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초 일으켜 회천, 막부 타도한 풍운아 다카스기 신사쿠 … 결단·돌파의 드라마, 아베 정치세계를 지배하다
회 천(回天·가이텐)은 천하 형세를 바꾼다. 19세기 후반 일본-. 천하대란 속 거대한 변혁을 이룬다. 도쿠가와 막부(德川幕府)의 퇴장과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의 개막이다. 그 한복판에 다카스기 신사쿠(高杉晋作)의 회천 신화가 있다.
태평양전쟁 말기-. 가미카제(神風)는 하늘에 나타났다. 바다에는 ‘인간 어뢰 가이텐’, 회천의 결의는 변질됐다. 야만의 자살특공으로 타락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항복한다. 패전 70년-.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은 21세기 메이지 유신을 모색한다. 아베 리더십에 신사쿠의 드라마가 있다. 아베의 외침은 ‘강한 일본’이다. 그 노선은 신국수주의와 우경화다.
나 는 다카스기 신사쿠(1839~1867)를 추적했다. 그는 야마구치(山口)현 하기(萩) 출신. 야마구치(혼슈 남서쪽)현은 옛 조슈 번(長州藩)이다. 도막(倒幕·막부타도)과 유신의 거점이었다. 신사쿠의 28년 생애는 파란과 반전이다.
[①②③④ 박보균 대기자 촬영, ⑤ 지지통신]
그 드라마의 무대는 야마구치현 시모노세키(下關)다. 나는 6월에 그곳을 다시 찾았다. 첫 목적지는 동행암(東行庵). 시모노세키 역에서 동쪽 30㎞. JR 산요(山陽) 완행선을 탔다. 오즈키 역에서 내려 버스로 들어갔다. 동행은 그의 아호. 2014년 7월 19일 아베 총리는 그곳을 방문했다. 내가 그곳에 간 이유다. 시모노세키는 아베의 지역구(중의원)다.
그때의 기사(야마구치신문)는 이렇다. “아베 총리는 동행암에 새로 만든 신사쿠 동상 옆에서 포즈를 취하고 묘소를 참배한 뒤 ‘뜻이 정해졌다’고 말했다.” 아베는 정치적 영감을 얻은 듯했다. 그해 가을 아베는 중의원을 해산했다. 12월 총선에서 그의 자민당은 압승을 거뒀다.
동행암 안내판은 ‘꽃의 절, 사적, 신사쿠 묘소’다. 입구에서 50m쯤 걸었다. 동상이 나온다. 동상 받침돌(높이1.5m, 폭 2m)에 아베의 휘호 명판이 새겨졌다. ‘高杉晋作像 內閣總理大臣 安倍晋三(고삼진작상 내각총리대신 안배진삼)’. 동상은 2014년 3월에 제막됐다. 그때 총리 부인 아키에(昭惠) 여사가 참석했다.
동상은 거창하지 않다. 키는 1.8m. 왼손으로 긴 칼 가타나(刀)를 잡았다. 옆구리에 짧은 칼 와카자시(脇差). 동상의 눈매는 날카롭고 강기(剛氣)가 서렸다. 그곳에 함께 간 우치다 고스케(內田·57)씨가 설명한다. “전형적인 사무라이 모습이다. 신사쿠는 유생신음류(柳生新陰流)의 검호였다.” 우치다는 야마구치의 메이지 유신 150주년(2018년) 기념준비회 간부다.
아베는 왜 신사쿠를 찾았나. 호사카 유지 세종대 교수는 “아베 총리 부자는 신사쿠의 신(晋)을 이름자에 넣었다. 그 인연은 존경심의 표시”라고 했다. 아베의 부친은 아베 신타로(安倍晋太郞·1924~91) 전 외상. 부자의 같은 이름자는 이례적이다. 명판은 존경의 증빙이다. 그것은 아베를 추적하는 단서다.
