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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정 할머니 "간호사 될 줄 알았는데 위안부가 됐어…"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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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이상하게 까치소리가 깍깍 하고 들려. 그래 손녀딸 올 때는 멀었고 우리 집에도 손님이 오실라나 그랬지.”

충남 당진에서 만난 이기정(90) 할머니는 낯선 이들을 따뜻하게 반겼다. 손녀가 한 달에 한 번, 보건소 사람들이 2주에 한 번꼴로 찾아올 뿐이어서 적적하다고 했다. 낮엔 요양보호사가 할머니의 말동무가 돼주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혼자 보낸다. 30도가 넘은 더위에 지쳐 누워 있던 할머니는 연신 “찾아와줘 고맙다”고 말하며 몸을 일으켜 선풍기를 틀고 요구르트와 아이스크림을 내왔다.

“아파서 교회 못 간 지도 1년 됐지. 다리에 풍이 들은 데다 넘어져서 119 실려가 수술하고 한 달 병원에 있었어. 그때부터 걷지를 못해. 그냥 주저앉아 있는 거야. 찬송가도 다 잊어뿌써.”

할머니의 허벅지에는 손가락만 한 흉터가 있었다. 지난해 낙상사고로 관절을 크게 다친 탓이다. “안 아플 적에는 저놈(보행보조기) 끌고 많이 댕겼어. 밖에 있으믄 다부지게 서 있으라고 정부가 준 거야.“ 그러나 이제는 한 발 내딛기도 쉽지 않다. 통증이 심해진 데다 보조기의 다리가 닳아서다. ”질질 끌고 댕기니께 고무 바킹이 닳아서 없어요. (높이를) 올렸음 좋겄어요.”

할머니는 문득 밖을 물끄러미 내다봤다. “사는 게 고생이지 뭐이가. 하늘나라 가면 아무 걱정 없잖아. 늙으면 오는 사람도 없고 좋다고 할 사람 없어.” 할머니는 열다섯에 싱가포르에 위안부로 끌려갔다. 간호사가 되고 싶어 고향인 당진을 떠났는데 위안부가 됐다. “열다섯에 (위안소에) 갔는데…간호사 시킨다고 해서 돈 벌려고 갔어. 근데 이상한 데로 끌고 가. 포탄 터지는 소리가 들리고….”

위안소 운영자는 끌려온 이들에게 아무것도 설명해주지 않았다. 그저 하루 40~50명의 군인을 받게 했다. 도망가고 싶었지만 겁이 났다. “싫다고 하면 때리고 도망가면 죽이기도 하고 그러니까 아파도 참아야지. 원망하고 울고 죽겠다고 생각도 하고 그랬는데 이제 와 어쩌겠어.” 할머니는 “말하면 속만 시끄럽다”고 했다.

위안소에 있으면서 딱 한 번 희망을 가진 적은 있다. 군 부대가 싱가포르에서 철수하고 대만으로 이동한다고 할 때다. “군인들 따라 싱가포르에서 대만으로 갈 때는 여기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설렜는데…아니었어.” 상황은 더 나빠졌다. 전쟁이 길어지면서 군인들은 전보다 더 난폭해졌다. 할머니는 “내가 그때 죽었어야 했는데 그러지를 못했다”고 말했다.

5년간 고초를 겪고 해방이 됐지만 할머니는 가족에게 가지 못했다. 위안부로 끌려갔다는 사실이 부끄러워서다. “그거를 아버지한테 말을 할 수가 없으니…그거를 어찌 말하나. 내가 죄인이지.” 대신 자기보다 스무 살 많은 남자를 만나 같이 살기 시작했다.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었다. 할머니가 자식을 낳지 못하자 부부는 아들을 입양해 귀하게 키웠다. 지금은 남편도 세상을 떠나고 아들 내외도 없다. 손녀가 할머니의 유일한 가족이다.

할머니는 사람에게 속아 모질게 당했지만 또한 사람을 만나 감사하다고 했다. “왜 나는 위안부로 끌려가 이렇게 힘들게 살았을까 하다가도 정부가 도와주는 거 생각하면 감사하고, 혼자 있어 외롭고 심심하다가도 또 이렇게 찾아와 주는 양반들이 있어 감사하고. 할배는 떠났어도 늙은이 찾아와 주고 손톱 깎아 주는 손녀가 있어 감사하고.” 할머니는 눈시울을 붉히며 기자 일행의 손을 꼭 잡았다.

“더운데 멀리까지 찾아와 줘 고맙소. 내가 정신은 말짱하니 더 살아볼께. 꼭 또 오시오.”

당진=채윤경 기자 pcha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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