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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도 수요집회 꼭 나가 … 옆에 있어주는 아이들 고마워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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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김복동 할머니가 2013년 7월 30일 미국 글렌데일 시립도서관 앞에서 진행된 평화의 소녀상 제막식에 참석, 소녀상을 쓰다듬고 있다. [중앙포토]
지난달 19일 수요집회에 나온 아이들이 구호를 외치는 모습. [중앙포토]

“만날 수요집회, 수요집회 하니까 다들 지겹겠제. 그래도 지겨워하는 게 낫다. 첨엔 수치를 뭐 자랑하냐고 욕하는 사람도 마이 있었으니까.”

 김복동(89) 할머니가 매주 수요일 서울 종로구 일본대사관 앞을 지켜온 지 올해로 24년째다. 할머니는 1992년 2월 26일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가 주최한 ‘7차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수요집회’에 처음 참석했다. 다음달 14일 1200차 집회를 앞두고 있다.

 할머니는 몸이 너무 아픈 날이 아니면 힘든 몸을 이끌고 매주 수요집회에 나갔다. 아흔을 앞둔 나이라 이미 왼쪽 눈은 시력을 잃었고 오른쪽 눈도 잘 보이지 않지만 늘 일본대사관으로 향했다.

 “내가 일본 만행만 생각하면 365일이 우울한데 딱 하나 힘 나는 기 집회 나가는 기다. 가먼 자기 일도 아인데 우리 생각해서 나와주는 사람들이 있잖아. 그렇게 사람들 만날 때가 제일 고맙고 기쁘다.”

 수요집회는 91년 김학순(97년 사망) 할머니가 위안부 실상을 처음으로 증언한 뒤 이듬해 1월 시작됐다. 당시 부산에서 혼자 살고 있던 김복동 할머니는 기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와 집회에 참석했다. 일본대사관을 향해 때로는 침묵으로, 때로는 큰 목소리로 항의했지만 돌아온 건 무반응이었다. 김 할머니는 “처음엔 피해자들이 직접 공개해 얘기하먼 알아들을 줄 알았지. 사과도 금방 받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어”라고 말했다.

 일본 정부보다 더 서운했던 건 뒤편에서 수군거리는 일부 시민들이었다. “그땐 지금처럼 차도 잘돼 있고 그런 것도 아이었으니까. 한여름엔 땀 뻘뻘 흘리고 겨울엔 오돌오돌해 가먼서 버스 타고 한참 걸어가 집회하면 따겁게 보는 사람들도 많았어. 아이들한테 못 보게 하는 이도 있고….” 마음이 움츠러드는 날도 있었다. “한 날은 ‘민족의 치부를 드러내서 뭐하느냐’면서 뭐라 하는 사람도 있었어.”

 2000년대 들어 다른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도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했고, 참여하는 시민들도 늘었다. 이제는 매회 100~700명의 시민이 할머니와 함께 수요집회를 지키고 있다. 2011년 12월 1000번째 수요시위엔 전국에서 시민 3000여 명이 참여하기도 했다. 일본·미국·대만·필리핀 등 해외에서도 수요집회가 열렸고, 2013년 9월엔 프랑스 파리에서 여성단체와 교민 등 100여 명이 집회를 열었다.

 김 할머니는 해외 각국을 돌며 위안부 피해의 참상을 알려왔다. 93년 비엔나 세계인권회의에 참석한 것을 시작으로 20여 년간 20여 차례 해외 증언을 해왔다. 오는 8일부터 26일까지 노르웨이·영국·독일 등을 돌며 증언에 나선다. 할머니는 “우리가 비참하게 지낸 것을 알게 되면은 일본한테 어떻게 해결을 지으라고 하겠지 하는 마음으로 다닌다”고 했다.

 할머니는 해외 각국을 다니면서 자신과 비슷한 피해를 입은 여성들을 만났다. 2012년 ‘세계 여성의 날’에는 “일본으로부터 배상금을 받게 되면 콩고민주공화국 내전에서 성폭행 피해를 입은 여성들에게 전액 기부하겠다”고 약속했다. 정대협은 할머니의 뜻에 따라 ‘나비기금’을 설립하고 후원금을 모았다. 2013년 베트남인 은구옌 반 루엉(45)과 은구옌 티 김(45)에게 각각 6000달러, 4000달러를 전달했다. “외국에도 우리처럼 피해를 입은 여성이 굉장히 많더라고. 많은 사람이 후원해줘서 도와줄 수 있으니 얼마나 좋나.”

 열다섯 살에 끌려가 8년간 대만·일본·싱가포르·인도네시아 등에서 위안부 생활을 했던 할머니는 해방 후 고향에 돌아와 차마 결혼할 수 없었다. 혼처를 알아보는 어머니에게 그동안의 수모를 털어놓았다. 모든 사실을 비밀에 부치자던 어머니는 결국 화병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이후 할머니는 혼자 살아왔다.

 그래서일까. 할머니에게 수요집회에서 만나는 아이들이 더 애틋하고 소중하게 다가온다. “애들이 와서 재롱 피우고 그러면 얼마나 고맙고 귀엽고 예쁘고…말도 못한다. 와서 나한테 안기고 그러면 세상 행복해. 아이들이 커서 힘없는 설움 안 당하게 하는 거, 그게 내가 집회에 나가는 이유이기도 해.”

김선미 기자 calli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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