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인은 지금 상해로 갈 계획이니 전하도 뒤따라오소서(小人今往上海計, 殿下從此枉駕).”
우리 역사상 유일한 제국이었던 대한제국에 대한 시선은 곱지 않다. 지배층의 부패와 무능이 망국을 자초하였다는 생각 때문이리라. 사회 지도층에 대한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불신과 혐오는 여기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대한제국의 황실과 고위관료들이 아무런 저항 없이 일제에 무릎을 꿇은 것은 아니었다. 대한제국의 대신을 역임하고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고문을 역임한 동농(東農) 김가진(金嘉鎭, 1846~1922)은 사회 지도층으로서의 책임, 즉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인물이다.
김가진은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 분신 자결한 김상용(金尙容)의 11대손이다. 장동 김씨(壯洞金氏)로 일컬어지는 조선 후기 세도정치의 핵심 가문 출신이다. 판서를 역임한 부친의 뒤를 이어 벼슬길에 오른 김가진은 대한제국에서 농상공부대신, 법무대신을 역임했다.
1910년 한일병합조약을 강제로 체결시킨 일제는 대한제국의 관료 76인에게 작위를 수여한다. 김가진 역시 전임 대신의 자격으로 남작 작위를 받았다. 그러나 3.1운동 이후 전국적으로 독립운동의 열기가 고조되자 작위를 받은 인사들도 전향하여 독립운동에 가담한다. 김가진 역시 항일 지하조직 단체인 대동단의 총재로 활약하다가 일제의 수사망이 좁혀오자 상해로 망명하기로 결심한다. 이 과정에서 그는 임시정부에 큰 힘을 실어줄 인사의 망명을 추진한다. 의친왕(義親王) 이강(李堈)이었다.
의친왕은 고종의 아들이자 순종의 아우다. 의친왕의 망명은 대한제국의 계승을 표방한 임시정부의 정통성 확보에 크게 기여할 것이 분명하였다. 김가진은 비밀리에 의친왕에게 서신을 보내 망명을 권유한다. 자기가 먼저 상해로 가겠으니 뒤따라오라는 것이었다. 의친왕은 김가진의 권유를 받아들여 망명을 결심하고 임시정부에 친서를 보낸다. “나는 독립되는 우리나라의 평민이 될지언정 합병한 일본의 황족이 되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
1919년 10월, 김가진이 먼저 단동(丹東)행 열차에 올랐다. 단동에 도착한 김가진은 배를 타고 상해로 이동했다. 김가진이 망명에 성공하자 의친왕도 뒤를 따랐다. 의친왕은 대동단의 안내로 11월 10일 수색역을 출발했다. 그러나 이를 눈치챈 일경이 수배령을 내리는 바람에 의친왕은 단동에 도착하자마자 붙잡히고 만다. 의친왕의 망명은 실패로 돌아갔으나 이 사건이 보도되면서 대한제국 황실과 고위관료들이 합방을 지지했다는 일제의 주장은 힘을 잃게 된다.
김가진은 임시정부로부터 ‘국로(國老)’ 대우를 받으며 활동하였으나 병마와 가난에 시달린 끝에 77세의 나이로 상해에서 눈을 감았다. 그의 장례식은 임시정부 주석 홍진(洪鎭)의 주관 하에 치러졌으며, 안창호(安昌浩)가 추도사를 낭독했다. 김가진이 독립운동에 공헌한 바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그러나 해방 이후 김가진의 독립유공자 서훈은 보류되었다. 일제로부터 받은 작위를 ‘반납’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다. 김가진은 상해로 망명하기 앞서 총독부에 들러 작위를 반납하겠다는 신고라도 했어야 하는 걸까.
김가진의 아들 김의한과 며느리 정정화는 김가진의 유지를 받들어 임시정부에 기여했다. 셋째 아들 김용한은 의열단 사건에 연루되어 고문 후유증으로 숨지고, 손자 김석동은 광복군에 가담했다. 이들은 모두 독립유공자로 추서됐다. 대한제국의 지배층으로 3대에 걸쳐 독립운동에 헌신한 그의 집안은 그야말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전형이라 하겠다.
1993년, 상해 홍차오루(虹橋路) 만국공묘(萬國公墓)에 묻혀 있던 박은식 외 독립운동가 5인의 유해가 봉환돼 국립묘지로 옮겨졌다. 그러나 그들과 나란히 묻힌 김가진의 유해는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김가진의 망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장유승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선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