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그 길 속 그 이야기 <65> 정선 운탄고도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04면

석탄 트럭이 달렸던 길을 이제는 사람이 걷는다. 30년 넘게 내팽개쳤던 길을 사람에게 되돌리겠다고 나선 주인공이 함승희 하이원리조트 사장이다. 수시로 운탄고도를 걷는다는 그는, 생각보다 걸음이 쟀다.

석탄트럭 오간 해발 1000m 산길, 야생화가 물려받았네

강원도 깊은 산 속에, 차라리 기가 막히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길이 틀어박혀 있다. 삼척부터 태백, 정선을 거쳐 영월까지 이르는 이 장대한 산중도로는 반세기 가까운 세월 동안 대한민국의 산업화를 이끈 숨은 동력이었다. 탄광의 석탄을 기차역으로 옮기기 위해 만들었다 하여 ‘운탄(運炭)’이라는 이름이 붙었던 길. 그러나 석탄의 세기가 지나자 이내 내팽개쳤던 길. 여러 이름이 뒤섞여 불리다 최근에야 ‘운탄고도’로 이름이 확정된 이 사연 많은 길을 걷고 왔다. 세 번째 걸음이었지만, 이번에는 동행이 있어 달랐다. 운탄고도를 제주올레에 버금가는 트레일로 조성하겠다고 밝힌 하이원리조트 함승희(64) 사장이다.

석탄의 기억

화절령에서 새비재 가는 길에 만난 폭포. 높이 7m는 족히 돼 보였다.

강원도 남부 지도를 보자. 이왕이면 7만5000분의 1 이상의 대축척지도가 좋겠다. 바투 붙은 등고선을 비집고 들어선 산길을 읽을 수 있어야 해서다. 먼저 백두대간을 찾아 태백산(1567m)에서 만항재(1330m)를 지나 두문동재(1268m)로 이어지는 구간을 손으로 짚어보자. 만항재에서 서쪽으로 이어지는 굽이 많은 산길이 보이실 게다. 백운산(1426m) 뒷덜미를 지난 길이 화절령(960m)을 들렀다가, 이리저리 휘청거리며 두위봉(1465m) 기슭을 넘은 뒤에 새비재(850m)까지 내려온다. 이 길이 끝나는 지점에 함백선 철도 함백역이 있다.

이 길의 이름이 운탄길이다. ‘지무시(GMC)’라고 불렸던 대형 트럭이 석탄을 가득 싣고 달린 신작로여서 운탄도로라 불렸다. 해발 1200m가 넘는 산중 탄광에서 캔 석탄을 함백역까지 운반하기 위해 1962년 조성했다. 이 험한 길을 낸 주인공의 이름은 전해지지 않는다. ‘국토건설단 2000여 명’이 남아있는 기록의 전부다. 박정희 소장이 쿠데타를 일으킨 직후, 정부는 사회에서 부랑자를 대거 잡아들여 전국 방방곡곡의 도로건설 현장에 내보냈다. 그들이 닦은 길 가운데 제일 유명한 길이 제주도의 이른바 ‘5·16 도로’다. 한라산 오른쪽 기슭에 난 1131번 지방도로 말이다. 그러니까 강원도 운탄도로와 제주도 5·16 도로는 ‘형제의 길’인 셈이다.

갱도가 무너지면서 생긴 산중 연못. 도롱뇽이 살아서 도롱이연못이라 불린다.

지도에서 운탄도로는 만항재에서 새비재까지 구간만 40㎞가 넘는다. 삼척에서부터 태백, 영월까지 이어진 지선을 다 합치면 100㎞가 넘는다고 하고, 정선 지역에만 80㎞ 길이의 운탄도로가 거미줄처럼 얽혀 있다고 한다. 그러나 누구도 운탄도로의 정확한 노선과 길이를 알지 못한다. 석탄의 세기가 끝나면서 길의 쓸모도 끝났기 때문이다. 갱도가 막히자 운탄도로도 잊혔다.

꽃과 하늘

투구꽃. 이름처럼 투구처럼 생겼다. 먹으면 안 된다.

