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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 드라이버’(1976)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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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4호 24면

1 영화 포스터.

[영화 속에서]?상처 입은 영혼이 즐비한 도시?뉴욕의 과거 모습은 우리의 현재

트래비스는 불면증에 시달리는 뉴욕의 택시 운전사다. 그는 밤새 택시를 몰면서 도시의 어두운 이면을 관조하는가하면, ‘인간 쓰레기’들을 죄다 쓸어버려야 한다며 과잉된 분노를 드러내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여자와의 첫 데이트 때 평소 즐겨 찾는 포르노 극장에 데려 갈 정도로 무감하다. 특별한 존재가 되어 ‘달리’ 살고 싶다는 망상에 시달리던 트래비스는 12살의 어린 창녀 아이리스를 알게 되면서 총을 사고 몸을 단련하기 시작한다. 결전의 날, 머리카락을 밀고 야전 상의를 갖춰 입은 트래비스는 아이리스 앞으로 편지와 돈을 남긴 채 차기 대통령 후보를 저격하러 유세장으로 향하는데….

영화 역사상 가장 인상적인 캐릭터 중 하나인 트래비스는 월남전에 참전했던 인물이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뉴욕의 심야 택시 운전사가 되어 온갖 인종들을 도시의 어둠 속으로 이동시킨다. 그는 도시의 인간들을 ‘쓰레기’라고 부르며 언젠가는 깨끗하게 청소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불면증에 시달리면서 포르노 극장에서 시간을 때우는 트래비스는 폭발 직전의 남자다.

‘택시 드라이버’는 사회적인 메타포를 담은 작품으로 해석돼 왔다. 20대 초반에 전쟁을 통해 상처를 경험한 인물이 사회에 편입되지 못하고, 도시에서 월남전 영웅 흉내를 내며 자신을 정당화한다는 것이다.

분명 트래비스는 병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전쟁으로 상처 입은 영혼이라는 해석은 트래비스의 행위를 합리화시켜주기는 해도 그가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는 이유를 설명해 주지는 못한다.

특별한 존재가 되고 싶은 도시의 카우보이영화가 힘주어 다루는 것은 트래비스의 갈망이다. 로버트 드 니로가 연기하는 26살의 택시 운전사는 동료 운전사들에게 쉽게 섞여 들어가지 못한다. 사람들과 대화할 때마다 전쟁에서 ‘훈장’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내세우며 타인과 자신을 구별 짓는다. 그는 특별한 존재가 되고 싶은 갈망에 시달리는 도시의 카우보이다.

트래비스는 베시라는 여성에게 매혹된다. 베시는 차기 대통령 후보 팔렌타인의 선거캠프에서 일하는 아름다운 여성이다. 트래비스는 첫 데이트 때 자신이 즐겨 찾는 포르노 극장에 그녀를 데리고 가면서 단박에 퇴짜를 맞는다. 이후 트래비스의 관심은 12살짜리 소녀 아이리스에게로 옮겨간다. 거리의 여자인 아이리스는 포주 스포트 밑에서 일한다. 아이리스는 집으로 돌아가라고 권유하는 트래비스의 말에 당당하게 ‘페미니즘’을 이야기하고 언젠가 ‘버몬트’로 갈 거라고 이야기한다. 버몬트는 한국에서도 한때 유행했던 스콧&헬렌 니어링 부부의 공동체를 가리킨다.

하지만 트래비스는 자기가 돌봐 주겠다며 자신의 말만 일방적으로 내뱉을 뿐이다. 트래비스의 관심사는 베시에서 아이리스로, 백인 중산층 여성에서 10대 매춘부로 바뀌지만, 거기에는 일관되게 ‘순수’에의 갈망이 흐르고 있다. 베시가 이상화된 여성상을 대변한다면, 아이리스는 이제 막 타락의 길에 들어선 어린 여동생의 순수성을 상징한다.

