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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가쟁명:유주열]전후 70년과 자이니치(在日)

중앙일보

입력

직업외교관은 대개 3년을 주기로 가족과 함께 새로운 임지에 부임한다. 임지에서 처음 만나는 사람은 현지에서 사는 해외동포(overseas Koreans)들이다. 해외(재외)동포에는 우리 국적을 유지한 상태로 현지에서 영주권을 얻어 장기 거주하는 재외국민(한국인)과 우리 민족이지만 현지 국적을 가지고 사는 한국계 동포(Korean diaspora)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세계 각국에 우리 해외동포 700만이 흩어져 산다. 흔히들 코리안 디아스포라라고 부른다. 그리스어인 ‘디아스포라’는 민족 집단이 조국을 떠나 다른 나라에서 파종되어 뿌리를 내리고 산다는 의미이다. 민족이산이다. 우리의 민족 이산은 7세기 신라가 중국(唐)과 동맹을 결성 한반도의 백제와 고려(장수왕 이후 고구려를 고려로 고침)를 멸망시켜 나라 잃은 유민들이 중국 대륙과 일본 열도로 이주해 간 것이 그 시작으로 본다.
중국 베이징 인근에 고려영이라는 지명이 보이고 일본에도 고마(高麗) 구다라(百濟)라는 지명이 보이기 시작한 것은 7세기 이후이다. 12세기는 몽골 침략으로 그리고 16세기 말에 와서는 일본의 두 차례(임진년. 정유년)침략전쟁으로 수많은 우리 민족이 포로로 끌려갔다. 포로들은 현지에서 강제 결혼 등으로 동화되거나 일부는 이태리 등 유럽으로도 팔려갔다고 한다. 특히 일본은 우수한 도공(陶工)을 집단으로 납치하여 도공마을을 만들어 놓고 도자기를 제조 수출까지 하였다.
일본 침략의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17세기 누루하치의 후금세력이 다시 두 차례(정묘년. 병자년)침입하였다. 백두산 근처에 유목 생활을 하던 여진족이, 조선과 중국(明)이 일본의 침략전쟁에 매달려 있는 기회를 이용, 부족을 통일하고 세력을 키워 후금을 건국한 것이다. 조선에 침입한 후금도 수많은 조선인을 포로로 끌고 가 고급 인력으로 활용하였다.
근세에 와서 일본의 한반도 강점으로 다시 민족이동이 시작된다. 그 결과 일본, 중국, 그리고 러시아와 중앙아시아에 수많은 코리안 디아스포라가 지금도 남아 있다. 일본에 건너간 조선인들은 일제 강점 시 ‘조센진(朝鮮人)“으로 불리다가 지금은 ’자이니치(在日)‘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중국에 이주한 조선인들은 ’조선족‘이란 이름으로, 스탈린에 의해 러시아와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된 사람들은 ’카레이스키‘ 또는 ’고려인‘이라는 이름으로 살고 있다.
나는 일본의 도쿄 대사관과 나고야의 총영사관 등에서 6년을 근무하면서 자이니치에 대한 관심이 가장 컸다. 우리가 말하는 자이니치는 일본의 한반도 강점이후 이주한 사람을 말하지만, 일본에서의 한민족 디아스포라의 역사는 백제의 멸망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최근 한일관계가 어려워져 도쿄 시내 자이니치가 모여 사는 지역에서 ‘조선인은 조선으로 돌아가라’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혐한시위를 하고 있다. 현재의 일본이 7세기 이전부터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건너 간 자이니치가 주축이 되어 만들어진 나라라는 주장에 의하면 먼저 온 자이니치가 뒤에 온 자이니치 보고 돌아가라고 외치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일본에는 남북으로 분단된 한반도처럼 한국을 지지하는 민단계와 북한을 지지하는 조총련계가 있다. 자이니치는 한국 국적의 교민뿐만이 아니라 조총련소속의 동포들도 일컫는다. 자이니치는 ‘자이니치 칸코쿠진(在日韓國人 민단계)’ ‘자이니치 조센진(在日朝鮮人 조총련계)’을 줄인 것이다. 고대의 자이니치는 모두 동화되어 오늘의 일본을 이루었으니 근세 일본의 자이니치 역사는 1905년 을사늑약이후로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대한제국이 성립한 후 일본에 거주하는 한국인을 일시 자이니치로 불렀지만 1910년 한일 병합조약으로 대한제국이 사라지자 대한제국의 국적을 가지고 있던 자이니치는 모두 일본제국 국적으로 바뀌어 한동안 자이니치는 없었다. 그러다가 1945년 일본이 패전하게 되고 한반도에는 한국과 북한이 각각 독립국가가 됨에 따라 일본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에게 다시 자이니치라는 이름이 붙는다.
