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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가쟁명:유주열]미완(未完)의 ‘암살’

중앙일보

입력

최동훈 감독의 영화 ‘암살’이 화제다. 일제 강점 시 조선주둔 일본군 사령관(조선사령관)에 대한 암살을 다룬 영화이다. 우리가 역사에서는 실제 경험해보지 못한 1930년대 경성(京城 서울) 한복판에서 결혼식을 무대로 집단 암살을 영화로 만들어 냈다. 평소 흔히 듣는 ‘암살’이란 두 글자의 의미가 영화를 통해 무겁게 닥아 와서 새삼스럽게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았다.
‘정치적 영향력을 가진 사람을 정치적 사상적 입장 차이를 동기로 해서 비합법적 방법으로 비밀리에 살해하는 행위. 영어로는 assassination. 이는 11세기 페르시아에서 소수정예 비밀결사대를 조직하여 이들에게 마약의 일종인 하시시(hashishin)를 주어 정부요인을 암살한 것에서 유래’
일제가 1905년부터 한반도를 강점하기 시작하면서 해방된 1945년까지 우리나라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 초대통감 이후 2명의 통감과 9명의 총독, 그리고 14명의 조선사령관이 거쳐 갔다. 독립투사의 1급 암살 타켓은 한반도를 강점한 일본의 수뇌였지만 1909년 10월 하얼빈에서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 이후 10년만인 1919년 9월, 남대문(서울)역에서 3대 총독 사이토 마코토(齊藤實 1858-1936)에게 수류탄을 투척한 강우규 지사 외는 알려진 것이 없다.
사이토 마코토는 부임 첫날 강우규 지사의 수류탄 투척 암살을 피하여 1927년까지 총독 직을 수행하였고 2년 후 5대 총독으로 다시 부임하였다가 1932년 일본의 내각총리로 영전하였다. 그러나 1936년 쿠데타(2.26사건)를 일으킨 일본의 청년장교들에 의해 자택에서 40여발의 총탄을 맞고 처참하게 살해된다.
최 감독은 어느 인터뷰에서 “꿈을 꾸고 그 꿈을 만들어 대중에게 보여주는 사람이 감독”이라고 했는데 그는 오래전부터 상하이 임시정부의 김구 선생이 결성한 한인 애국단원이 중국 땅이 아닌 조선의 경성에서 암살의 성공 드라마를 실현시켜 보는 꿈(영화)을 계획했는지 모른다. 최 감독은 애국단원이 하지 못한 ‘미완의 암살’을 영화에서는 완벽하게 완성시켰다.
최 감독이 생각한 1933년 암살 대상 조선사령관은 가와시마 요시유키(川島義之)육군중장이었던 것 같다. 당시 총독은 우카기 가즈시게(宇垣一成). 영화에서는 허구 인물 가와구치 마모루(川口葵)사령관이다. 실제 가와시마 중장은 영화와 달리 조선군사령관 직을 무난히 역임한 후 육군대신으로 영전된 인물이다. 그러나 최 감독이 꿈꾼 ‘암살’은 모두 시원하게 끝난다. 가와구치 사령관과 친일 기업인 강인국 그리고 친일파 변절자 염석진까지. 최 감독의 꿈은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홍커우(虹口)에서의 윤봉길 의사의 성공에서 출발하는 것 같다.
“중국의 100만 대군도 하지 못한 쾌거를 한국의 한 청년이 해냈다”고 당시 중국의 장제스(蔣介石) 총통이 윤 의사의 의거를 극찬하였다. 그는 많은 중국군을 살해하고 상하이를 무단 점령한 일본군 총사령관 시라가와 요시노리(白川義則)를 죽게 하고 요인들에게 중상을 입힌 윤 의사의 의거를 누구보다 기뻐했다. 이 때 장 총통의 뇌리에 각인된 ‘한인(韓人 Korean)은 살아있다’는 강한 인상이 1943년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의 자유 독립을 강력히 요구하는 계기가 되었는지 모른다.
상하이 홍커우(지금은 루신)공원에 가 보면 윤 의사를 호를 딴 매헌(梅軒)이라는 현판이 붙은 정자가 있다. 정자 내에는 1932년 4월 29일 거사 당시 사진이 진열되어 있다. 천황의 생일인 천장절 행사에 참석한 단상의 요인들이 일본의 국가 기미가요를 제창하는 사이 윤 의사가 던진 물통 폭탄이 터졌다. 국가를 부르느라 단상의 요인들은 급히 몸을 피하지 못해 많은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시라가와 육군대장은 다음 날 죽고 나머지 단상의 요인들은 목숨은 구하였으나 다리를 잃고 눈을 잃었다. 그들은 일본의 영웅이 되었지만 일본에 의해 노예상태가 된 한국인의 민족적 자존감을 되새기면서 불편한 몸을 이끌고 여생을 살아갔을 것이다. 윤 의사의 ‘미완의 암살’로 인해 살아남은 그들은 누구인가.
1945년 9월 일본 도쿄 만(灣)에 정박한 미국의 미주리호 선상에서 항복 문서에 사인하려고 한 중년 노인이 10kg 무게가 나는 의족의 다리를 쩔뚝거리고 지팡이를 짚고 나타난다. 그는 1932년 4월 천장절 행사의 단상에서 윤 의사가 던진 폭탄의 파편이 우측 다리를 관통 절단해야 하는 중상을 입었다. 당시 주중공사 시게미쓰 마모루(重光葵 1887-1957)였다.
직업외교관이던 시게미쓰는 그 후 소련 및 영국 대사를 거쳐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내각의 제2기 외상(1943.4-1944.7)이 된다. 제1기 외상인 도고 시게노리(東鄕茂德 1882-1950)는 하와이 진주만 공격(1941. 12)승인을 서명 하였다. 정유재란 당시 정읍에서 납치되어 간 도공(陶工)의 후예 도고(한국명 朴茂德) 외상이 A급 전범이 되는 결정적 사유가 되는 서명이었다.
