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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나를 흔든 시 한 줄

은희경·소설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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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순박한 시골처녀여
나에게 손을 흔들지 마오
내가 탄 마차가 지나가면
당신은 흙먼지를 뒤집어쓴다네
(…)

거짓으로 사랑하였으나 목 놓아 울었네

- 황병승(1970~), ‘모래밭에 던져진 당신의 반지가 태양 아래 C, 노래하듯이’ 중에서

가짜 이야기에 지칠 때
나를 깨워주는 한 문장

소설가로서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은 내가 쓰고 있는 이야기가 도통 재미가 없을 때이다. 왜 그럴까, 열심히 하고 있는데. 십중팔구 허튼소리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진정 하고 싶은 이야기는 잃어버린 채 마음에도 없는 그럴듯한 말만 이어 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나 자신이다. 다시는 소설을 쓰지 못할 것 같은, 엄살 섞인 절망이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온다.

 그런 시기에 이 시를 읽었다. 거짓으로 사랑하였으나 목 놓아 울었다니! 우리의 사랑은 어차피 거짓이다, 그러고도 목 놓아 우는 우리는 실패한 존재들이다. 진실의 뜻이 뭔지 물어보는 거짓, 성공을 무시할 수 있는 실패. 바로 내가 쓰려고 했던 세계였다. 내가 길을 잃은 것은, 세상이 말하는 진실과 성공의 눈치를 봤기 때문이라는 깨달음이 왔다.

 그 구절은 이후에 쓴 장편소설의 소제목이 되었다. 그 챕터에는 빈소에 모인 사람들이 망자의 삶을 세속적인 잣대로 평가하고 실패자로서 추모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주인공은 한 철학자의 말을 빌려 이렇게 독백한다. 우리의 삶은 ‘실패한 모험을 마치고 자신이 믿지 않는 것들 속으로 천연덕스럽게 돌아가는 것’이라고. 나는 오래전 친구의 빈소에서 그의 죽음을 잊지 않겠다고 혼자 약속한 적이 있다. 그 약속이 지켜지는 데에는 나를 흔든 시 한 줄도 힘을 보탰다.

은희경·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