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이들하고 처를 잘 부탁한다.”
2012년 8월 10일 오전 7시30분, A(46)씨는 이 문자메시지를 처남에게 보낸 뒤 자신이 살고 있던 서울 강남의 아파트 옥상에서 투신했다.
당시 A씨는 대기업인 LG유플러스의 ‘최연소 상무’였다. 아내, 자녀 2명과 화목한 가정생활을 하고 있었고, 빚도 없었다. 특별한 건강 상의 문제도 없었다.
겉보기엔 완벽한 가장이었지만 A씨는 실은 회사 중역으로서 과중한 업무 스트레스와 사내 따돌림 등으로 분투하고 있었다.
A씨는 카이스트를 졸업하고 1989년 LG 인터넷ㆍ통신 계열사에 입사했다. 그러다 2004년 LG파워콤에 영입됐다. A씨를 점찍어 데려온 그 회사 임원은 2006년 대표이사에 올랐고, A씨는 신임을 받으며 승승장구했다. 이어 2010년 LG텔레콤이 LG파워콤과 LG데이콤을 흡수합병하면서 A씨는 새로 출범한 LG유플러스로 편입됐다. 그는 그간 성과를 인정받아 IPTV사업 상무로 발탁됐다. 남들보다 4∼5년 빠른 승진이었다.
IPTV사업은 LG유플러스가 향후 신수종 사업으로 육성하려는 중점 분야였다. A씨는 하루 평균 13∼15시간을 회사에서 보내며 고군분투했다. 2010년, 2011년 매출은 괜찮았지만 초기 투자비용이 많았던 탓에 영업손실이 발생했다. 2012년엔 SK텔레콤, KT와 경쟁에서 뒤처지며 시장점유율이 점점 떨어졌다. 상황 타개를 위해 LG유플러스는 ‘실적 두 배 증가 운동’을 벌였다. 2012년 3월 89만명인 가입자를 그해 말까지 200만명으로 늘리는 게 목표였다. 그러나 가입자는 7월 말까지 95만명에 그쳤다. 부진을 탓하는 화살은 A씨에게 집중됐다.
사내 파벌 간 알력다툼도 A씨를 힘들게 했다. 합병의 본류인 LG텔레콤 출신이 가장 큰 세력이었고 A씨 같은 LG파워콤 출신들은 설 자리가 별로 없었다. 애초 A씨를 발탁한 LG파워콤 전 대표이사는 A씨의 직속 본부장으로 있다가 2012년 좌천성 인사를 당했다. LG텔레콤 출신의 새 본부장은 A씨를 배제하고 A씨 밑 팀장들에게 직접 업무지시를 내렸다. 2012년 4월엔 방송통신위원회가 국내 IPTV 가입자 500만명 달성을 기념해 A씨에게 동탑산업훈장을 주기로 했다. 그러자 새 본부장은 공식회의에서 “부회장님이 ‘대표이사에 앞서 상무직급에 있는 A씨가 훈장을 받는 것이 불쾌하다. 훈장을 취소하고 싶다’는 취지의 말씀을 하셨다”고 말하기도 했다.
A씨는 급격히 말수가 줄어 들었다. 주위 사람에게 “공황 장애가 오는 것 같다”“그동안 회사와 집만 다니고 취미나 다른 일이 20년간 없었다”고 하소연했다. 또 과거 친했던 동료들이 새 본부장 취임 후 자신을 멀리하고 등을 돌린다며 배신감을 토로했다. 사내 이메일로 “군중 속의 고독을 느낀다”고도 했다.
A씨는 집에서도 이상 행동을 보였다. 평소 TV는 거들떠 보지 않던 사람이 아무 말 없이 스마트폰으로 혼자 드라마를 연달아 봤다. 갑자기 모아 둔 재산이 얼마나 있는지, 한 달 생활비가 얼마나 나오는지를 아내에게 묻기도 했다. ‘너무 힘들다’며 안아달라고 한 적도 있다.
A씨의 아내는 근로복지공단에 유족급여를 신청했지만 거절 당하자 지난해 소송을 제기했다.
서울행정법원 행정3부(부장 김병수)은 유족의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A씨가 의료기관에서 우울증 등 정신질환으로 정식 치료를 받은 적은 없지만 2012년 무렵 우울증이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며 “합리적인 판단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자살해 업무와 사망 사이에 상당한 인과관계가 인정된다”고 말했다. ^2012년 이전까지 A씨가 우울증을 앓은 전력이 없는 점 ^가족ㆍ재산관계 등 개인적 신상에도 특별한 문제가 없는 점 등을 들어 “직장에서 받게 된 업무상 스트레스를 제외하고 A씨에게 자살을 선택할만한 동기나 다른 사유를 찾아볼 수 없다”고 제시했다.
백민정 기자 baek.minjeong@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