트래비스는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총을 사고 몸을 단련하기 시작한다. 결전의 날, 인디언 모히칸 족처럼 머리를 깎은 트래비스가 처음으로 찾아간 곳은 팔렌타인의 유세장이다. 트래비스는 경호원들 눈에 발각되자 황급히 물러난다. 계획에 실패한 트래비스는 바로 포주 스포트를 찾아간다. 스포트의 기지에서 세 사람을 사살한 트래비스는 부상을 당하지만, 뜻대로 죽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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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모히칸족처럼 머리카락을 밀고 포즈를 취한 드 니로. [사진 마티]

2 연기 지도 중인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왼쪽)과 트래비스 역의 로버트 드 니로.

사회의 이상한 열광 뒤의 씁쓸한 현실‘택시 드라이버’가 여기에서 끝이 났다면 과대망상증 환자의 위험천만한 행태 정도로 마무리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폴 슈레이더가 각본을 쓰고 마틴 스코세이지가 연출한 영화는, 트래비스의 망상이 성공하는 것으로 끝나는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트래비스는 범죄 집단을 척결하고 어린 소녀를 구출한 영웅이 되어 신문의 헤드라인을 장식한다. 그의 집 벽에는 아이리스의 부모에게서 온 감사 편지도 붙어 있다. 다시 일을 시작한 트래비스의 택시에 탄 베시는 먼저 트래비스에게 호감을 보인다.

3 총을 사서 사격 연습을 하는 트래비스.

스코세이지의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1970년대 미국 사회의 이상한 열광과 그 뒤에 있는 씁쓸한 현실이다. 70년대 미국 사회의 관심을 끈 인물에는 데이비드 핀처에 의해 영화로 만들어진 연쇄살인마 ‘조디악’이 있었다. 그는 매스컴을 사로잡으며 열광과 분노를 일으켰다. 이 같은 현상이 일어난 것은 당시 미국이 상처 입은 영혼이 즐비한 사회였기 때문이다.

트래비스는 특별한 개인이 아니라 갈망에 사로잡힌 평범한 개인이다. 그가 지닌 분노는 도시에서 살아가는 한국인들이 매일 아침 뉴스를 보며 반복하는 감정이기도 하다. 씁쓸한 마음으로 영화를 다시 보면서 이 도시의 현실을 돌아보게 된다. 분노와 열광이라는 뜨거움보다 더 멀리 바라볼 수 있는 차가움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자신을 구별 짓기 위해 벌이는 말과 행동의 잔치가 어떤 파국을 불러일으키는지, 이 한 편의 영화가 냉정히 담아내고 있다. 지금의 서울은 누구나 트래비스가 될 수 있는 또 하나의 뉴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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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용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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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밖으로]?어딘가 쓰레기통이 존재하는 한?언제든 우린 쓰레기가 될 수 있다

“쓰레기는 밤에 쏟아져 나온다. 매춘부, 깡패, 남창, 호모, 게이 마약중독자 등등. 인간 말종들이다. 언젠가 저런 쓰레기를 씻어내 버릴 비가 쏟아질 것이다.”주인공 트래비스가 심야 택시를 몰면서 냉소적으로 내뱉는 말이다. 세상은 쓰레기로 넘쳐나고 일시에 쓰레기를 청소하는 방법이 가능하다고 믿는, 인정 욕구에 목말라 하며 미숙한 자아를 지닌, 외로우면서 타인과 제대로 소통하지 못하는, 무기력하지만 일반적인 쓰레기와는 다르다고 자신하는 사람. 주인공 트래비스가 이러하다. 그렇다면 당신과 나는 그와 얼마나 떨어져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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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의 조디 포스터는 12세의 창녀 아이리스 역으로 출연해 아카데미여우조연상 후보에 올랐다.

