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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회 미당·황순원문학상] 본심 후보작 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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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쉼없이 중얼거리다, 들끓는 내면
시 - 김이듬 ‘호명’ 외 27편

무익한 천사

무릎이 없었다면 무엇을 안았을까 체온이 떨어지면서 비가 퍼붓는다 나는 혼자 입원하고 혼자 죽어 퇴원할 사람 옆으로 누워 쓴 글은 싣지 않는다 병마의 관할구역은 일평생이겠으나 한순간이 평생보다 길어서 나는 창가로 침상을 옮겨달라고 했다 보이는 건 북쪽 가막살나무 숲

나는 종일 누워서 음탕하고 나태한 생각에 사로잡힌 신과 같았는데
엎어놓은 밥그릇 아래 숨 막혀 죽은 벌레를 치우듯
나는 나를 관장하려 한다

천사가 왔다 학교가 너무 가까워서 매일 지각하던 친구 같다 어디선가 거의 무음에 가까운 채터링 로리 울음소리가 들렸다
“왜 이제 왔니? 찢어진 비닐봉지처럼 까마귀를 뒤집어쓰고, 이 변덕쟁이야”
“널 개량하고 괜찮은 걸 파종하자 가령 코르딜리네 씨앗 같은 거”
“그런데 어디서 왔어?”
“저 동산 죽은 나무에서 날아왔지”
“죽은 나무를 떠나도 되나?”

붉은 발의 천사는 언제나 어딘가 아팠으므로 한순간은 어둠 속에서만 살아있는 내장 같이 너무 길게 느껴졌다 나는 일부러 길게 쓴다 끊어서 너의 편의를 봐주고 싶지 않아 엎드려서 책을 보면 뒤에서 목을 길게 늘어뜨리고 거북이들이 들어왔지만 동시에 즐길 수 있었지만 철 모형에 구두를 끼우고 쾅쾅 망치로 처대는 할아버지의 딸로 찾아가지 않는 신발처럼 많은 나날을 맨발의 천사로 살았다

“우리가 만난 날이 오늘이 아니라 내일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친구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갔다 엘살바도르 커피를 마시고 싶다 적도 부근으로 간다면 적기가 있을까 네가 재밌어할까봐 얼른 끝내자 우리는 밤과 낮처럼 어긋나고 다음에 봐 너는 유월의 수국동산으로 돌아가고 그러나 나는 병원 뒤에서 이월에 개장할 매화공원을 맴돌겠지

김이듬(46·사진)의 시에는 천(千)의 얼굴이 들어 있는 듯하다. 작품의 주연들만 해도 어린 소녀, 임신한 여자, 사랑에 빠진 여자(남자), 사실상 죽은 사람 등이지만, 개별 작품들 안에서도 다중인격의 내부가 그렇듯 음색과 층위가 다른 목소리들이 경쟁한다.

 그래서일까, 김이듬의 시는 서정적 풍경이 없지 않은 채로 어림잡기 어려울 만큼 까다로울 때가 많다. 거친 말과 비문을 두려워하지 않고 상념의 질주를 보이기도 한다. 이 시인은 세련된 표현이나 안온한 서정, 그리고 그것으로 얻어지는 시의 안정된 형식에는 큰 관심이 없는 듯하다. 착란의 기미가 배어나는 히스테리컬한 다변, 격렬하되 몽롱한 구어와 대화, 행간의 비약들을 방법적 정신분열이라 말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화자라 알려진 인물의 통상적인 목소리를 중지시키고 어떤 낯선 목소리들이 얼굴을 드러낼 때 작품의 시적 긴장이 높아지는 듯하다.

 이 분열적인 목소리는 세계를 낯설게 대면하게 되어 있는 인격 자체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어린 시절의 분리불안이든 성숙기의 혼란이든 상처와 불행의 기억들이 시의 에너지원이 되는 것 같다. 주목할 것은, 이것을 시화(詩化)하는 과정에서 시인이 제 의식을 뒤로 물려 비우는 데 능숙하다는 점이다. 솔직하다고밖에 달리 말하기 어려운 이 수용력에 힘입어 고통스런 기억들은 혼란을 지닌 채로 시에 등장해 역동적인 무대를 연출한다. 그 결과로, 우리는 통속적이고 관능적이면서도 저항성을 잃지 않는 특이한 여성성을, 상식과 규범을 넘어 의문으로 들끓는 내면을 마주하게 된다.

 최승자나 김언희가 투사라면 김이듬은 장사(壯士) 같다. 기질적으로 힘이 세다. 그녀는 쉼 없이 되는 말과 안 되는 말을 중얼거리고, 시에선 잘 소화될 것 같지 않은 체험과 심리와 사건들을 거침없이 끌고 들어온다. 이러한 개성이 그녀를 다른 여성 시인들과, 그리고 다른 시인들과 구별되는 자리에 놓이게 하는 듯하다.

이영광 (시인) 

◆김이듬=1969년 경남 진주 출생. 2001년 계간 ‘포에지’로 등단. 시집 『별 모양의 얼룩』 『명랑하라 팜 파탈』 『말할 수 없는 애인』 『베를린, 달렘의 노래』 『히스테리아』. 장편소설 『블러드 시스터즈』.

자신과 영원히 이별하는 시간 2년
소설 - 권여선 ‘이모’

죽음이란, 살아남을 자들과의 이별이기 이전에 나 자신과의 이별이다.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자기 존재가 타인에게 잊히는 일도, 비밀스런 삶의 영역들이 내 통제를 벗어나 노출되는 일도 아닐지 모른다. 평생을 관찰하고 느껴온 나 자신과 영원히 이별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두려운 일 아닐까.

 “이모의 삶이야말로 가장 간단히 요약될 수 있는 삶이 아닐까”라고 말하는 권여선(50·사진)의 ‘이모’는 암투병중인 ‘윤경호’에 대해 말한다. 이십대부터 쉰 중반까지 가족을 부양하느라 결혼도 못한 채 신용불량자로, 비정규직으로 늙어온 그녀는 죽기 직전 2년간 온전히 자신만의 삶을 살 수 있었다. 외부와 절연된 채 책만 읽으며 보낸 시간들은, 비록 최저 생활비로 유지되는 절제의 생활이었을지언정 생의 의지로 빛나는 시간들이었다. 그 시간 끝에 죽음을 앞둔 그녀는 조카며느리에게 지난 삶의 내밀한 장면들을 말해본다. 대체로 알 수 없이 화가 났던 순간들이다. 불행했던 삶에 대한 회한을 토로하는 것일까. 그렇게 단순히 말할 수는 없다. 스스로가 기억하는 자신의 한평생은 그리 ‘간단히 요약될’ 것은 아니므로. 어쩌면 그녀는 기억에서 잊히지 않은 지난 삶의 불가해한 장면들을 복기하며 자신에게 이른 애도를 표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모든 삶은 죽음을 향한다. 우리는 모두 자신과의 영원한 이별을 준비하며 살고 있다. 때문에 삶과 죽음은 결국 “무섭고 서러운 감정”으로밖에는 설명될 수 없다. 그러니, 나 자신에게 온전히 집중해볼 시간도, 자신과의 이별을 서서히 준비할, 즉 스스로를 애도할 기회조차 얻지 못한 돌연한 죽음들은 얼마나 애통한가. 이런 생각마저 들게 하는 소설이다.

조연정 (문학평론가) 

◆권여선=1965년 경북 안동 출생. 96년 상상문학상으로 등단. 소설집 『처녀치마』 『분홍 리본의 시절』 『내 정원의 붉은 열매』. 장편 『토우의 집』. 오영수문학상·이상문학상·한국일보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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