만주침략을 정당화했지만 만주는 최종전쟁을 위해 꼭 필요한 자원이었기 때문이다. 이시하라는 “일본은 북쪽 러시아의 침략에 대항하고 남쪽 미·영의 해군력에 대항해야 한다”면서 일본이 러시아와 미·영의 침략 위협을 받는 국가인 것처럼 가정했다.? 1929년 10월 24일 뉴욕 월가 뉴욕주식거래소의 주가가 대폭락하면서 시작된 대공황의 여파는 일본도 비켜갈 수 없었다. 1930년대 초 실업자는 300만 명에 이르러 노동쟁의가 빈발하고 농촌 생활은 극도의 곤궁에 빠진 상황에서 금융자본가들은 거대한 부를 거머쥐었다. 청년장교들이 정당정치인과 재벌 등을 타도하고 일왕과 민중 중심의 새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단순한 권력욕 때문만은 아니었다. 쿠데타 세력들은 국내 쿠데타를 먼저 일으키고 만주를 침략하자는 내선외후파(內先外後派)와 만주를 먼저 침략한 후 국내 쿠데타를 일으키자는 외선내후파(外先內後派)로 나뉘었다. 하지만 모두 만주 장악의 필요성에 동감한 것은 비단 이시하라의 세계 최종전쟁론 때문만이 아니라 일본 자본주의의 모순을 배출하는 출구로도 만주는 절대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이다. ? 만주사변이 기존 사건과 달랐던 것은 일본 언론의 지지를 받았다는 점에 있다. 만주사변에 대한 일본 언론의 태도는 대국민 선동에 불과해 침략자들은 영웅으로 변모했다. 언론의 이런 태도에 발맞춰 사회 각 분야가 일제히 만주사변을 지지하고 나섰다. 관동군은 드디어 중국 본토와 만주를 가르는 산해관(山海關)을 점령하고 욱일승천기를 꽂았다. 그리고 청조의 마지막 황제 부의(溥儀)를 이용해 위성괴뢰국 만주국을 수립하려 했다. 일본이 만주를 직접 차지하면 부전조약 위반이므로 중국인들 스스로 만주에 독립국가를 세운 것이라고 강변하려는 책계였다. 만주사변 직후인 1931년 10월 관동군의 고급참모 이타가키 세이지로와 이시하라 간지가 가와시마의 애인인 다나카 유키치 중좌에게 만주에 쏠린 세계의 이목을 상해로 돌릴 수 있는 사건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이렇게 만들어지는 사건이 상해사변이었다. 상해는 만주와 달리 각국 열강들의 조계지가 있는 지역이므로 상해에서 사건이 발생하면 서구 열강의 이목이 집중될 것으로 예상한 것이었다. ? 1932년 1월 18일 밤 일련종(日蓮宗) 승려 두 명이 신도 셋과 함께 ‘남무묘법연화경’을 외우면서 상해의 마옥산로(馬玉山路) 부근을 걷고 있을 때 반일(反日) 중국인들이 공격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물론 다나카와 가와시마가 돈으로 매수해 벌인 자작극이었다. 이 사건으로 상해 북사천로(北四川路) 및 홍강(虹江) 방면에 살고 있던 약 2만7000여 명의 일본인과 중국인 사이에 충돌이 발생했다. 중국 민간인 사망자만 6000여 명에 달했다. 관동군의 예상대로 영국,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이 강하게 정전을 요구하고 나섰다. 일본은 상해에서 전투를 계속하는 한편 1932년 3월 1일 부의(溥儀)를 집정으로 삼는 만주국을 전격적으로 건국했다. 그리고 이틀 후 전투를 중지하고 3월 24일부터 정전협상에 나섰다. 4월 29일에는 홍구(虹口)공원에서 상해 점령 및 일왕 히로히토의 생일을 축하하는 천장절(天長節) 행사를 개최했다. 상해를 점령해 기세가 드높던 이 행사장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의 한인애국단원 윤봉길이 폭탄을 던졌다. 상해파견군 사령관 시라카와 대장과 상해 일본거류민단 행정위원장 가와바타(河端貞次)가 폭살되고 노무라(野村吉三)·우에다(植田謙吉) 두 중장과 무라이(村井倉松) 총영사, 시게미쓰(重光葵) 공사 등이 중상을 입었다. 1932년 2월 18일 장개석의 국민정부로부터 분리 독립을 선언했고, 3월 1일에는 만주국(滿洲國) 건국 선언을 했다. 