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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세 위안부 할머니 "치매 안 걸릴라꼬 혼자 화투 칩니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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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려줘 뭐하는교? 절대로 모른다. 암것도 안 알키주고. 고생한거 알아도 그리 고생한 줄은 모를끼다. 손주하고 여게 앞에 사람들하고 아무도 모르지. 뭐할라꼬 알키주겠노? 남사스럽구로. 뭐 좋은 기라고. 절대로 안 알립니다.”

박필근(88) 할머니는 손을 내저으며 “남사스럽다”는 말을 반복했다. 할머니는 도통 속 얘기를 잘 하지 않는다. 특히 위안부로 끌려가 고초를 당했던 기억은 말을 꺼내는 것조차 극도로 꺼린다. 길고 긴 세월이 지났지만 떠올리는 것 자체가 괴롭고, 혹시나 가족에게 흠이 될까 두려운 탓이다. 할머니는 눈살을 찌푸리며 짧게 말했다.

“어메랑은 밭에 일하러 가고 어른들도 아무도 없는데 누가 집앞으로 왔다 아이가. 억지로 차를 태아가는데 어딘지도 모르지. 그때는 일본인지 뭔지도 아무것도 몰랐다. 촌에서 자라가지고 누가 데려가는지도 모리고, 그냥 남자들 안 있나. 군복 입고 온 일본 남자….”

할머니는 모진 위안소 생활을 ‘고생’이란 한마디로 표현했다. “고생한 거 말로 다 못한다. 얼매나 독한 놈들인지…그렇게 잡혀가고 우리 어메랑 아부지가 나 때문에 빨리 돌아가삤다. 내 걱정때문에.”

해방 후 고향으로 돌아 온 할머니는 동네 총각을 만나 결혼했지만, 얼마 못가 혼자가 됐다. 남편은 할머니가 채 마흔도 되기전에 명을 달리했다. 이후 할머니는 혼자서 두 남매를 키웠다. 할머니가 태어나 지금까지 살고 있는 곳은 경북 포항시 죽장면의 산골이다. 달리 일할 거리가 마땅찮았다. 할머니는 다른 집 농사를 도와주고 품삯을 받아 자식들을 키웠다. 남의 집 살이도 오래했다.

박 할머니는 “남의 집에 방 하나 얻어가 살았지. 시집살이를 하면 했지 남의 집살이 몬한다. 설움도 많이 받고 입도 못떼고 살았다. 몬산다 몬살아”라고 말했다. 품삯으로 하루하루 버티며 살았다. 지금은 자식들이 장성했고, 할머니 집도 생겼다. 작은 시골집이지만 더없는 보금자리다. 할머니는 지금도 60대 딸, 50대 아들과 떨어져 혼자 시골집에서 텃밭에 옥수수ㆍ고추ㆍ깨 등을 키우며 생활하고 있다.

할머니는 아직 다른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에 비해 건강하고 기억도 또렷하다. 면사무소에서 선물한 노인 보행보조기를 손에 쥐고 동네를 산책하고, 텃밭에서 기른 채소로 음식도 해 먹는다. 할머니를 힘들게 하는 건 외로움이다. 가끔 손님들이 오면 반가운 마음에 직접 키운 옥수수를 대야 가득 삶아 내놓을 정도다.

그런 할머니에게 가장 좋은 친구는 화투다. 할머니는 매일 혼자 화투를 친다. 누가 놀러오면 꼭 같이 화투를 치자고 말한다. 기자가 찾아왔을 때도 “오랜만에 같이 한판 치야겠다. 딱 한판만 치자”며 방에서 화투와 담요를 가지고 나왔다. 할머니는 “경로당 가도 사람 한 명 없고, 혼자 화투치는 거 말고 할기 없다. 나가봐야 또 위안부 당한 게 남사스럽기도 하고”라고 말했다.

할머니가 화투를 좋아하는 건 외로움 때문만은 아니다. 할머니는 “다른 (위안부) 할매들이 다 아프고 치매걸리가 기억도 몬하고 한다드만. 치매 안 걸릴라면 이기 최고다”라고 했다. 일본의 사과를 받기 전에 기억을 잃는게 두려운 것이다. 일본 정부 얘기가 나오자 금세 목소리를 높였다.
“오래 산다꼬 하지만, 그래도 해결이 안된다. 보상이든 뭐든. 우리 고생한거 말로 다 몬하는데 그라면 뭐하노. 그놈들(일본)이 눈도 깜짝 안하는데 되겠나. 내가 오래 살믄 을매나 살겠노. 200살을 사나 300살을 사나. 저기 언제 해결될지 우예 아나.”

기다림에 지친 마음을 드러낸 것이다. 그렇다고 일본 정부의 사과와 위안부 문제 해결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함께 간 면사무소 직원이 질문을 건넸다. “할머니, 그래도 건강하게 기다리셔서 꼭 사과도 받고 증언도 하셔야 되지 않습니까?” 할머니가 답했다.

“예. 내 삽시다. 밥도 많이 묵고 오래 삽시다. 언젤지 모르지만, 내 꼭 살겠습니다.”

포항=윤정민 기자 yunj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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