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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살에 겪은 악몽 … 그 아픔 감싼 따뜻한 외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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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김복선 할머니는 위안부 피해 사실을 한 방송에서 증언했다가 주위 사람들에게서 “얼마나 못살았으면 그런 곳에 끌려갔느냐”는 말을 듣고 상처를 받았다. 이후 얼굴을 공개하지도, 악몽 같았던 당시 기억을 입 밖에 꺼내지도 않는다.

지난달 12일 경남 창원의 김복선(83) 할머니 집을 찾았을 때 할머니는 벽에 가만히 기대 TV를 보고 있었다.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던 TV에서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이름이 들려왔다. 할머니는 금세 고개를 돌렸다.

 “아베 이야기만 나오면 마 테레비 꺼삔다아이가. 하도 미워서…그래 싫은 기라. 그 앞에 총리들은 그래도 이래까지 안 했는데 이 사람은 다르드라. 우리 위안부 할매들 얘기를 좀 들어야 될 낀데….”

 김 할머니는 열두 살 때 일본으로 끌려갔다. 당시 국민학교(초등학교) 4학년이었다. 누군가 그때 일을 물으면 할머니는 “잘 기억이 안 난다”고만 말한다. 워낙 어리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악몽을 입 밖에 내고 싶지 않은 탓이다. 다만 할머니는 “말로 표현할 수가 없는 기라 일본은…”이라며 말을 이어갔다. “우리 사람들이 잘 못살아서 콩나물 키워가 밥 먹이고 했는데 경찰이고 뭐고 일본 놈들이 와가지고 시루를 발로 차고 그랬으니. 바로 보이지가 않는다 일본은. 위안부 때도 이리 끌리댕기고 저리 끌려댕기서 정확히 어덴지는 몰라도 참 괴로웠다.”

 할머니는 히로시마 원폭의 공포도 떠올렸다. “아, 맞다. 히로시마깽(히로시마현)에 폭탄이 떨어짔다아이가. 그기 폭탄 떨어진 근방에 우리가 있었거든. 그래서 이불이랑 이런 거 들고 다 나와가지고 도랑가에 가서 숨어 있었다. 폭탄 안 맞을라꼬. 그거는 확실히 기억이 나지.”

 해방 후 한국으로 돌아온 할머니는 뒤늦게 중학교에 들어갔다. 당시 중학교까지 가는 경우가 흔치 않아 할머니가 자랑스러워하는 기억이다. 이후 결혼을 하고 아이도 낳았다. 모두가 배고프던 시절, 할머니도 자식들의 주린 배를 채워주기 위해 온갖 고생을 했다. 처음 시작한 건 함태기(함지) 장사였다. 쉼 없이 일하다 보니 어느새 자녀들이 장성해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손주들이 태어났고, 작지만 아늑한 집도 생겼다. 그러나 할머니의 상처는 아물지 않았다.

정부에서 선물 받은 외투로 할머니가 가장 아끼는 물건이다.

 김 할머니는 위안부 피해자 조사·등록이 시작된 1992년 정부에서 할머니가 다녔던 초등학교의 강제 동원 명부를 확인하면서 피해자로 등록됐다. 이후 딱 한 번 방송에 나가서 피해 사실을 증언한 적이 있는데, 그때 받은 상처 때문에 다시는 피해 사실을 말하거나 사진을 찍지 않는다고 했다.

 “그때 동네 할매들이 내를 보고 ‘아이고, 저 할매 집이 그때 그래 못살았나? 그런 데 끌리가구로’ 그렇게 말하드라고. 여기 동네에 내 중학교 동창들도 아직 살아 있고 한데 친한 친구들도 그라드라니까. 그래서 무슨 행사를 가든 절대로 사진도 안 찍고 얘기도 안 한다. 내는.”

 주변 누구에게도 당당하게 말하지 못하고 오히려 죄인처럼 살았다. 곱지 않은 시선을 받게 될까봐, 그리고 자식들에게 피해가 갈까봐 두려워서였다. 그런 할머니에게 작은 위로가 된 건 또 다른 피해 할머니들이었다. 할머니는 몇 년 전부터 가까운 지역의 피해 할머니들과 인연을 맺어 나들이도 다니곤 했다. 작은 기쁨조차 누릴 시간이 많지는 않았다. 할머니는 꿋꿋하게 일본 정부로부터 사과 받을 날을 기다리고 있다. 치매에 걸리지 않기 위해 밖으로 나가 사람들을 만나고, 노래교실도 꾸준히 나간다. 할머니에게 가장 중요한 물건은 지난해 여성가족부에서 선물한 겨울 외투다.

 “맨날 남한테 옷 팔러 다니고 했는데, 이거는 내가 백화점 가서 직접 골랐다. 옷이 참 곱고 마음에 쏙 들어가 지난겨울에 참 잘 입고 댕깄지. 아프고, 치매 걸리고 하면 안 되니까 많이 댕기야지. ”

글·사진=윤정민 기자 yunj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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