시게미쓰는 미국과의 전쟁을 반대하여 전범은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소련대사 시절 악연으로 소련 검찰관의 주장이 관철되어 A급 전범이 된다. 소련대사가 된 것도 극히 우연이었다. 시게미쓰는 당초 주독대사로 내정되었는데 외무성에서 다리를 잃은 시게미쓰를 도와준다고 현안이 별로 없는 소련대사로 임명한 것이다. 소련대사에 내정된 도고 시게노리는 갑자기 주독대사로 발령된다.
시게미쓰는 패전 직후 하가시구니노미야(東久邇宮) 내각의 2개월짜리 외상(1945.8-1945.10)이 된다. 1945년 9월 항복문서에 일본 대표로서 서명을 하기위해 미주리호에 오른 것이다. 시게미쓰는 스가모(巢鴨) 감옥(도쿄 이케부쿠로 선샤인 빌딩 자리)에서 복역하다가 석방되고 공직 추방에서도 풀려 나 정치 활동을 통해 개진당(改進黨)의 당수, 민주당 하토야마 내각의 부총리 겸 외상이 된다.
시게미쓰 전 외상이 최근 한국 언론에 크게 보도 되었다. 시게미쓰가 롯데 그룹의 후계자 다툼의 신동주-동빈 형제의 어머니인 일본인 시게미쓰 하쓰코 여사의 외삼촌이고 초창기 롯데가 사업을 키운 것도 시게미쓰가 뒤를 봐 주었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롯데 측에서는 시게미쓰 전 외상과는 아무런 인척관계가 없다고 부인했다.
윤 의사의 폭탄을 맞은 단상의 노무라 기치사부로(野村吉三郞 1877-1964) 해군중장은 오른쪽 눈을 잃었다. 그는 함대사령관으로서 양쯔강(長江)에서 함포사격으로 시라가와 육군을 지원했다. 노무라는 다음해 해군대장으로 승진하고 1937년 퇴역한다. 퇴역 후 귀족학교로 불리는 학습원의 원장에 취임한다.
1939년 조선 총독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가 일본 내각총리가 된다. 당시 총리 후보로 데라우치 히사이치(寺內壽一)가 물망에 올랐지만 일본 남방군의 총사령관으로 한시도 자리를 비울 수 없다는 이유로 다음 순번인 아베 총독이 총리가 된 것이다. 데라우치 히사이치는 초대 조선총독의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의 아들이다.
아베 총리는 정권 발족 직후는 외무대신을 겸임하였으나 유럽에서 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국제법 전문가인 노무라 원장을 외상으로 발탁한다. 그러나 미일관계가 악화됨에 따라 1940년 11월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磨) 내각은 미국의 루스벨트(Franklin D. Roosevelt 1882-1945) 대통령과 교우관계인 노무라 전 외상을 주미 대사로 임명한다. 노무라 대사는 주미 대사관의 해군무관으로 근무할 때 루스벨트 대통령은 해군성 차관이었다.
일본은 노무라 대사를 통해 미국과 교전을 피하기 위해 막판 교섭을 하고 벌리고 있었으나 미국의 헐(Cordell Hull 1871-1955) 국무장관은 강경하였다. 후에 국제연합을 결성하여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헐 장관은 미국의 최장수 국무장관이다. 이른 바 ‘헐 노트’라고 불리는 미국의 일본에 대한 최후통첩은 1) 일본의 중국에서 전면철수 2) 독일 이태리 일본의 3국 군사동맹 파기 3) 중국의 충칭(重慶)정부 이외 정부 부인이었다.
일본은 이를 무시하면서 미국과의 관계가 악화되자 고노에 내각은 구루스 사부로 (來栖三郞 1886-1954) 전 독일 대사를 미일교섭담당 특별대사(제2의 대사)로 파견 노무라 대사를 돕게 한다. 해군 출신의 노무라 대사는 영어가 부족한 반면 구루스 대사는 미국통의 직업외교관으로 미국에 오래 근무하였고 부인도 미국인이라 미국에 지인도 많았다. 그러나 미국으로서는 구루스 대사가 미국이 파기를 바라는 3국 군사동맹의 서명자로 기피 인물이었다. 협상은 결국 결렬되었다.
윤 의사의 거사에서 왼쪽 다리를 잃은 우에다 겐기치(植田謙吉) 육군중장은 최 감독의 ‘암살’ 대상이 된 실제 조선사령관 가와시마가 육군대신으로 영전한 후 그 후임으로 부임하였다. 그리고 1934년 육군 대장으로 승진 관동군 사령관이 된다.
단상의 무라이 구라마쓰(村井倉松 1888-1953) 당시 상하이 총영사는 얼굴과 신체에 수많은 파편을 맞았다. 그는 시드니 총영사 타이랜드 공사를 영전하고 퇴직하였다. 전후 고향 아오모리(靑森)현의 하치노헤(八戶)시의 시장을 역임하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의 원훈(元勳)이지만 한국인에게는 원흉(元兇)이다.”, “한일 역사를 넘나들면 영웅(英雄)이 역도(逆徒)가 되고 역도가 영웅이 된다.” 김종필 전 총리의 말이 틀리지 않다. 일제 강점 시 독립투사들의 암살 대상은 일본의 영웅들이었다.
영화 ‘암살’이 개봉 11일 만에 600만의 관객을 돌파하였다고 한다. 이제 8월이다. 광복 70주년이 되는 달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이름 모를 수많은 독립투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런 의미에서 ‘암살’은 이번 8월에 잘 맞는 영화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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