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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도한 야생 곰·여우, 웅장한 맥킨리봉 … 말이 필요없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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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을 애타게 기다렸다. 저 멀리 북방, 알래스카에 가면 여름에만 허락된 풍경이 있어서다. 긴 겨울을 이겨낸 동토(凍土)의 생명은 다시 돌아올 긴 겨울을 살아내기 위해 짧은 여름을 바쁘게 보낸다. 알래스카에서 20년 이상 야생사진을 찍은 일본 사진작가 호시노 미치오(星野道夫)는 “알래스카에서 생명은 오직 자신을 위해 존재한다. 그 숭고함이 우리를 흥분시킨다”고 말했다. 지난달 초, 알래스카 중부에 있는 디날리 국립공원을 찾았다. 미국의 많은 국립공원이 ‘야생동물의 천국’으로 불린다. 그러나 디날리를 여행하고 나면, 다른 국립공원에서 이 수식어를 거둬야 할 것만 같다. 아니, 어떤 수식어도 거추장스럽다. 디날리는 그냥 야생이다.

온종일 환한 여름 알래스카


북미 최고봉 맥킨리봉(6194m)을 품은 알래스카 디날리 국립공원. 초록 융단을 덮어쓴 툰드라 대지 위로 맥킨리봉이 뭉게구름처럼 피어올랐다.

페어뱅크스 공항에 착륙한 시간은 오후 11시 반. 야심한 시각인데 공항은 북새통이었다. 렌터카를 찾으러 공항 밖으로 나갔다. 순간 머릿속에 물음표와 느낌표가 교차했다. 대낮처럼 밝아서였다. 다시 시계를 보니 시침과 분침이 숫자 ‘12’에 겹치기 직전이었다. 여름 알래스카의 백야(白夜)에 대해서 들어는 봤지만 직접 겪으니 어리둥절했다. 공항에서 만난 페어뱅크스 관광청 직원의 말이 흥미로웠다. “알래스카의 짧고 화려한 여름을 마음껏 즐겨두라고. 하지(夏至) 이후로 하루에 6분씩 낮이 짧아지고 있으니까.” 숙소에 도착해 커튼을 꼭 닫고 잠을 청했다. 알래스카에 머문 일주일, 시차보다 적응하기 힘든 건 백야였다.

이튿날 차를 몰고 디날리(Denali) 국립공원으로 향했다. 1917년부터 80년까지 이곳의 이름은 ‘맥킨리 국립공원’이었다. 북미 최고봉 맥킨리봉(6194m) 일대가 국립공원이었다. 1980년 지금 규모로 공원이 확장되면서 디날리로 이름이 바뀌었다. 디날리는 ‘가장 높은 것’, 곧 맥킨리산을 일컫는 알래스카 원주민의 말이다. 긴긴 세월 불렸던 산의 이름을 되찾아 준 것이다. 미국 정부는 국립공원 이름을 원주민에게 양보했지만, 북미 최고봉의 이름은 25대 대통령(윌리엄 맥킨리)의 이름을 그대로 남겼다. 참고로 알래스카(Alaska)는 러시아어다. 알라샥(Alakshak)이라는 알래스카 원주민 말이 러시아어로 바뀐 것이다. 18세기부터 알래스카의 일부를 점령한 러시아는 1867년, 단돈 720만 달러에 알래스카를 미국에 팔았다. 저 산은 말 없이 수만 년을 살았는데 인간의 역사만 어지럽다.

오후 6시 즈음 공원 입구에 닿았다. 아무리 백야라지만 국립공원 안으로 들어가기엔 무리였다. 버스 막차 시간이 이미 지났다. 대신 공원 밖에서는 다양한 레저를 즐길 수 있었다. 래프팅 업체의 사무실을 찾아갔다. 한데 비가 멈출 생각을 않는다. 국립공원을 가로지르는 네나나강 물살이 보통이 아니었다. 내심 겁이 났다. 상류로 올라가 미국 각지에서 온 관광객 5명과 함께 배를 탔다. 비바람 맞으며 거친 물살 속에서 균형을 잡느라 진이 다 빠졌다. 몰골을 보니 비 맞은 생쥐 꼴이다. 한국의 한탄강이나 내린천이었다면 배를 띄우지 않았을 것이다. 가이드는 “이 정도면 나쁜 날씨가 아니었다”고 말했다. 과연 시작부터 ‘와일드’한 알래스카였다.