나는 신사쿠 어록(월간 신사쿠 총집편)을 살펴봤다. “천하의 일에는 단호하게 뜻을 관철한다. 화복, 사생(死生)에 마음이 흔들려선 안 된다.” 아베 총리가 즐겨 쓰는 휘호는 ‘不動心(부동심)’ ‘寂然不動(적연부동)’이다. 신사쿠의 언어는 아베의 감수성을 자극한다. 정치 현장에서 재생산된다. 아베의 정치도 결단과 돌파다. 그 이전 일본 정치는 키메라레나이(決められない·결정 못함)다. 아베 시대는 다르다. 아베노믹스는 과감하다. 아베의 역사 도발도 거침없다. 위안부 과거사를 묵살한다. 그는 평화헌법 질서를 깨고 있다.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는 “아베의 리더십을 해부하려면 신사쿠를 알아야 한다”고 했다.
기념관 1층에 요시다 쇼인(吉田松陰·1830~ 1859) 좌상이 있다. 신사쿠는 쇼인의 수제자(사천왕)다. 쇼인의 사상은 일군만민(一君萬民)이다. “나라는 군이 다스리고 백성은 그 아래서 평등하다.” 그것은 막부체제 타파와 존왕(尊王·천황 숭배)이다. 2층은 신사쿠의 갑옷과 깃발을 진열했다. 난세의 시대였다. 존왕 대 쇼군(將軍), 양이(攘夷) 대 개항, 중앙정부 막부 대 번(藩)의 영주 다이묘(大名). 세력과 이념이 얽혀 충돌했다. 피가 피를 불렀다.
신 사쿠는 중급 무사 집안 출신이다. 그는 번주인 모리(毛利) 가문 측근으로 번청에 나갔다(22세). 조슈는 막부 타도의 선봉에 섰다. 하지만 치명적인 반격을 받았다. 조슈 세력은 밀려났다. 1년쯤 뒤인 1864년 7월, 조슈는 만회에 나섰다. 교토로 돌격했다. 황궁의 수호직은 사쓰마(薩摩)-아이즈(會津)번이다. 두 연합군은 완강했다. 조슈 군대는 패주했다. 금문(禁門)의 변(變). 그때 신예 지사 사천왕 중 세 명은 숨졌다. 신사쿠는 근신 중이었다. 생사는 갈렸다.
내우외환은 계속됐다. 한 달 뒤 4개국 군함의 조슈 번 공격. 시모노세키 단노우라(壇の浦) 포대는 쑥밭이 됐다. 이어 막부 군대의 조슈 번 원정. 조슈는 막부에 화친을 요청했다. 도막 노선을 포기했다. 무비공순(恭順)의 유화 입장을 취했다.
신사쿠는 쇼인의 사상을 재구성했다. 초망굴기(草莽?起)-. ‘민초를 궐기시켜 막부를 타도하라’는 가르침이다. 그것은 신사쿠의 열정과 상상력을 장악했다. 그는 그 사상을 무사의 세계에 적용한다. 사무라이만이 칼을 찰 수 있던 시절이다. 그는 초망굴기의 신개념 군대를 만든다. 기병대(奇兵隊·기헤이타이)다. 주력은 아시가루(足輕·하급 사무라이)와 초닌(町人·평민). 말을 타는 기병(騎兵)이 아니다. 백성도 칼을 든 기괴한 부대다.
그의 기병대 휘하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가 있었다. 두 사람도 쇼인 문하생이다. 메이지 시대 문무의 간판, 조선 침략의 주역들이다. 김종필 전 총리(JP)의 연설문이 생각난다(2005년 일본). “그들은 메이지 유신의 원훈(元勳)이지만 한국인에겐 원흉(元兇)이다.”(김종필 증언록, 본지 4월 27일자) 기병대 명단에 미우라 고로(三浦梧樓·조선 주재 공사)도 있다. 그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주범이다. 명단은 불쾌감을 키운다.
신사쿠는 사천왕 중 홀로 남았다. 그는 반란을 도모했다. 동행암에 그의 시비(詩碑)가 있다. 시 구절은 이렇다. ‘將立回天回運策’(바야흐로 회천회운의 대책을 세운다, 1864년 가을) 조슈 번을 기사회생시키려는 결의다. 이제 회천(가이텐)은 신사쿠의 야망의 언어다.
