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양선희의 시시각각

성범죄 교사들은 억울하다 ?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4면

양선희
양선희 기자 중앙일보
양선희
논설위원

한 고등학교의 교내 성범죄 문제로 연일 시끄럽다. 한데 “어쩌다 우리 학교가 이 지경이 됐냐”는 한탄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학교는 언제나 그랬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교내 성추행과 성희롱은 상시 존재했다. 여중에 다니던 1970년대에도 학생들 사이엔 교사 블랙리스트가 있었다. 한 교사는 아이들을 불러 얘기하며 상습적으로 손가락으로 가슴을 찔러댔다. 어떤 교사는 수업시간 중 예사로 학생의 브레이지어 끈을 잡아당겼다 활처럼 튕기곤 했다.

 한데 누구도 그들을 제지하지 않았고, 아이들은 거부하는 방법을 몰랐다. 당시 아이들은 이런 교사들을 ‘사이코’라고 불렀다. 그렇다고 내가 특별히 문제적 학교에 다닌 건 아니다. 여성들 모임에서 학창시절 얘기가 나오면 이와 비슷한 불쾌했던 기억들이 쏟아지곤 한다. 60~70대 선배들도 “당시에 성희롱이라는 개념만 알았더라도…”라고 할 정도다.

 교내 성추행이 언제부터 표면화됐는지 궁금해 과거 기사를 검색해봤다. 95년 한 건, 96년엔 몇 건이 짤막하게 나왔다. 그해 초등학교 교사(60)에게 성추행으로 징역형이 선고됐고, 서울 S중 교장의 성추행 사건이 불거졌다. 당시 S중 교장 사건과 관련해 ‘한국교원신문’은 “교육계 집단매도 아닌가”라는 제목으로 사건을 보도한 언론사를 성토하기도 했다. 당시만 해도 교육계는 뿌리 깊은 ‘관행’의 심각성을 몰랐던 걸로 보인다.

 어쨌든 교내 성추행이 표면화된 지 20년이 됐다. 한데 이를 대하는 방식은 제자리걸음이다. 문제를 제기해도 학교는 은폐하려 하고, 교육청도 대충 넘기려 하고, 가해 교사들은 억울함을 토로하고, 한편에선 “제자 귀엽다고 머리도 못 쓰다듬겠다”며 제자사랑을 곡해하는 세태를 한탄하고, 또 다른 한편에선 솜방망이 조사와 처벌로 성범죄가 반복된다고 비판한다. 그렇게 한번 호들갑을 떨고 논란이 잠잠해지면 학교에선 다시 성범죄가 반복된다. 20년 동안 그래 왔다.

 어째서 이렇게 질길까. 처벌만 강화하면 해결될까. 한데 한 신경정신과 전문의는 “성추행을 저지르는 사람들 중엔 자신의 행동이 성범죄인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되레 자신이 오해받는 피해자라며 진심으로 억울해한다”고 했다. 언젠가 어린 제자 가슴을 만진 한 교사가 “잘 자라는 게 기특해서”라고 했다는 말을 들은 적도 있다. 이들의 일부는 남에게 고통을 주며 즐거움을 느끼는 사이코패스적 기질도 있지만 인간에 대한 이해와 관계의 기술이 부족하거나 잘못된 가치관 때문인 경우도 많다는 것이다.

 한 예로 여성과의 신체접촉을 친근감의 표시라고 우기는 가해자들은 ‘심리적 거리’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단다. 사람마다 상대가 어느 이상 가까이 오면 거부감을 느끼며 경계심을 갖게 되는 심리적 거리가 있다. 물리적 거리를 조사해보니 미국에선 120㎝, 일본에선 90㎝ 안으로 들어오면 경계심을 느낀다는 결과도 있다.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여성이 남성에게, 약자가 강자에게 느끼는 심리적 거리는 더 멀다. 조직에선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느끼는 심리적 거리가 직책 단계마다 제곱에 비례해 멀어진단다. 자신의 친근감 표현을 상대가 횡포로 느낀다면 이 거리를 침범했기 때문이다. 친한 동료라도 정서적 교감이 없는 사람에게 몸을 들이대는 건 작게는 상대의 스트레스 유발, 크게는 범죄가 된다는 말이다.

 요즘 조직마다 성폭력 예방 교육을 한다. 성범죄 사례를 열거하고, 어떤 벌을 받는지 아무리 강조해도 성범죄는 일어난다. 타인의 신체에 접촉하는 건 그의 ‘거리’를 침략하는 범죄행위라는 인간에 대한 근본적 이해 없이 엄포만으론 성범죄를 뿌리뽑기 어렵다는 얘기다. 또 자신의 잘못을 모르는 사람들은 처벌을 해도 이에 상응한 효과를 거둘 수 없다. 이젠 차분히 원인을 따져 원인별 대응책을 마련해야 한다. 인간 심리를 이해하는 방법과 예절, 상호존중 문화 등을 차근차근 가르치는 것도 그중 하나가 될 거다.

양선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