길은 본래, 사람의 발길이 끊기면 이내 사라지게 마련이다. 길숲의 풀이 웃자라 길을 덮어 다시 숲을 이룬다. 그러나 운탄도로는 잊힌 지 30년을 헤아리지만, 옛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대형 트럭이 반세기 가까이 내달린 길이어서 아직은 풀이 길을 넘나들지 못한 것이다. 어찌 보면 흉한 꼴이다. 평균고도 1000m가 넘는 산 중턱에 구불구불하고 긴 흉터가 남아있는 셈이니 말이다.

화절령 사거리 이정표. 영월과 정선이 갈라지는 경계이기도 하다.

그 길을, 이제 사람이 걷는다. 트럭의 길을 사람의 길로 바꾼 주인공도 석탄과 인연이 각별하다. 2000년 백운산 자락에 강원랜드(지금의 하이원리조트)가 들어섰고, 리조트는 백운산 뒷자락 능선을 따라 이어진 운탄도로를 탐방로로 조성했다. 하이원리조트는 리조트 내부와 외부에 여러 코스의 탐방로를 냈고, 탐방로의 이름을 ‘하이원 하늘길’이라고 지었다. 89년 이른바 석탄 합리화 정책 이후 길의 수명을 다한 운탄도로가 세상에 다시 이름을 드러낸 데에는, 폐광지역 개발사업으로 탄생한 강원랜드가 있었다.

그러나 이 길도 애초에는 사람의 길이었다. 트럭이 달리기 전에 사람이 걸었다. 운탄도로가 지나는 화절령에 얽힌 사연이 전해온다. 이름을 다시 보자. 꽃꺾이 고개, 화절령(花折嶺)이다. 지금처럼 영월과 정선이 구분돼 있지 않던 시절, 백운산과 두위봉 자락의 총각들이 땔감을 구하러 다니던 산길이 이 고갯길이었다. 화절령 일대에는 봄에 진달래가 만발했다고 한다. 동네 총각들이 땔감 구하다 말고 누가 꽃을 더 많이 꺾나 내기를 했던 게 지금까지 이름으로 남아있다. 이달의 추천 길 선정위원회가 9월의 추천 길로 이 길을 꼽은 이유다. 봄부터 가을까지 화절령 일대에, 그러니까 운탄도로 주변에 온갖 야생화가 만발한다. 당연하다. 인적 끊긴 길은 꽃이 물려받는다.

 
운탄고도

둥근이질풀. 이맘때 운탄고도 풀숲에서 가장 흔히 보이는 야생화다. 가까이서 들여다봐야 한다.

다시 지도를 보자. 하이원리조트가 들어선 자리가 백운산 북쪽 기슭이다. 하이원리조트를 기준으로 삼으면, 운탄도로는 하이원리조트 뒷산을 에두르는 산길이다. 백운산 정상 남쪽 기슭에 난 길이어서, 리조트에서는 되레 길이 보이지 않는다. 국내 유일의 내국인 카지노가 숨겨놓은 ‘비밀의 길’인 셈이다.

하늘길에 ‘운탄고도’라는 새 이름을 붙인 주인공이 지난해 11월 취임한 함승희 하이원리조트 사장이다. 함 사장과 함께 운탄고도를 걸은 까닭이다. 그는 정선에 내려오기 전까지 리조트 뒤쪽에 이런 길이 있는지도 몰랐다고 했다. 이제 막 입에 붙은 길 이름을 바꾼 이유부터 물었다.

“하늘길이라는 이름에는 역사가 없잖아요. 이 길이 보통 길입니까. 우리를 먹고 살게 해준 길입니다. 그 역사를 이름에 남겨야죠. 그래서 ‘석탄을 운반하는 높은 길’이라는 뜻에서 운탄고도(運炭高道)라고 지었습니다. 중국의 차마고도를 떠올렸습니다.”

함 사장은 최근 들어 운탄고도라는 이름에 새 뜻을 추가했다. ‘구름 위에 양탄자를 깔아놓은 평평한 길’이라는 뜻의 운탄고도(雲坦高道)다. 그는 “일에 지치면 혼자 나와서 걷곤 하는데, 언젠가 아침에 나왔더니 발 아래로 양탄자 같은 구름이 펼쳐져 있었다”고 자랑하듯이 말했다.