동북4성의 광대한 영토와 3400만여 명의 인구를 가진 만주국은 이렇게 역사에 등장했다.? 일제의 만주 장악은 큰 충격이었다. 가장 곤란해진 사람들은 독립운동가들이었다. 일제가 만주 전역을 장악하면서 독립운동 근거지가 사라졌다. 독립운동가들은 항일유격대에 가담하거나 중국 대륙으로 퇴각하거나 만주국의 치안숙정 공작에 따라 전향해야 했다. 만주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갖고 있는 독립운동 세력은 일제와 양립할 수 없었고 만주사변 이후 거의 궤멸되었다.? 일제의 위성국(衛星國), 혹은 괴뢰국이었던 만주국의 영토는 130만㎢로 한반도보다 6배나 넓었지만 인구는 3950만 명에 불과했다. 민족별로는 한족(漢族)이 3470만 명이고 만주족이 180만 명, 한인(韓人)이 130만 명이었다. 몽골인이 102만 명이고 일본인은 65만 명에 불과했다. 130만의 한인은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었다. 그래서 한인 사회는 한인들이 집중적으로 거주하는 간도(間島)만이라도 건질 수 없을까를 고민했다. 『동아일보』 1933년 11월 1일자는 간도 총영사관의 발표에 따라서 1933년 9월 말 현재 간도 총인구는 57만4000여 명인데 그중 한인은 40만3000명에 이르는 반면 일본인은 2400명으로 0.5%에 불과하다고 보도했다. 만주국은 오족협화(五族協和)를 내세워 일본인, 한족, 만주족, 한인, 몽골인의 공동번영을 추구한다고 표방했지만 주도권은 일본인에게 있어야 했다. 그러나 앞서 말한 대로 일본인의 숫자가 극히 적었다. 그래서 관동군은 1936년 5월 20년간 100만 호, 즉 500만 명의 일본인을 만주로 이주시키겠다는 ‘만주 농업이민 100만 호 이주(移住)계획안’을 만들었다. 1936년 3월 출범한 히로다(廣田弘毅) 내각은 이를 ‘7대 국책사업’의 하나로 채택하고 20억원의 예산까지 배정했다. 그럼에도 일본인의 만주 입식(入植)은 저조해서 식민정책 자체가 원활하게 진행되지 못했다. 반면 한인들은 만주로 몰려들고 있었다. 일제의 경제 수탈, 대공황, 농촌의 과잉인구 문제 등으로 빈사상태에 빠진 식민지 한인들에게 만주는 일종의 식민지 모순의 배출구이자 엘도라도로 여겨졌다. 중국인 지주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보호해주던 동북 군벌이 쫓겨 가고 만주국이 들어서자 땅을 헐값에라도 팔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식민지 한인들에게 중국인들이 남기고 간 토지가 새 삶의 터전이 될 것 같지만 이 또한 천만의 말씀이었다. 1936년 관동군의 지시에 따라 1937년 만주국 이민사무처리위원회(移民事務處理委員會)에서 한인들의 만주 이주를 연 1만 호(戶)로 제한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인들이 개척할 수 있는 지역도 간도성(間島省)과 동변도(東邊道)의 23개 현으로 제한했다. 일본인 이주민들에게 좋은 농경지를 먼저 보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식민지 치하의 한국이 그랬던 것처럼 일제 치하의 만주국도 한인들에게 엘도라도가 될 수 없었다.


- 이덕일,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제289호 2012년 9월 23일, 제290호 2012년 9월 30일, 제291호 2012년 10월 7일, 제292호 2012년 10월 14일, 제93호 2012년 10월 21일, 제294호 2012년 10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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