우리 곁에 만연한 ‘소통 불능’ 인물들택시를 몰던 트래비스는 쓰레기 신세에서 완전히 벗어나려는 투쟁을 전개하기로 마음먹는다. 작전은 두 가지다. 첫 번째, 쓰레기가 아닌 사람, 혹은 경쟁에서 앞선 사람을 제거하는 방법이다. 한 마디로 쓰레기만 남겨두는 전략이다. 모두가 쓰레기이니 자신이 쓰레기라는 자괴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 두 번째, 쓰레기통 안의 다른 쓰레기들을 모조리 제거하는 방법이다. 첫 번째 작전을 위해 그는 대통령 후보를 암살하려고 하지만, 너무 싱겁게 미수에 그치고 만다. 서둘러 그는 두 번째 작전을 실천에 옮긴다. 택시에 태웠던 12살 매춘부를 떠올린다. 소녀를 구하자. 무방비한 거리의 포주들은 맥없이 총격을 당하고, 어린 매춘부가 울부짖는 와중에 경찰들이 현장에 들이닥친다. 화면은 바뀌고 트래비스의 운명은 잠시 변한 듯 보인다. 트래비스는 12살 소녀를 악의 구렁텅이에서 구한 영웅이 되어 있었다.

트래비스는 쓰레기통에서 벗어나는 데 성공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아니 그럴 수 없다. 사람들이 자신을 영웅으로 기억할 때까지만 그는 쓰레기라는 자각을 은폐할 수 있을 것이다. 기억은 금방 희미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다시 포르노 극장에 앉아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불현듯 ‘내가 쓰레기는 아닐까? 내가 왜 이 쓰레기통에 있게 된 걸까?’하고 자각하게 될 것이다. 그러고는 다시 앞서 사용했던 작전을 시도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어떤 방법도 그를 쓰레기통에서 꺼내주지는 못할 것이다.

심리적 기만으론 아무 것도 못 바꿔『문화와 가치』에서 비트겐슈타인은 말했다. “누구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자기는 쓰레기라고 진실로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만일 내가 그런 말을 한다면, 나는 어떤 뜻에서 참일 수는 있지만, 이 진리가 나 자신 속에 스며들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나는 미쳐버리게 되거나, 아니면 나 자신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이 말하고자 했던 핵심은 분명하다. 진짜로 자신이 쓰레기라는 사실을 알았다면(그것은 깊고 처절한 성찰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리라), 누구든지 자신의 삶을 바꾸려고 애쓰게 되리라는 것이다. 아들러 같은 심리적 기만이나 처세술 같은 자기 최면 등등의 정신 승리만으로는 쓰레기 같은 삶이 구원받을 수 없다. 무엇보다 자신의 삶이 쓰레기와 같다는 투철한 인식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 자각은 굉장히 당혹스럽고 무겁고 어렵다. 이어서 왜 자신이 쓰레기가 되었는지 그 원인에 직면해야만 한다.

자본주의는 구조적으로 낙오자를 만든다. 낙오에 대한 불안과 공포를 각인시킬 때 자본은 인간을 더 효율적으로 통제할 수 있게 된다. 1등과 꼴등, 정규직과 비정규직, 아르바이트와 실업자 등등. 자본주의의 낙오자는 개인이 못나서가 아니라, 구조적으로 생산된 것이다. 그가 아니더라도 다른 누군가가 경쟁에서 낙오될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쓰레기통이 존재하는 한 우리는 언제든 쓰레기가 될 수 있다. 그러니 쓰레기가 구원받는 길은 한 가지밖에 없다. 쓰레기통을 넘어뜨려야 한다. 쓰레기통이 넘어져 무력화될 때 더 이상 쓰레기도 존재할 필요가 없어진다. 하지만 정말이지 그 쓰레기통은 얼마나 무겁고 굳건한가!

그렇다 하더라도, 무너지기는커녕 조금도 움직일 기미조차 없는 거대한 쓰레기통일지라도, 끝끝내 우리는 그것을 밀쳐내야 한다. 미치지 않으려면, 나 자신을 바꾸기 위해서는, 그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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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주대중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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