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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격에 빠진 상주 살충제 사이다 마을…"집 밖에 잘 나오도 않는 데이"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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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한번 살피(살펴) 보레이. 아무도 없을 끼라. 전부 무서버가(무서워) 집 밖에 잘 나오도 않는 데이."

3일 오전 경북 상주시 공성면 금계1리. 50여일 전 '살충제 사이다 사건'이 일어난 이곳에서 70대 할머니는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러곤 사건 장소인 마을회관 쪽을 가리키며 덧붙였다. "저게는 주민들이 근처도 안간 데이."

할머니 말대로 마을 조용했다. 어쩌다가 한 번 씩 트럭이 지나가는 정도였다. 어렵사리 마주친 주민들에게 사건에 대해 질문하면 손사래를 쳤다. 하나같이 "왜 자꾸 캐묻느냐. 그날만 떠올리면 아직도 가슴이 벌렁거린다"고 했다.

사건 현장인 마을회관엔 경찰이 출입을 막기 위해 쳐 놓은 노란 줄(폴리스 라인)이 아직도 매여 있었다. 안에는 신발과 옷가지가 널려 있었다. 살충제 사이다를 마신 할머니들이 몸부림치다 벗겨진 듯했다. 바닥에는 또 할머니들이 게워낸 토사물 같은 것이 눌어 붙어 있었다. 주민 황모(67)씨는 "예년 같으면 회관 앞 공터에 고추를 널어 말릴 때"라며 "하지만 올해는 아무도 근처에 얼씬을 않는다"고 했다.

일부 주민은 트라우마에 시달렸다. 경북경찰청과 상주경찰서가 '피해자 보호 태스크포스(TF)팀'을 만들어 지난 7월23일과 지난달 27일 두차례 주민 34명 전원을 대상으로 심리 검사를 한 결과다. 살충제 사이다를 마셨다 회복된 할머니 4명 중 1명과 그 가족 1명은 충격으로 사건 자체를 기억하지 못하는 기억장애 증세를 보였다. 다른 주민들도 "당시를 떠올리면 땀이 나고 심장이 뛰면서 숨쉬기 곤란하다"거나 "혼란스러움을 느낀다"고 했다. "공포스럽고 괴로운 기억이나 생각, 영상이 반복해 떠오른다"는 이들도 있었다. 살충제 사이다를 마신 피해 당사자 말고 일반 주민 가운데 4명은 앞으로 당분간 관찰과 치료가 필요하다는 결과가 나왔다.

피해 당사자인 민모(83) 할머니는 퇴원 후 가족들과 함께 경북 포항에서 머물다 이틀 전인 1일에야 안정을 찾아 마을에 돌아왔다. 역시 살충제 사이다를 마셨던 이모(88) 할머니는 아직도 부산의 아들 집에서 지내고 있다. 이 할머니의 아들은 "마을로 돌아갈 수 있을 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또 다른 피해자 한모(77) 할머니는 "남이 주는 음료수는 겁이 나서 마시지 않는다"며 "이젠 음료수를 건네는 주민도 없다"고 말했다.

경찰은 마을을 예전처럼 되돌리기 위해 조만간 경로잔치를 열기로 했다. 마을회관은 도배와 장판을 새로 해 사건의 흔적을 말끔히 없앤 뒤 다시 문을 열 계획이다. 지난달 28일엔 트라우마 때문에 농사일을 제대로 못하는 주민들을 위해 일손 돕기를 했다. 한 피해자의 가족은 "일주일에 한번 꼴로 경찰관들이 병원을 찾아와서는 피해 보상을 설명해주고 때론 먼데서 온 가족을 위해 숙박비도 지원했다"며 "트라우마를 벗어나는데도 경찰관들의 역할이 기대된다"고 말했다.

범인으로 지목돼 살인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박모(83)할머니는 여전히 범행을 부인하고 있다. 박 할머니의 재판은 오는 연말께 국민참여재판으로 열릴 예정이다.

상주=김윤호 기자 youknow@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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