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인 안 받아 고문 … 그때 외친 ‘엄마’ 소리 귀 막아도 들려”

중앙일보

입력 2015.08.25 00:56

업데이트 2015.08.25 0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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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이용수 할머니는 “위안소에서 전기 고문을 당할 때 ‘엄마~’라고 어찌나 크게 소리를 질렀던지 귀를 막아도 지금까지 그 소리가 들린다”고 말했다. [정혁준 기자]

“일본이 조선의 어린 딸들을 끌어다가 전쟁 성노예를 만들었으니 제대로 된 사과를 해야죠.”

 지난 5일 대구시 달서구 상인동에서 만난 이용수(87) 할머니는 차분하고도 단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7월 말 미국 워싱턴 DC에서 열렸던 미 하원의 일본군 위안부 결의안(HR121) 채택 8주년 기념식에 참석하고 막 귀국한 터라 지칠 만도 했지만 시종 반듯한 자세였다. 이 할머니는 한복을 곱게 다리고 고무신을 닦아 여행용 트렁크에 넣었다고 했다. 그 다음주 국회에서 열린 위안부 피해자 임상미술치료 작품전(8월 10일), 중국인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와의 만남(11일), 수요집회(12일) 참석을 위해서였다. 할머니는 “피곤하지만 일본의 사과를 받을 때까지는 지치면 안 된다”고 했다.

 할머니는 자신을 “겁 많은 아이였다”고 했다. 대구시 북구 고성동에서 고명딸로 태어나 사랑받으며 자랐기 때문이다.

 그는 열여섯 살에 대구의 집 근처 강가에서 다슬기를 잡다가 ‘친구 분순이’와 함께 군모를 푹 눌러 써 코와 입만 보이던 남자에게 끌려갔다. 난생처음 기차를 탔다. 그 여행이 불행의 씨앗이 될 줄은 몰랐다. 평안도 안주에서 배로 갈아탔다. "어디로 가는 건지도 알 수가 없었어요. 나중에야 대만 신주(新竹)의 가미카제(神風) 부대라는 걸 알게 됐지.”

 대만으로 가는 배에서 군인들에게 강간을 당했다. 조선 소녀 5명과 일본군 300명이 한 배에 있었다. 할머니는 “그때는 강간이란 말도 몰랐다. ‘이러려고 나를 데려왔구나’ 하는 생각만 들었다”고 했다. “배가 망가져 다 같이 죽는 게 나을 뻔했는데…. 그 뒤로는 나랑 거기 여자들이 계속 군인들에게 그렇게 당하고 또 당했어요.”

 대만에 도착하자 위안부 생활이 시작됐다. 하루에 네다섯 명꼴로 군인을 받았다. 많을 때는 20명이 넘었다. 공습으로 하루에도 몇 번씩 피란을 가야 했지만 그때도 군인들의 욕망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폭격이 잠잠해지면 논이고 밭이고 아무 데나 포장이 쳐졌고 거기서 군인을 받아야 했다. “바람이 불어 포장이 넘어가도 그놈들은 끝까지 자기 일을 마치고 돌아갔어요. 짐승이야, 짐승.” 할머니는 돈을 받아본 기억도, 진단을 받아본 기억도 없다고 했다.

 “군인 방에 안 들어가겠다고 했더니, 주인(관리자)이 양쪽 손에 줄을 감아서 전기 고문을 해요. 그때 내가 ‘엄마~~’라고 어찌나 시게 불렀는지 그 소리가 귀를 막아도 지금까지 나요.”

 후유증 때문에 할머니는 한여름에도 다리가 시리고 자주 쥐가 난다. 위안소를 떠올리면 몸서리가 쳐져 수면제를 달고 산다. “전에는 약을 반 개 먹었는데 이제 한 알 다 먹어야 해요. 약 먹으면 이상한 게 보이고 자는 둥 마는 둥 누워 있다가 깨지.”

 1945년 전쟁이 끝났고 위안부 생활도 끝났지만 삶은 녹록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온 딸을 본 어머니는 실신했다. “몰골이 말이 아니었지. 내가 집에 가서 ‘엄마!’하고 부르니까 엄마가 너무 놀라 ‘네가 사람이냐 귀신이냐?’하고 그대로 기절했어요.” 결혼은 꿈도 못 꿨다. “무슨 양심으로 시집을 가겠어요. 가족들한테도 당한 일을 말 못했어요.”

한복 입은 이 할머니가 지난 10일 국회에서 열린 위안부 피해자 임상미술치료 작품전에서 애창곡 ‘내 나이가 어때서’를 부르고 있다. [김성룡 기자]

 대신 열심히 일했다. 대구 술집 종업원으로, 울산 해수욕장 상인으로, 포장마차 사장으로, 보험판매원으로도 일했다. ‘하나뿐인 딸이 시집도 못 가고 산다’며 가슴을 치는 부모님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살아내는 것뿐이었다.

 그런 그가 운동가로 변모한 건 91년 고(故) 김학순 할머니가 일본군 위안부였다고 증언을 한 이후다. 이 할머니도 용기를 얻어 45년 넘게 가슴에 묻어뒀던 얘기를 꺼내고 피해자 등록을 했다. 처음엔 세상의 시선이 무서웠다. "할매들이 돈 받으려고 나오나” “그게 자랑이냐”는 얘기를 들을 때는 발등을 찍으며 후회했다. 하지만 강해지기로 했다. ‘위안부’가 아닌 ‘이용수’로 살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96년 경북대 사회교육원과 명예대학원에서 공부해 2001년 석사 과정을 수료했다. 2000년 일본 도쿄 여성국제전범재판과 미국 홀로코스트 기념관에서 일제의 만행을 증언했다. 2002년에는 일본의 과거사 청산을 요구하기 위해 평양에서 열린 아시아지역토론회에 참석했고, 2007년 미 하원에서 위안부 참상을 증언했다. 1000번이 넘게 열린 수요집회에도 꾸준히 참석하고 있다.

 행사에 갈 때마다 할머니는 한복을 곱게 손질한다. 직접 동정을 달고 버선과 고무신도 챙긴다. “국제 행사에 가면 일본 사람도 오고 중국 사람도 와서 누가 누군지 모르거든. 나는 조선의 딸이라는 걸 알리고 싶어요. 난 조선의 딸이다. 떳떳한 한국인이다. 그래서 꼭 챙겨 입어요.”

 이 할머니는 “위안부 피해자라는 걸 내세우기 싫다”고 했다. 대신 “다시는 전쟁으로 인해 우리처럼 피해당하는 사람이 없도록 해결사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힘들지 않냐는 물음에 할머니는 웃으며 답했다. “지금 내 나이(87세) 안 많습니다. 사랑하기 딱 좋은 나이입니다. 200살까지 살 겁니다. 살아서 완전히 해결하겠습니다. 여러분도 같이하는 게 제 소원입니다.”

대구=채윤경 기자 pchae@joongang.co.kr
사진=정혁준·김성룡 기자

◆일본군 위안부 결의안(HR121)=2007년 미국 하원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 위안부 강제 동원에 대한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를 요구하며 통과시킨 결의안.

중앙일보가 창간 50주년, 광복 70주년을 맞아 위안부 피해 할머니 13인의 릴레이 인터뷰를 연재 중입니다. 할머니들은 자기 생의 끝자락을 버티게 하는 소중한 대상을 하나씩 소개했습니다. 이번 영상은 온라인 중앙일보(joongang.joins.com)와 QR코드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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