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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꽃빨강 손톱 “한창 멋 부릴 때 못해본 게 한 맺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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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강일출 할머니는 “어릴 적 아버지가 돌아오시면 머리맡에 곶감을 놓아두고 가셨다. 곶감을 좋아하지만 고향 생각이 너무 나서 먹다 멈출 때도 있다”고 말했다. [김성룡 기자]

“내가 큰오빠하고 20살 터울이 넘었으니 조카보다도 어렸던 거지. 아주 막둥이였어. 귀염을 엄청 받았다고. 동네에서 ‘곶감집 막내딸’ 하면 다 알았는데. 그런 내가 끌려갔으니….”

 지난달 22일 경기도 광주시 나눔의 집에서 만난 강일출(87) 할머니는 고향 이야기에 연신 눈물을 훔치며 아이처럼 웃다 울다를 반복했다. 1930~40년대의 일이지만 강 할머니에게 어린 시절 물장구치던 기억은 또렷하게 남아 있는 듯했다. 경북 상주가 고향인 할머니는 3남4녀 중 막내로 태어나 귀여움을 독차지하며 컸다. 곶감집 막내딸로 불린 건 아버지가 감농사를 크게 해서였다.

 “어머니 아버지가 나를 끔찍이 예뻐하셨지. 사람들이 ‘일출이 엄마한테는 일출이 모양으로 자국이 나 있다’고 할 정도로 종일 안겨 있었으니까.”

 소학교를 다닐 때 언니들은 어린 동생이 혼자 가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걱정해 10리도 넘는 등굣길을 매일 함께 나섰다. “가다가 내가 픽 주저앉아 쪼그리고 있으면 언니가 ‘그러다 늦겠다’ 하는 거야. 그럼 내가 ‘아이고 언니 대리(다리)가 아파 못 가’ 했지. 그럼 얼른 와서 나를 업어서 데불고(데리고) 가요. 친구들이 나보고 ‘아이구 어리광쟁이야’ 하고 놀렸지.”

 동네의 귀염둥이로 자란 할머니가 열여섯이 되던 해, 평화롭던 마을엔 ‘처녀 공출’ 소문이 돌았다. “무서워서 한참 숨어댕겼어. 다른 마을에 엄마 아는 사람 집에도 가 있고. 근데 오래 돼서는 엄마 보고 싶어서 안 되겠더라고.” 할머니는 끌려가던 날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비 오는 날이었는데 누런 옷 입고 총을 찬 군인 하나랑 칼 찬 순사가 온 거야. 마침 집에 부모님도 없었어. 몸을 벌벌 떨면서 (영장을) 받아들고, 이를 덜덜 떨면서 따라나섰지.”

강 할머니가 곶감을 꺼내 놓는 모습. [김성룡 기자]

 기차를 타고 며칠인지도 모르게 한참을 달려 도착한 곳은 중국 선양(瀋陽). 그곳에서 다시 트럭을 타고 열서너 명의 소녀들과 지린(吉林)성 창춘(長春)의 한 위안소로 넘겨졌다. 월경도 하기 전이었던 할머니는 매일 일본 군인 여러 명을 받아야 했다. “무서워서 쪼그리고 있으면 군인이 들어와서 하라는 대로 안 한다고 두드려 팼어. 조금만 거석(※‘거시기’의 경남 방언)해도 막 때렸어. 뼈가 부러지고 고름도 찔찔 났다니까.”

 나이도 어리고 몸도 약했던 할머니는 고초를 버티지 못해 앓기 일쑤였다. 군인들을 상대하고 나서는 항상 소독 약물로 아래를 씻어야 했다. “소독을 아무리 해도 피가 나고 열이 펄펄 끓었어.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별수 있나.” 그러다 어느 해 늦봄, 할머니는 장티푸스 진단을 받았다. “처음엔 열나고 그래도 군인들이 들어왔어요. 그러다 이게 옮는다고 하니까 그때야 관계를 안 시키더라고.”

 몸은 아팠지만 군인들을 안 받아도 돼 할머니는 오히려 좋았다. 그것도 잠시, 위안소를 관리하던 일본인들이 전염병에 걸린 위안부들을 불에 태워 죽이기 위해 산으로 끌고 갔다. 어딘지도 모르는 산에 올라 ‘이제 죽는구나’를 되뇌던 할머니를 살려준 건 조선인 김○○이었다. “산에 장작을 놓고 막 태우려는데 위안소에서 일하던 김○○이 와서 방해를 하는 거요. 그때 갑자기 초신(짚신) 신고 조선옷 입은 사람들이 몇 명 내려오더니 나랑 한 여자를 데리고 도망갔어. 알고 보니 독립군이었어.”

 그들은 할머니를 치료해주고 인근 동굴에 지낼 곳을 마련해줬다. 얼마 안 있어 해방이 됐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할머니는 동굴에서 나왔다. 하지만 고향 가는 길은 멀었다. 할머니는 지린성으로 갔다. 22세 때였다. 이후 30여 년 동안 간호사로 일했다. 결혼도 하고 자식도 낳았다. 경상도 사투리도 잊을 만큼 긴 세월이 흐른 1997년, 고국 땅을 다시 밟았다. 하지만 이미 부모님과 언니·오빠 모두 세상을 떠나고 집터만 휑하니 남아 있을 뿐이었다.

 할머니에게 지금도 가장 맛있는 음식은 곶감이다. 어릴 적 일하고 밤늦게 들어온 아버지는 막내딸 머리맡에만 곶감을 놓아뒀다고 한다. “잠결에 부스럭대서 깨보면 아빠가 곶감을 놓고 가신 거야. 그럼 안 자고 야금야금 먹었지.” 지금도 가족이 생각날 때마다 곶감을 찾지만 그리운 마음은 채울 길이 없다.

“고향 생각이 너무 나면 마음을 돌려야지 싶어서 먹는 걸 멈춰요. 그런 날은 잠을 못 자. 꿈에서라도 엄마 아빠를 못 볼 거 아냐….”

 할머니는 말하는 내내 휴지로 눈물을 훔치느라 손을 자주 얼굴로 가져갔다. 순간 할머니의 손톱에 곱게 칠해진 붉은 매니큐어가 눈에 밟혔다. 양손에 알이 큰 반지도 4개나 있었다. ‘손이 참 예쁘시다’고 했다.

 “한창 멋 부릴 소녀 시절 위안부로 끌려가 제대로 꾸며보지 못한 게 한이라 이제라도 항상 매니큐어도 칠하고 반지도 끼고 해보는 거지. 한창 꽃다워야 할 때 나는 꽃답지 못해봤잖아. 예쁘다고 해줘서 고맙네.”

쑥스러워하며 웃는 강 할머니의 얼굴에서 70여 년 전 일출이가 보였다.

광주=김선미 기자 calling@joongang.co.kr
사진=김성룡 기자

중앙일보가 창간 50주년, 광복 70주년을 맞아 위안부 피해 할머니 13인의 릴레이 인터뷰를 연재 중입니다. 할머니들은 자기 생의 끝자락을 버티게 하는 소중한 대상을 하나씩 소개했습니다. 이번 영상은 온라인 중앙일보(https://www.joongang.co.kr)와 QR코드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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