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한때 성산대교 근처 한강에는 강물을 뚫고 수직으로 솟구쳐 오르는 분수 시설이 있었다. 수면에서 솟아나와 허공에서 흔들리다 맥없이 추락하는 물줄기와 마주치면 누군가 내게 농담을 걸어오는 것 같았다. 그곳에 왜 그런 형상의 물줄기를 설치했을까 의아해하다가 자칫 앞차와 추돌할 뻔한 적도 있다.
수직 상승 욕망은 철저하게 남자의 것이다. 아침마다 확인하고 싶은 신체 반응부터 피라미드 구조로 세상을 파악하는 사회적 인식, 권력이 있는 곳에 단상을 쌓고 기념탑을 세우는 행위까지, 그것은 남자의 자부심과 직결된다. 수직 상승 욕망은 고대 이집트의 오벨리스크에서도 발견되고, 그것을 유럽 전역으로 옮긴 근세로 이어져, 마천루와 첨탑 형태로 현대에 표현된다. 욕망이 왜 높아지기만 하는가 묻는 것은 어리석어 보인다. 욕망을 “우리가 요구한 것과 충족된 것 사이의 간극이 마음속에 쌓여서 만들어지는 감정”이라 규정한 사람은 프랑스 정신분석가 자크 라캉이다. 욕망은 무의식적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결코 충족될 수 없으며 인간은 욕망을 포기하는 순간부터 성장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생애 주기 관점에서 볼 때 욕망이 최고점을 찍는 시기는 출생 직후일 것이다. 생존 자체가 외부 손길에 좌우되기 때문에 필요한 것은 많고 충족되는 것은 적다. 삶에서 필요한 것을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성인이 되면 욕망이라는 찌꺼기가 더는 마음에 쌓이지 않을 것이다. 더 이상 삶에 요구할 것 없는 노년에 이르면 욕망 없이 순연한 비움의 과정을 걸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런 생각은 순진한 착오다.
현실에서 남자의 욕망은 나이 듦이나 삶의 성취에 좌우되지 않는다. 그것은 온전히 무의식적, 생물학적 본능을 따르며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꾸준히 높아진다. 작가 모리아크는 80세에 이렇게 썼다. “쇠약해지지도 않았고, 실추되지도 않았고, 부유해지지도 않았다. 언제나 똑같다. 노인에게 삶에서 얻은 것들에 대해 말하지 말라. 그렇게 많은 해를 살면서 우리 안으로 흘러 들어온 것 중 우리가 지니고 있는 것이 이렇게 보잘것없다는 사실은 믿기 어려운 일이다.” 인간의 무의식이 욕망에만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인류 역사에는 ‘잘 늙는 문화’에 대한 고찰이 희귀할 정도로 드물다. 많은 이가 나이 듦을 “더 이상 젊지 않다, 변방으로 소외되었고 이전처럼 유용하지 못하다”는 의미로 해석한다. 위로 솟구치는 욕망이 내면에 존재하는 한 그런 인식을 버리기 어려울 것이다.
김형경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