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일제가 약탈·파괴한 문화재, 그 수난의 기록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9면

조선총독부 학무국 고적조사과 촉탁이었던 고이즈미 아키오가 1926년 경주 서봉총 발굴 중 드러난 금관을 촬영한 자료(위). 1918년 경기 이천향교 인근 폐사지에서 일본으로 반출돼 오쿠라문화재단에 소장 돼 있는 ‘이천 오층석탑’. [사진 국외소재문화재재단]

고미술 연구자들이 일제 강점기 한국 문화재의 수난과 그 환수를 논할 때 꼭 참고하는 책자가 있다. 미술사학자 황수영(1918~2011)이 1973년 펴낸 『일제기 문화재 피해 자료』다. 황 박사는 1950년대 말부터 8년 동안 한·일회담의 문화재 반환 분야 전문위원으로 활동하며 다양한 기록과 문헌을 모았고, 66년 회담 타결의 결과에 만족할 수 없자 후대에 도움이 될 자료집을 남겼다. 손으로 적은 메모 묶음 형식을 등사판으로 200부 찍어 정기간행물인 ‘고고미술’ 부록으로 배포한 탓에 중요한 내용임에도 일반 독자들 손에는 미치지 못했다.

 이 역사적 자료집이 42년 만에 반듯한 출판물로 나왔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국립중앙박물관 및 일본 ‘한국·조선 문화재 반환 문제 연락회의(이하 연락회의)’와 손잡고 증보판을 펴낸 것이다. 원본 체제를 따르면서도 인용 문헌의 앞뒤 내용을 폭넓게 번역하고 관련 유물의 도판과 해제를 추가해 일본이 한국 문화재 전반에 얼마나 큰 피해를 입혔는가를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현재 낙랑 부근에서는 백주대낮에 고분을 발굴하는데, 들은 바에 의하면 군 주재소에서 허가하였다 하며, (…) 매일 고물상에 판다고 하니, 해도 해도 잔혹하기 그지없습니다.”(102쪽)

 “교묘한 수단으로 도굴을 한 자가 과거 8년간만 해도 약 100기에 가까운 고분을 파헤쳤다고 상상할 수 있다. (…) 이 파괴를 대신할 수 있는 학술적인 성과를 내지 못한다면, 그 죄를 보상하고 새롭게 건설하는 것 역시 불가능하고(…) 출판물을 수반하지 않는 유적의 발굴은(…) 하나의 죄악이다.”(87쪽)

 10장 190항목에 걸쳐 낱낱이 고발된 유물 파괴와 반출의 실상은 어이가 없을 정도다. 조선총독부와 연구기관, 개인들 손에 의해 도굴된 수많은 사례는 황 박사 표현대로 “악독한 약탈은 인류 역사상에 다시 그 유례가 없는 것”이다.

양산 부부총 출토 유물은 ‘조선고적연구회’에 의해 도쿄국립박물관에 기증돼 오늘날까지 버젓이 소장되어 있다. 김해 회현리 패총과 평양 석암리 205호분은 발굴된 뒤 보고서 작업이란 허울로 일본으로 유물을 가져간 뒤 반환하지 않았다.

 아예 유물을 파괴하거나 다른 곳으로 옮긴 예도 많다. 조선총독부는 1940년대 이후 ‘국민의 사상 통일에 지장이 있다’는 이유로 항일 전적비나 공훈비를 철거해 박물관으로 옮기거나 현지에서 폭파했다. 황산대첩비, 해인사 사명대사비 등이 사라진 까닭이다.

 이번 발간의 동력이 된 연락회의의 이양수 간사는 “이 자료를 향후 어떻게 다루어 쓸 것인지, 여기에 게재되어 있는 내용이 무엇을 나타내고 있는지, 이 자료집을 손에 든 독자가 결정할 몫”이라고 말했다. 황 박사 생전에 곁에서 이 자료집의 발간을 지켜본 정영호 한국교원대 명예교수는 “약탈문화재의 반환을 강력히 촉구하였던 황수영 선생은 일제의 잔학상에 분노를 금치 못하여 졸도한 적도 있었으며, 혈압 병이 생겨 평생 고생하였다”고 돌아봤다. 연락회의는 이 책의 일문판을 11월 일본에서 출간할 예정이다.

정재숙 문화전문기자 johanal@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