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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이 상해에 반란정부 조직” … 총독부, 임정에 위기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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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임시정부는 중국 충칭(重慶)에서 광복을 맞았다. 1945년 11월 3일 환국에 앞서 태극기를 들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앞줄 왼쪽 넷째가 임 정 마지막 주석인 김구 선생. 임 정은 환국 뒤에도 박찬익을 대표로 하는 주화대표단을 남겨 한국민의 귀국을 도왔다. [사진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일제는 임시정부의 외교활동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당시를 기록한 문서들을 보면 일제가 임정의 외교활동을 ‘눈엣가시’로 여긴 사실이 군데군데 드러난다.

 1921년 1월 2일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이 일본 외무성 외무차관에게 보낸 문서.

 “이른바 대한임시정부 법무총장이자 국무총리인 신규식은 불령(不逞)한 조선인 10여 명과 광둥(廣東)에 도착해 중국 남방정부의 환영을 받았다. 불령한 조선인들이 과격한 행동을 하지 않는 한 단속을 단행하기 어렵고(중략)”. 임시정부 인사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국사편찬위원회가 펴낸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과 독립기념관이 공개한 외교문서 등에 따르면 일제는 특히 상하이에 임시정부가 수립된 1919년부터 1920년대 중반까지 임정 활동을 집중 감시했다.

 1919년 10월 14일 밥스트 주일 프랑스 공사가 조선총독인 사이토 남작을 만난 뒤 본국에 보낸 보고서에는 일제가 임정에 대해 수집한 정보가 들어 있다. “그들의 정보에 따르면 한국 이민자들이 명실상부한 반란 정부를 상하이 프랑스 조계 내에 조직하는 데 성공했다. 그들이 정보를 보충한 뒤 우리에게 이 암약하는 정부의 해산 혹은 인도를 요청할 것 같다.” 임정 수립 불과 6개월 뒤의 일이다.

 1919년 5월 15일 주상하이 프랑스 총영사관 직무대행 영사 윌덴이 주베이징 프랑스 전권공사 포프에게 보낸 보고서. “일본 측이 ‘심각한 범죄 용의자’라고 밝힌 한국인 3명에 대한 체포영장에 연서해달라고 요청이 왔다. 저는 달리 어떤 방도가 없어서 서명했지만 당사자들에게 비밀리에 위험을 알리도록 했다. 실제로 일본 형사들은 눈앞에서 사냥감을 놓치고 말았다.”

 임정 인사들은 상하이 시절 도움을 준 데 대해 주상하이 프랑스 총영사관에 찾아가 사의를 표했다. 1919년 10월 20일 윌덴 영사는 안창호를 만난 뒤 ‘제가 상대한 이들은 모두 한국의 명문가 출신들로 진정한 애국자이며 자신들의 목숨도 희생할 준비가 돼 있다’는 보고서를 남겼다. 안창호는 이날 일본이 체포하려는 임정 인사들의 명단을 윌덴 영사에게 전했다. 문서에 안창호는 스스로는 ‘광작’, 김구는 ‘둑구배’, 이동휘는 ‘이백’, 신규식은 ‘김재괄’이라는 가명을 쓴다고 적었다.

 1920년 6월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은 외무차관에게 “신채호를 주필로 하는 독립신문은 국가 부흥에 관해 격한 감회를 서술하거나 제국을 비판하는 허무맹랑한 언설을 담고 있다. 임시정부 행동이 위험한 수준에 이르렀다는 것을 증명하기에 충분하다”고도 보고했다.

◆특별취재팀=유지혜·안효성 기자, 왕웨이 인턴기자, 김유진·송영훈 대학생 인턴기자 wisep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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