쿠데타는 ‘공산사(功山寺) 거병’으로 불린다. 우리는 공산사로 갔다. 조슈 번주 모리 가문의 절이다. 동행암에서 차로 20분 거리. 두 곳 모두 시모노세키 안에 있다. 거병의 규모는 미약했다. 기병대 80여 명으로 시작했다(1864년 12월). 신사쿠의 장기가 주효한다. 기회 포착→대담한 결단→질풍노도의 기습이 이어졌다. 번의 정부군(1000여 명)은 무너졌다. 기적의 대역전이다.
공산사 불전 옆에 신사쿠 동상(1967년 세움)이 서 있다. 말을 타고 출병하는 모습이다. 받침돌 명판은 ‘一鞭回天 明治維新(채찍을 휘두르니 메이지 유신)’이다. 나는 역사 작가 후루카와 가오루(古川薰)의 동행암 추모비를 떠올렸다. ‘夢魂 獨飛(몽혼 독비·꿈속의 넋이 홀로 난다)’-. 거병은 독단적 결행이었다.
동상의 다른 명판은 ‘回天義擧(회천의거)’다. 기시 노부스케(岸信介·1896~1987)의 글씨다. 나의 눈길이 멈춘다. 기시 전 총리는 아베의 외조부다. 기시는 태평양전쟁 A급 전범 용의자였다. 신사쿠 동상 두 개에 새겨진 아베와 기시의 명판. 닮은 꼴의 그 의미는 선명하다. 신사쿠의 회천은 두 사람의 정치 철학을 지배한다. 그 위에 쇼인이 존재한다. 최상용 전 주일대사는 “아베 총리는 신념 우익”이라고 했다. 그 말이 실감 난다.
기시는 아베 정치의 롤 모델이다. 아베는 7월 16일 안보 관련 법안(집단자위권)을 강행 처리했다. 기시의 염원은 ‘보통국가’(전쟁할 수 있는 나라)다. 1960년 총리 기시는 미·일 안보조약 개정안을 밀어붙였다. 그 후유증으로 사퇴했다. 아베는 외조부의 비원을 재정비했다. ‘아베 정권 NO’라는 반대 여론도 거세다. 하지만 아베의 집념은 뚜렷하다.
신 사쿠가 말을 박차고 달릴 듯하다. 우치다씨는 “사무라이 무사도의 정수(精髓)가 담긴 동상”이라고 했다. 나의 머릿속은 구한말로 옮겨간다. 그 시대 조선의 깃발은 위정척사(衛正斥邪)다. 그 속에 폐쇄와 문약(文弱), 위선이 넘쳤다. 1884년 김옥균의 개화당 거사는 실패했다(34세·갑신정변). 김옥균을 이을 리더십과 비전이 조선에 없었다.
신사쿠 거사는 막부제압의 동력을 재충전시켰다. 조슈는 그 중심에 복귀했다. 이어서 조슈와 사쓰마(현재 가고시마)가 손을 잡는다(1866년 1월). 삿초(薩長) 두 웅번은 과거의 원한을 접었다. 도막의 결정적 발판이 마련됐다. 동맹의 막후 중재자가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 료마는 도사(土佐·지금은 고치현) 번 출신이다. 료마와 신사쿠는 뭉쳤다.
막부는 다시 조슈 정벌에 나섰다. 1866년 5월 사경(四境)전쟁이다. 해군 총독 신사쿠가 나섰다. 그는 막부함정을 기습, 격파했다. 1000 기병대는 2만 막부 군을 무찔렀다. 회천은 신화를 완성한다. 막부는 급속히 몰락한다. 그 순간 드라마는 비극으로 재반전한다. 그는 폐결핵으로 누웠다. 요절(1867년 4월)했다. 7개월 뒤, 264년의 에도(江戶) 도쿠가와 막부시대는 끝났다. 메이지 유신 시대가 열렸다. 그는 열매를 맛보지 못했다.
