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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배워서 인생 이리 기구한가 … 돈 생기면 장학금 줬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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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군자 할머니는 “나 쓰려면 돈이 아까운데 기부하는 건 하나도 안 아깝다. 옷은 냄새 나지 않을 만큼만 갖추면 되고 먹고 자는 건 여기(나눔의 집)에서 해주니까 됐다”고 말했다. [광주=김성룡 기자]

중앙일보가 창간 50주년, 광복 70주년을 맞아 위안부 피해 할머니 13인의 릴레이 인터뷰를 연재합니다. 할머니들은 자기 생의 끝자락을 버티게 하는 소중한 대상을 하나씩 소개했습니다. 인터뷰 영상은 온라인 중앙일보(https://www.joongang.co.kr)와 QR코드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나는 그냥 심부름 가는 줄 알았지.”

 지난달 22일 경기도 광주시 나눔의 집에서 만난 김군자(89) 할머니는 위안소로 가던 날을 그렇게 기억했다. 맨손으로 집을 나선 것이 할머니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김 할머니는 자신의 생을 ‘기구한 삶’이라고 표현했다.

 세 딸 중 장녀로 태어난 할머니는 열 살 때 아버지를, 열세 살 때 어머니를 잃었다. “가난하고 먹고살기가 너무 어려우니까 셋이 다 흩어졌지. 막내는 남의 집에 주고 둘째도 남의 집 보내고…나도 최○○라고 강원도 철원의 순경 집에 수양딸로 들어갔지. 그 집 가면 호강하고 좋다고 해서….”

 할머니는 그 집에서 가슴을 설레게 하는 남자를 만났다. 위안부로 끌려가기 직전 양아버지와 함께 살던 집에 자주 드나들던 청년이었다. “한 1년 댕기고 하니까 알게 됐어. 손목 잡고 하는 것까지는 없었고 좋아만 했지.” 하지만 둘의 사랑은 순탄치 않았다. 남자 집에서 반대한 탓이다. “옛날에는 집에서 어른들이 그러면 맘대로 못 하잖아. 왜 그랬는지 사귀지 말라고 나를 타박하는 거야.” 청년은 집안 어른의 강요로 다른 여자와 결혼했다.

 열여섯 살이 되던 해 할머니는 위안소로 끌려갔다. 검정 치마에 연두색 저고리를 입고 군복 입은 남자를 따라나섰다. “돈 버는 데가 있으니 가보고 돈을 못 벌 것 같으면 다시 오라”는 양아버지의 말이 집을 떠나며 들은 마지막 인사였다.

 화물차를 타고 하루 밤낮을 꼬박 달린 뒤 다시 트럭으로 갈아타고 한참을 가서 도착한 곳은 ‘긴카쿠 위안조’라고 불리는 중국 지린성 훈춘의 위안소였다. 막 생리를 시작한 소녀는 평일에는 장교를 받고 주말에는 일반 군인을 받아야 했다.

 “한 명씩 오는 사람 없지. 조를 짜서 트럭 타고도 오고 걸어서도 오고. 그럼 방마다 바글바글 서서 기다려. 100명씩 밖에 있어.” 도망은 엄두도 못 냈다. "도망가려다 붙잡혀서 죽도록 두드려 맞더라고. 감시가 얼마나 심한지… 그때 생각하면 지겹고 슬프고 진절머리가 나.”

 가장 안타까운 건 청력을 잃은 일이다. 할머니는 “처음 들어온 사람이 장교였는데 일본말을 못 알아들으니까 귀퉁배기를 후려쳐서…고막이 터져서 내가 지금 귀가 안 들린다”고 했다.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한 탓에 지금까지도 오른쪽 귀로만 듣는다.

김 할머니가 지난해 12월 받은 국민훈장(동백장). [광주=김성룡 기자]

 1945년 해방이 왔지만 그게 무슨 얘기인지 몰랐다. “가고 싶은 곳으로 가라”는 위안소 관리자의 말이 할머니에겐 ‘해방’이었다. 위안소 친구 일곱 명과 백두산을 거쳐 두만강을 건넜다. 집을 떠났을 때처럼 돈 한 푼 없는 단벌 신세였다.

 “뭘 먹었는지도 몰라. 처마 밑에서도 자고 빈 집에 들어가서도 자고 했어. 완전히 거지였지.” 회령으로 건너와 화물차를 타고 철원까지 왔지만 자신을 버린 양아버지에겐 가지 않았다. 길을 걷다 첫사랑과 마주쳤다. 그는 징용을 다녀왔다고 했다.

 머물 곳이 없는 고향을 등지고 남쪽으로 내려와 절을 찾아다녔다. "내가 너무 기구한 운명이라 이게 왜 그런가 궁금해서 절에 댕겼어. 기도하면 알 수 있을까 하고. 깨칠 수 있을까 하고.” 할머니는 30여 년 절을 다니고 이후에는 8년간 신흥종교에 몸을 담았다. 그러다가 97년 부활절 영세를 받고 천주교 신자가 됐다. 지금까지 ‘요한나’로 살아왔다.

 여러 종교를 전전했지만 왜 그리 기구한 운명을 타고났는지는 알아내지 못했다. 평생 혼자 살면서 닥치는 대로 일해야 했다. 할머니는 “식모살이도 하고 강릉에서 빵 장사 하고… 남가좌동에서 미제 물건 장사 하고 세관에서 자꾸 털어가니까 옷 보따리 장사를 했어. 평화시장에서 물건 떼다가 삼척에 팔고. 그러다가 힘들면 또 식모살이 하고 그랬다”고 했다.

 김 할머니에게 기구한 삶을 버티게 해준 힘이 뭐냐고 물었다. 잠시 말이 없던 할머니는 침대 아래쪽에 켜켜이 쌓인 이불에 손을 밀어넣어 파란 상자를 꺼냈다. 지난해 12월 청와대에서 받은 ‘2014 국민추천포상’ 국민훈장(동백장)이었다. 누가 가져갈까 봐 고이 넣어둔 모양새다. 2000년 8월 아름다운 재단에 5000만원, 2006년에 6000만원, 지난해 인근 성당에 1억원을 장학금으로 기부한 할머니에게 정부가 보내준 감사 인사였다.

 할머니는 장사하며 모은 돈에 매달 지원되는 정부 보조금을 차곡차곡 모아 모두 내놨다. “나는 야학에서 8개월밖에 공부를 못해 봤어. 어려서 부모를 잃고 못 배운 탓에 삶이 이렇게 힘들었나 해서… 조금이라도 배웠으면 그렇게 힘들진 않았을 텐데… 가난하고 부모 없는 아이들이 배울 기회만이라도 갖도록 돕고 싶었지.”

지금까지 자신을 위해 돈을 쓴 적이 없다고 했다. 98년 나눔의 집에 들어온 후 돈을 모으고 그 돈으로 공부하는 아이들을 보는 재미로 살아왔다는 얘기다.

 할머니는 “이제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어. 통장에 남은 돈 없어. 0원”이라고 말했다. ‘열심히 모은 돈을 다 주고 나면 허전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할머니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내가 우리 아버지 나이(51세 사망)하고 어머니 나이(29세 사망)를 합한 것보다 열 살을 더 먹었어. 20년 전에 큰여동생도 갔고 올해 1월에 막내도 갔고 나 하나 남았어. 이제 죽는 날까지 곱게 있다가 갔으면… 바라는 건 그뿐이야.”

광주=채윤경 기자 pchae@joongang.co.kr
사진=김성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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