그럴 수밖에. 운탄고도는 평균 고도가 해발 1000m가 훌쩍 넘는다. 가파른 산 옆구리를 파내서 낸 길이어서 길 아래가 바로 천 길 낭떠러지다. 하늘이 맑으면 태백산맥을 이루는 봉우리가 바다처럼 일렁이고, 하늘이 흐리면 골짜기 아래에서 피어오른 안개가 구름이 되어 발 아래 세상을 덮는다. 길이 파고든 숲에는 금강소나무·낙엽송·떡갈나무 등이 하늘을 찌를 듯이 서 있고, 길숲에는 철마다 온갖 꽃이 얼굴을 바꿔가며 피어난다.

길의 뜻

달맞이꽃. 꽃이 크고 색깔이 강해 멀리서도 잘 보인다. 밤에만 피는 꽃인데 아침에도 피어 있었다.

함 사장과 운탄고도를 걸은 날이 지난달 28일이었다. 여름이 물러가고 가을이 임박한 계절, 여름 꽃은 열매를 맺기 시작하고 가을 꽃은 고개를 들기 전이었다. 야생화를 기약한 걸음이었지만, 실망하지는 않았다. 꽃이 보이지 않으니, 되레 길이 도드라졌다.

현재 하이원리조트는 6.7㎞ 길이의 운탄고도 1차 코스를 조성하고 있다. 오는 11월 개장할 계획으로, 백운산 남쪽 기슭을 따라 리조트 뒤편을 감싼다. 길을 새로 내는 게 아니라 안내판을 설치한다는 얘기다. 운탄고도는 길에 밴 사연이 주인공이다.

그러나 함 사장은 리조트가 조성 중인 코스를 걷지 않았다. “내가 좋아하는 길을 걷겠다”며 화절령에서 새비재로 이어지는 구간으로 안내했다. 리조트와 멀어지는데 괜찮겠느냐고 물었더니 “여기도 운탄고도”라고 짧게 대답하고 앞장섰다.

사실, 우리 기억에서 함승희라는 인물은 서슬 퍼런 검사다. 특수부 검사 시절 1년 만에 280명을 구속했고, 조직폭력배와 전면전을 치렀던 ‘스타 검사’였다. 국회의원 시절에는 돈세탁 방지법 제정을 주도하기도 했다. 카지노를 운영하는 공기업의 사장과는 어울리지 않는 이력일 수 있다.

“사람 부리고, 조직 관리하는 건 똑같아요. 여기에서 내가 할 일은 돈을 잘 버는 게 아니에요. 돈을 잘 쓰는 거예요. 돈을 잘 쓰려면 비리 같은 게 없어야 하고요. 길처럼 모든 게 분명해야 하지요.”

운탄도로라 불리던 시절, 이 길은 ‘막장인생’이라고 내몰렸던 사람들의 터전이었다. 운탄고도로 이름을 바꾼 지금은 일확천금에 눈 먼 사람들이 갖다 바친 돈으로 재활을 도모한다. 얄궂은 운명이라고 부르려다 생각을 바꾼다. 그러나저러나 길은 길이기 때문이다.

길 정보=하이원리조트www.high1.com/haneulgil가 조성 중인 운탄고도는 리조트 남쪽 외곽을 에운다. 화절령 사거리에서 낙엽송길을 따라 걷다가 하이원호텔&CC로 내려오는 6.7㎞ 코스다.

은 리조트 마운틴 콘도에서 하늘마중길을 따라 3.6㎞를 올라 화절령 사거리에 이르는 구간을 추가해 걸었다. 전체 길이 11㎞. 이달의 추천길이 소개하는 코스는 밸리 콘도에서 마운틴 탑까지 오른 뒤 화절령 사거리에서 마운틴 콘도로 내려오는 10.2㎞ 길이의 구간이다. 코스마다 이정표가 잘 돼 있고, 리조트에서 코스 지도를 받을 수 있다. 1588-7789.

글=손민호 기자 ploveson@joongang.co.kr
사진=임현동 기자 hyundong30@joongang.co.kr

연재 바로가기 - 그 길 속 그 이야기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