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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한국의 외교 공간 확대한 박 대통령 열병식 참관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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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중국의 항일전쟁 및 세계 반(反)파시스트전쟁 승리 70주년을 기념하는 열병식이 어제 베이징의 천안문(天安門) 광장에서 거창하게 펼쳐졌다. 박근혜 대통령은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나란히 성루(城樓) 맨 앞줄 정중앙에 서서 중국 인민해방군의 대규모 군사 퍼레이드를 지켜봤다.

 한국 대통령이 중국군 열병식에 참석한 것은 처음이다. 더구나 61년 전 그 자리의 주인공은 중국의 마오쩌둥(毛澤東) 주석과 북한의 김일성 주석이었다. 어제 북한 대표로 참석한 최용해 노동당 비서의 자리는 앞줄 맨 끝이어서 잘 보이지도 않았다. 한·중 관계와 북·중 관계의 현주소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행사였다.

 1만2000명의 정예병력과 각종 첨단무기가 동원된 70분간의 열병식은 글로벌 파워로 부상한 중국의 군사적 굴기를 세계에 과시하기 위해 치밀하게 기획된 이벤트였다. 그런 의도를 잘 알기에 미국과 일본은 물론이고, 유럽연합(EU) 등 서방의 거의 모든 나라 지도자가 초대에 불응했다. 미국의 동맹국인 한국 대통령의 존재는 당연히 도드라져 보일 수밖에 없었다. 박 대통령의 참석을 달갑지 않게 여기는 분위기가 워싱턴에 역력했고, 일본은 노골적인 반감을 드러냈다. 박 대통령으로서는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 대통령이 열병식 참석을 택한 것은 북한을 움직일 수 있는 최고의 지렛대는 역시 중국이라고 봤기 때문일 것이다. 북한 핵 문제를 해결하고, 북한의 추가 도발을 막고, 나아가 한반도 통일에 기여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나라가 중국이라는 데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 꽉 막힌 한·일 관계를 한·중·일 3각 구도의 틀 속에서 풀기 위해서도 중국의 협력은 필수적이다.

 동북아 역학 구도와 관련, 어제 시 주석이 열병식 연설을 통해 중국 인민해방군 병력 30만 명 감축 계획을 밝힌 것은 긍정적이다. 중국의 군사적 팽창에 대한 주변국들의 우려를 완화하려는 노력의 일부로 평가한다. 중국은 어제 시 주석이 천명한 대로 영원히 패권과 확장을 추구하지 말고, 평화 발전의 길을 가야 할 것이다.

 박 대통령의 열병식 참석은 미·중 사이에서 눈치를 보는 소극적 줄타기 외교에서 벗어나 우리의 주도적 노력으로 동북아에서 한국의 외교 공간을 확대하려는 의지를 반영한 것이라고 본다. 실리에 입각한 독자 외교의 조심스러운 첫발을 뗀 용기 있는 선택이다. 집에만 갇혀 있던 아이가 철이 들면서 바깥 출입을 시작한 셈이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한국 외교와 안보의 초석은 한·미 동맹이란 사실이다. 대중 외교와 대미 외교가 제로섬 게임이 돼서는 곤란하다. 지금 워싱턴과 도쿄에서는 한국의 중국 경사(傾斜)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그런 우려를 불식시키고, 신뢰를 다지는 데 외교력을 모아야 한다. 다음달 중순 워싱턴에 가는 박 대통령의 첫 번째 숙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