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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정재의 시시각각

신동빈의 롯데, 남은 과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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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정재
논설위원

예상대로 롯데가(家)의 형제 싸움은 둘째 신동빈 회장의 완승으로 끝났다. 15분짜리 싱거운 단막극이었다. 형 신동주의 반란은 무기력했다. 한국 반, 일본 반의 신격호 시대는 그렇게 저물었다. 롯데가를 새로 이끌 신동빈 리더십은 어떨 것인가.

 예단은 이르지만 롯데는 강한 기업으로 거듭날 것이다. 장자에 비해 둘째는 대개 혁신·개혁의 상징이다. 장자는 ‘카인 콤플렉스’에 시달리기 쉽다. 아버지에게 사랑받는 동생을 시기·질투·경계하는 것이다. 둘째는 다르다. 무한경쟁의 숙명을 일찌감치 받아들인다. 강한 도전의식은 강한 능력으로 이어진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아모레퍼시픽의 서경배 회장이 차남이다. 최대 제빵그룹 SPC의 허영인 회장도 둘째다. 삼성가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노마드의 원조 몽골족은 장자 상속보다 말자 상속을 선호했다. 무한경쟁 시대의 기업은 태생적 노마드다. 말자이자 둘째, 신동빈의 승리는 ‘차남 우위론’을 주장한 프랭크 샐러웨이 MIT 교수의 주장처럼 예정된 것이었는지 모른다.

 사실을 말하자면 관전자의 눈으로 봐도 신동빈은 이길 만했다. 첫째, 경중(輕重)을 알았다. 지난달 27일 형이 선전포고했을 때 그는 일본에 있었다. 즉각 귀국해 아버지 신격호의 마음을 돌려놔야 할 것 같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대신 열흘 가까이 일본에 머물며 세력을 다졌다. 무거움과 가벼움을 아는 것이야말로 병법의 제일칙이다.

 둘째, 단호했다. 형에게 일말의 틈도 주지 않았다. 형 편에 섰던 인사들을 즉각 갈아치웠다. 친인척도 예외가 아니었다. 셋째, 타이밍을 알았다. 황제 경영 논란엔 즉각 “순환출자를 끊겠다”고 했고 국적 논란엔 곧바로 “롯데는 한국 기업”이라고 선언했다. 무엇으로, 어떻게 싸울지 아는 것이다. 넷째, 적을 알고 자신을 알았다. 신동빈은 세 번째 사과 때 인터뷰를 자청했는데, 한국말로 했다. 그게 형 동주의 일본어 인터뷰나 어눌한 한국말과 비교됐다. 자신의 장점으로 형의 단점을 공격한 것이다. 이런 게 합해져 ‘신동빈의 롯데가 낫겠다’는 흐름을 만들어냈다.

 꿩 잡는 게 매다. 가뜩이나 기업가 정신이 사그라지고 있는 한국 재계다. 역동·개혁의 신동빈에 거는 기대가 크다. 그는 “가족과 경영은 다르다”고 했다. 과연 그는 장담대로 족벌 경영의 구각(舊殼)을 깨는 ‘규칙 파괴자’가 될 수 있을까. 순환출자 고리를 끊는 데만 수조원이 든다. 고리를 끊고 나면 지배구조는 어떻게 꾸려갈 것인가. 일본에 묶여 있는 ‘종속의 고리’는 또 어쩔 것인가. 이 모든 의구심의 끝에 또다시 후계 문제가 있다.

 신 회장의 아내와 아들은 일본인이다. 스물아홉 살의 외아들은 학교도 모두 일본에서 나왔다. 올 3월 일본 여성과 결혼했다. 군 복무도 안 했다. 미국 컬럼비아 대학에서 경영학 석사(MBA) 과정을 밟고 있다. 공부를 마치면 롯데의 가풍대로 다른 기업에 취직해 경험을 쌓은 뒤 경영 승계를 시작할 가능성이 크다. 신 회장은 환갑의 나이다. 후계 구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번 경영권 싸움도 창업주 신격호 회장이 오래도록 후계자 문제를 정리 못해 일어난 것 아닌가. 신동빈 이후의 롯데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다. 롯데는 과연 한국 기업인가. 신동빈 당대뿐 아니라 신동빈 이후에도 롯데는 한국 기업으로 남아있을 수 있나.

 글로벌 시대에 기업의 국적을 따지는 게 무슨 의미랴마는 롯데는 좀 다르다. 창업주 신격호 회장은 한·일 셔틀경영을 했지만 특히 우리 정부의 특혜와 국민 지원을 등에 업고 훌쩍 컸다. ‘강북엔 백화점 불허 원칙’에 소공동 롯데백화점만 예외였으며 롯데호텔 주차장 확보를 위해 국책 산업은행이 여의도로 쫓겨가야 했다. 제2롯데월드를 짓느라 공군은 활주로를 틀어야 했다. 지금도 롯데는 서울시내 네 곳에서 면세점을 하고 있다. 면세점은 우리 정부가 ‘관세 주권’을 행사하는 사업이다. 국리민복에 도움이 되라고 ‘우리 기업’에만 주는 특혜다. 롯데가 국민 기업이 아니라면 그런 혜택을 받아선 안 된다. 혜택을 받았다면 스스로 국민 기업임을 입증해야 한다.

이정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