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평양에 영상 생중계 … 기세 밀리면 “허리 세우라” 쪽지

중앙일보

입력 2015.08.25 02:30

업데이트 2015.08.25 10:50

지면보기

종합 05면

판문점엔 남북이 각각 ‘평화의 집’(남)과 ‘통일각’(북)을 회담장으로 운영하고 있다.

 밤샘회담과 마라톤 협상이 이어지는 평화의 집 2층에는 회담장 바로 옆에 남북 대기실이 있다. 대기실 옆 휴게실엔 소파와 세면장이 있다. 휴식을 취하거나 샤워를 할 수도 있어 장기전이 가능하다. 과거 회담엔 호텔 출장뷔페나 설렁탕 같은 식사가 준비됐는데 이번에는 서울에서 모 업체의 도시락을 주문했다고 한다. 식대나 체류 비용 등은 준비한 측이 부담한다.

▷여기를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치열한 기싸움이 펼쳐지는 판문점 남북 고위급 접촉 상황은 현장의 오디오와 비디오기로 서울뿐 아니라 평양에 실시간으로 전달된다. 김정은 북한 국방위 제1위원장은 평양의 집무실에서 황병서 총정치국장의 발언 내용을 지켜보며 전략을 변경하거나 훈령을 내릴 수 있다.

평양의 노동당 통일전선부 회담상황실에서도 파악이 가능하다.

 청와대의 박근혜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회담 상황을 생생하게 들여다보는 게 가능하다. 24일 오전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현재 합의를 마무리하기 위해 계속 논의 중”이라고 구체적 상황을 설명한 것도 접촉 진행 과정을 직접 챙겼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는 게 회담 관계자의 설명이다.

 회담장에선 늘 총력전이 벌어진다. ‘2(김관진·홍용표)+2(황병서·김양건)’ 협상 형식이지만 수행원을 포함하면 회담 관계자는 한쪽만 30명 이상이다.

특히 회담장 내엔 ‘전략수행’이라 불리는 베테랑 실무요원이 대표단 뒷자리에 배석할 수 있다. ‘전략수행’ 요원은 그때그때 다르다. 국가정보원 소속일 수도 있고 청와대나 통일부 직원일 수도 있다. 이들뿐 아니라 서울·평양의 노련한 상황실 관계자들이 순발력 있게 대응할 수 있도록 뒷받침하고 있다. 자기 측 대표가 기싸움이나 논리에서 밀리는 듯하면 즉각 대응 방법을 담은 쪽지가 테이블에 올라간다. “정회를 요구해 시간을 벌도록 하라”거나 “회담을 끝내라”는 지시뿐 아니라 “허리를 굽히지 말고 꼿꼿이 세우라” “목소리를 단호하게 하라”는 깨알 같은 행동지침이 내려간다.

 상대 측 전략을 하나라도 더 캐내려 남북한 진행요원들끼리 장외 탐색전도 벌인다.

 매끄러운 진행을 위해 회담장엔 ‘연락관’이라 부르는 요원들을 두고 있다. 남쪽은 통일부, 북쪽은 통일전선부 소속이다. 판문점에 상주하는 이들은 평소에는 표류 어부의 귀환 업무 등을 챙긴다. 회담이 열리면 남북 연락관들이 서로 만나거나 통화해 의제 조율이나 통지사항을 주고받는다. 회담 시작 때 양측 대표가 동시에 문을 열고 등장하게 타이밍을 맞추는 것도 연락관들이다. 아무리 남북관계가 험악해도 아침·저녁으로 직통전화 가동 상태를 점검하기 위해 서로 안부를 묻는 이색 업무다.

 회담 운영 과정에서 남북이 가장 촉각을 곤두세우는 건 통신망 구축이다. 서울이나 평양과의 통화 과정에서 회담 전략이나 카드가 노출돼선 안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반전화가 아닌 전용 직통회선을 사용한다. 전화와 팩스는 모두 비화(秘話)장치라는 보안기기가 장착돼 있다. 음성신호를 암호화해 전달한 뒤 다시 풀어주는 방식으로 도·감청을 막는다. 아무리 대표단이 단출해도 남북 접촉이나 회담엔 국정원이나 북측 국가안전보위부의 통신보안 담당 전문요원은 꼭 포함되는 것도 이런 사정 때문이다.

 비화장치를 해도 보안이 찜찜하거나 극히 비밀을 요하는 내용이 오갈 때는 자기 측 지역으로 이동해 교신한다. 황병서 총정치국장이 24일 새벽 정회 때 우리 측에 “차량을 준비해 달라”고 한 것도 김정은으로부터 직접 지시를 받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번 남북고위급 접촉은 북한이 먼저 접촉을 요청해와 평화의 집에서 열리고 있다. 상대 지역에 들어가 접촉하는 건 상당한 부담이라 남북 지역을 번갈아 가며 하는 게 관례다. 하지만 22일 10시간의 첫 만남과 23일 시작된 2차 접촉 모두 평화의 집에서 열렸다. 회담 업무에 밝은 한 당국자는 “북측이 자기 측 시설인 통일각을 고집하지 않는 건 대단한 변화”라고 말했다. 그는 “남측 요구에 따라 김양건 노동당 통일전선담당(대남) 비서보다 격이 높은 황병서 총정치국장을 남측 지역에 파견하고 ‘대한민국’이란 국호를 관영매체에 쓴 것 못지않은 의미 있는 대목”이라고 분석했다. 홈그라운드의 이점을 포기할 만큼 대북 확성기 방송 중단 협상이 다급했단 뜻일 수 있다.

이영종 통일전문기자 yjlee@joongang.co.kr

◆판문점(板門店)= 경기도 파주시 군내면 일대 군사분계선 지역. 1953년 7월 27일 이곳에서 휴전협정이 체결됐다. 공동경비구역(JSA)과 중립국 감독위 사무실, 남북 회담 시설 등이 자리하고 있다.

Innovation Lab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