하루에 산딸기 2000개 따 먹는 곰

디날리의 속살을 만나는 날이다. 디날리는 미국의 여느 국립공원과 달리 차량 진입이 제한적이다. 입구에서 24㎞ 거리에 있는 새비지 체크 스테이션(Savage check station)까지 개인 차량이 들어갈 수 있고, 더 안으로 들어가려면 국립공원이 운영하는 관광버스나 셔틀버스를 타는 수밖에 없다. 1980년 제정된 법에 따라 엄격하게 자연을 보호하고 있어서다. 다시 공원의 정확한 이름을 살핀다. ‘디날리 국립공원&보존지구(Denali national park&preserve)’다.

버스는 공원을 동서로 가르는 단 하나의 도로를 오간다. 관광버스 4종류 중 왕복 8시간의 툰드라 윌더니스(Tundra wilderness)가 인기다. 알래스카 관광청에서도 이 프로그램을 추천했는데, 버스 탑승장에서 생각을 바꿨다. 약 20㎞ 더 안쪽으로 운행하는 셔틀 버스를 탔다. 이유는 단 하나. “깊이 들어갈수록 야생동물을 만날 확률이 높다”는 국립공원 직원의 설명이 있었다. 동물이 주로 출몰하는 저녁시간을 노려 오후 2시 버스를 탔다.


디날리는 말 그대로 동물의 왕국이다. 다람쥐 사냥에 성공한 붉은여우.

전문 해설사는 아니었지만 셔틀버스 기사도 공원의 역사와 생태에 대해 틈나는 대로 설명했고, 동물이 출현하면 어김없이 버스를 세웠다. 가장 먼저 만난 건 입에 다람쥐를 문 붉은여우였다. 사냥에 성공한 걸 재는 듯 녀석은 도도한 걸음으로 버스 주변을 어슬렁댔다.


산딸기를 따먹고 있는 그리즐리 곰. 알래스카에서 가장 무서운 동물이다.

디날리에 사는 포유류 39종 중 가장 무서운 녀석은 그리즐리 곰이다. 약 300마리가 공원 안에 사는데, 버스 종점인 아일슨 방문자 센터 근처에서 한 마리를 만났다. 다른 국립공원에서도 많이 봤지만 눈빛과 발톱까지 또렷할 정도로 가까이서 본 건 처음이었다. 모든 관광객이 산딸기를 따 먹는 녀석을 숨죽이며 관찰했다. 침 넘어가는 소리까지 조심스러웠다. 버스기사는 “그리즐리는 하루에 산딸기 2000개를 따먹는다”고 설명했다.


디날리에서 하이킹을 하던 중 만난 무스 어미와 새끼. 사슴과 동물인데 덩치는 말만하다.

아일슨 방문자센터는 맥킨리봉을 볼 수 있는 명당이다. 그러나 안개가 잔뜩 끼어 10m 앞도 보이지 않았다. 아쉬움을 삼킨 채 버스에 올랐다. 공원 입구로 돌아가는 길에도 산양·무스(말코손바닥사슴) 등 여러 야생동물을 봤다. 오후 10시가 다 되어 공원 입구에 도착했다. 8시간이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한시도 졸 틈을 허락하지 않은 자연의 힘이 놀라웠다.

북미 최고봉에 압도당하다

디날리 국립공원의 하이라이트는 야생동물을 보는 것 말고 하나 더 있다. 겨우내 얼었던 대지가 초록 융단을 덮어쓴 모습, 즉 툰드라(Tundra)를 감상하는 것이다. 툰드라는 북위 60도 이상에서만 볼 수 있는 지형으로, 여름철 서너 달을 빼고는 식물이 살 수 없어 ‘북방의 사막’이라고도 한다.

