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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온 힘을 다해’의 야만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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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이상언
사회부문 차장

권력의 은밀한 작업을 폭로하는 인터넷 사이트 ‘위키리크스’를 만든 줄리언 어산지(44)는 3년2개월째 런던의 에콰도르 대사관에서 살고 있다. 호주 국적의 그는 스웨덴 사법당국의 추적을 피해다니다 에콰도르 정부가 망명 허용을 선언하자 그곳으로 잠입했다. 그 뒤 대사관 주변에는 영국 경찰이 배치됐다. 대사관 밖으로 나오면 곧바로 그를 체포해 스웨덴으로 넘겨주기 위한 일이다. 그가 대사관 은신생활에서 벗어나려면 자수하거나, 경찰의 감시망을 뚫고 다른 곳으로 도주거나 이 두 가지뿐이다.

 스웨덴 검찰이 그를 쫓는 이유는 중대범죄 용의자이기 때문이다. 그의 혐의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스웨덴으로의 잠입을 도와준 여성 A에 대한 성폭행이다. 5년 전 요맘때인 2010년 8월 11일 그는 스톡홀름의 사회운동가인 A의 아파트에 머물게 됐다. 이틀 뒤 어산지와 A는 밖에서 저녁을 함께 먹고 아파트로 와 성관계를 가졌다. 지금까지 알려진 A의 진술에 따르면 그가 문제 삼고 있는 부분은 관계를 끝내고 보니 피임도구가 파손된 상태였다는 것이다. A는 어산지가 고의적으로 훼손시킨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고, 어산지는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라고 항변하고 있다.

 둘째 혐의는 스웨덴의 다른 여성 사회운동가 B에 대한 성폭행이다. 스톡홀름에 온 지 나흘째가 된 날 그는 한 세미나장에서 B를 만났고, 둘은 다음 날 함께 영화를 보고 B의 집으로 갔다. 한 차례 성관계를 가진 뒤 잠이 들었는데 어산지가 B가 잠에서 깨지 않은 상태에서 다시 성행위를 한 것이 문제가 됐다. B는 두 번째는 자신이 합의한 적이 없는 일이며 더군다나 피임도구까지 사용하지 않았다며 경찰에 고소했다.

 두 건 모두 ‘성적 자기 결정권’에 중대한 침해가 있었다고 보는 것이 스웨덴 사법당국의 판단이다. 어산지는 자신을 눈엣가시로 여기는 미국의 음모가 작용한 정치적 사건이라고 주장하지만 인권에 대한 생각이 남다른 북유럽적 시각에서 보면 그는 명백한 범죄 용의자다.

 어산지의 일을 다시 떠올린 것은 심학봉 의원 사태 때문이다. 한국 경찰은 피해를 신고한 여성이 2차 진술에서 “온 힘을 다해 거부하지는 않았다”고 말을 바꾸었다는 이유로 무혐의 의견을 달아 사건을 검찰에 넘겼다. 강한 저항이 없었다면 성폭행이 아니라는, 참으로 간단한 논리다. 그 뒤에는 ‘여자가 호텔방에까지 찾아갔으면 할 말 없는 것 아니냐’는 야만적 생각이 깔려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든다.

이상언 사회부문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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