해방 직후 일시적이나마 자이니치는 200만에 달했다. 한반도에서 여러 가지 이유로 꾸준히 일본 열도로 이주해 왔기 때문이다. 1910년 이후에는 유학생 취업을 위한 이주가 있었고 1929년 세계적인 대공황으로 한반도의 경제가 나빠짐으로써 자발적으로 취업을 위해 중국으로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이 많았다. 특히 선진 사회였던 일본에 많은 한반도인이 건너가 1930년대 절정을 이루었다.
그러나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함에 따라 거대한 중국 대륙에 전선(戰線)을 펼친 일본은 수많은 젊은 남자를 징병하여 중국으로 보내야 했으므로 일본 노동시장의 인력부족 현상이 발생한다. 일제는 한반도의 젊은이들을 모집하여 부족한 인력을 보충하였다. 그러다가 태평양 전쟁으로 이어지자 장병과 근로자의 만성부족으로 식민지하의 조선의 젊은 남자를 강제로 징병 또는 징용해 갔다. 젊은 여자들은 정신대(挺身隊)라는 이름으로 끌려갔다.
전후 일본정부는 전쟁이 끝나자 해외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일본 사람들을 수용하기 위해 자이니치를 본국으로 보내야 했다. 일본정부는 비용을 부담하면서 한반도 출신을 한국으로 보냈다. 당시 140만 정도가 귀국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경제적 이유라든지 한반도의 정세 불안 등을 이유로 귀국하지 않은 60만의 자이니치가 남게 되었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로 과거 한국으로 돌아 온 사람들 중에는 전란을 피해 밀항선을 이용 일본으로 다시 돌아가는 사람들이 늘어나기고 하였다.
1955년을 기점으로 한반도의 남북한의 대립과 함께 자이니치 사이에서도 민단(재일본 대한민국거류민단)과 조총련(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이 결성되어 대립하게 되었다.
일본 정부는 일본 국민에 대한 보호차원에서 ‘자기나라에 귀국하지 않고 더군다난 일본으로 귀화하지도 않는 사람은 보호할 이유가 없다’면서 차별 대우를 유지하여 자이니치의 귀국을 암암리 종용하고 있었다.
일본은 골치 아픈 자이니치를 조금이라도 밀어내기 위해 북한과 협상하여 1959년부터 1962년까지 3년에 걸쳐 자이니치를 집중적으로 북송시키고도 1984년까지 꾸준히 이어져 현재 10만 정도의 자이니치가 북한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일본 정부는 남아 있는 자이니치에게 1) 지문날인 2) 외국인 등록증 상시 휴대 3) 해외여행 시 재입국허가 4) 강제퇴거 제도 등 차별정책을 계속 시행하였다.
한국정부는 1965년 국교 정상화 이후 차이니치에 대한 일본의 차별 정책을 비난하고 외교적 노력을 기우렸다. 1991년 1월 드디어 한국 정부는 일본과 ‘재일한국인 법적지위 향상 및 처우개선에 대한 합의’를 끌어내어 자이니치에 대한 지문날인 철폐, 국공립 교원 임용기회와 지자체 공무원 임용기회를 획득토록 하였다.
민단도 어려운 한국 경제를 위해 여러 가지로 지원사업을 아끼지 않았다. 민단은 도쿄의 대사관 부지를 포함 일본 내 총영사관 청사 및 관저 등 우리 공관의 대부분 부지와 건물을 기증하였다. 그리고 국내 자연 재해 등 어려움이 있을 때 성금을 모아 기부하기도 하였다.
자이니치 중에는 ‘올드 카머’와 ‘뉴 카머’라는 말이 있다. 1965년 국교정상화를 기점으로 그 이전부터 살던 자이니치는 ‘올드 카머’로 특수 영주자격을 가지고 있으나 국교정상화 이후 새로운 여권에 입국비자를 받아 들어 온 ‘뉴 카머’는 일반 영주자격을 가진다.
북한이 경제실패와 핵.미사일 위협으로 국제사회에서 고립되자 조총련세력은 점차 약화되고 있다. 2014년 말 통계에 의하면 전체 자이니치 중 민단계는 45만이나 조총련계는 민단의 10%인 4만 5천 여 명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지난 8월14일 발표된 아베(安倍晉三) 일본총리의 전후 70년 담화는 아쉬운 점이 많았는데도 불구하고 박근혜 대통령은 8.15 광복절 경축사를 통해, 역대 내각의 입장을 ‘흔들림 없이’ 계승하겠다는 것에 주목하고 미래지향적인 자세를 취했다. 지난 수년간 과거사를 둘러 싼 한일 갈등이 불완전하나마 봉합될 전망이다. 그 사이 어려운 입장에 있던 자이니치로서도 안도가 될 것 같다. 일본에 다시 한류열풍이 불어 도쿄의 신오쿠보(新大久保) ‘코리아타운‘이 붐비고 밝아 진 자이니치의 모습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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