버스 투어로는 성이 차지 않아 이튿날 다시 디날리를 찾았다. 툰드라의 웅장함을 두 발로 느끼고 싶었다. 수많은 트레일 가운데 국립공원 직원이 추천한 새비지강 주변의 3.2㎞ 트레일을 걸었다. 오전 5시 30분인데도 환했다. 세차게 굽이치는 물소리와 새 지저귀는 소리가 적막한 대지를 가득 메웠다. 강가와 길섶에는 온갖 야생화가 햇볕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미물들도, 짧아서 소중한 여름을 요란스럽게 맞고 있었다.

공원 입구로 돌아오는 길, 멀리 지평선 위로 커다란 뭉게구름이 피어올랐다. 눈을 씻고 다시 쳐다봤다. 구름이 아니라 맥킨리다. 발치에는 분홍 야생화, 바로 앞에는 침엽수 우거진 숲, 뒤로는 융단 같은 툰드라, 그 너머에는 풀 한 포기 없는 돌산, 그리고 가장 멀리 하얀 가운을 덮어쓴 맥킨리가 한눈에 들어왔다. 한동안 말이 나오지 않았다.

공원 입구 상점에는 ‘30% 클럽’이라 쓰인 기념품이 많았다. 디날리를 찾은 사람 중 30%만이 맥킨리를 본다는 뜻이다. 공원을 나가는 길, 기분 좋게 티셔츠 한 벌을 사 입었다.


만년설 덮인 맥킨리봉. 타키트나에서 경비행기를 타고 봉우리 가까이 다가섰다.

맥킨리를 더 가까이 보기 위해 국립공원 남쪽 타키트나(Talkeetna)로 향했다. 타키트나는 맥킨리 등정에 도전하는 산악인의 베이스 캠프이자 경비행기 관광의 거점이다. 다국적 관광객 10명과 함께 비행기에 올라탔다. 출발 20분 뒤 비행기가 구름을 뚫고 산 속을 파고들었다. 거짓말 같은 풍광이 펼쳐졌다. 만년설 덮인 봉우리 수백 개가 저마다 위용을 뽐내고 있었고, 계곡에는 빙하가 쓸고 간 자리가 고속도로처럼 닦여 있었다. 비행기는 맥킨리 봉우리 주변을 빙빙 돌았다. 북미 최고봉은 과연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해발 1200m의 루스 빙하에 잠시 착륙했다. 맥킨리 정상에 비하면 낮은 곳이었지만, 새하얀 눈 천지였다. 빙하 위는 고요했다. 이렇게 완벽한 고요는 난생 처음이었다. 지금까지 가슴에 깊이 남은 건 북미 최고봉이나 야생동물보다 그 ‘새하얀 적막함’이다.

●여행정보=알래스카로 가는 직항편은 없다. 여름에 인천∼앵커리지 전세기가 몇 차례 뜬다. 시애틀을 경유하는 게 가장 일반적이다. 디날리 국립공원은 앵커리지보다 페어뱅크스가 더 가깝다. 국립공원 버스는 이동거리에 따라 요금이 다르다.

셔틀버스는27.5~52.5달러, 가이드 해설과 간식이 포함된 관광버스는 80~175달러. 공원 안에 숙소는 없다. 캠프 사이트가 공원 내 6개 지역에있다. 이번에는 디날리 그리즐리 베어 리조트(denaligrizzlybear.com)에 묵었다. 공원 주변숙소는 5월에서 9월 사이에만 연다. 타키트나 경비행기(talkeetnaair.com)는 1인 205달러부터다. 빙하에 착륙하면 85달러가 추가된다. 디날리 국립공원(nps.gov/dena), 알래스카관광청(Alaska-Korea.com) 홈페이지 참조.


알래스카 여행에서 렌터카는 필수다. 허츠(hertz.co.kr)를 추천한다. 허츠는 ‘골드 플러스 리워드’ 회원이 되면 편하다. 영업소에 전용 카운터가 있고, 예약해둔 차를 카운터에 들르지 않고 바로 받아 갈 수 있다. 가입은 무료다. 세금·보험을 포함해 최신 SUV를 6일 672달러에 이용했다. 1600-2288.


알래스카 디날리 국립공원

글·사진=최승표 기자 spcho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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