나는 다시 동행암으로 갔다. 일본 국민작가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의 문학비가 있다. ‘長州は奇兵隊の國である(조슈는 기병대의 나라다)’. 그의 기행문은 이어진다. “조슈는 무사와 서민이 하나 되어 유신을 완수했다.” 초망굴기의 장렬한 성취다.
동행암은 청수산 기슭이다. 신사쿠 묘는 조촐하다(묘비 높이 61cm, 폭 24cm). 그의 게이샤 애인 오우노(おうの)의 무덤도 있다. 동행암은 오우노의 작은 암자로 출발했다. 오우노는 머리를 깎았다. 비구니로 42년간 묘를 지켰다. 신사쿠 현창비가 있다. 비문은 “움직이면 번개(雷電), 일어서면 비바람(風雨)”으로 시작한다. 이토 히로부미의 글이다. 그는 신사쿠를 풍운아로 묘사했다. 그해 10월, 그는 안중근 의사의 총에 맞았다. 기념관에 그가 신사쿠와 찍은 사진이 걸렸다. 서열은 엄격했다. 히로부미는 보디가드 자세다.
나는 청수산 숲 속을 걸었다. ‘日露戰役 凱旋 紀念碑(일로전역 개선 기념비)’가 서 있다. 대국 러시아를 물리친 것(1905년)은 회천 신화의 계승이다. 총리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세운 비석이다. 그는 조슈 군벌의 대부다. 조슈 군벌은 조선 침략의 지휘탑이다.
JR 산요선 열차 안 광고판은 NHK 대하사극 ‘하나모유(花燃ゆ·꽃 타오르다)’다. 배경은 막말·유신 때의 조슈 번. 쇼인과 신사쿠의 삶도 전개된다. 우치다씨는 “하나모유는 그 시대 지사들의 열정과 고뇌, 영광과 좌절을 그린다. 종전 70년에 일본 사회가 기억하려는 역사”라고 했다. 하지만 그 시대 인물은 불편하다. 호기심은 분노로 자주 바뀐다. JP의 말이 와닿는다. “한·일 역사를 넘나들면 영웅이 역도(逆徒)가 되고 역도가 영웅이 된다.”
2015년 8월 15일. 광복 70주년 기념일이다. 일본의 패전 70주년.(일본은 종전으로 표현) 아베 총리의 목표는 전후 체제의 개조다. 아베의 일본을 경계해야 한다. 동시에 친해야 한다. 일본과 아베를 알아야 한다. 하지만 한국은 비분과 강개가 앞선다. 지피지기(知彼知己)는 지혜와 전략을 제공한다. 친선과 교류는 단단해진다.
[S BOX] 기병대(奇兵隊)는 백성도 칼 든 ‘기괴한’ 부대 … 사쓰마의 ‘라스트 사무라이’는 왜 패했나
기병대(奇兵隊)의 주력은 평민이다. 전쟁은 사무라이(侍)의 무대다. 기병대는 그 독점권을 깼다. 조슈 번의 기병대는 진화한다. 메이지 시대 군제 개혁의 모델이 됐다. 사무라이 번병(藩兵)에서 국민 개병제로의 변화다. 폐도(廢刀)령이 내려졌다. 사무라이의 칼 차는 특권은 사라졌다. 그 울분이 모아졌다. 저항으로 발산됐다. 세이난(西南, 메이지 10년)전쟁의 바탕이다. 그것은 무사 계급의 집단 반란이다. 맹주는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 1828~77)다. 그는 사쓰마(가고시마) 번의 간판이다. 메이지 유신의 최고 공신이다. 그는 정한론(征韓論)을 주창했다(1873년). 하지만 조선 정벌의 속도조절론에 밀렸다. 그의 반대쪽에 조슈 인물들이 포진했다. 다카모리는 공직(참의)을 사퇴했다. 그는 가고시마(鹿兒島, 규슈 남쪽)로 낙향했다. 그는 후학을 키웠다. 군대를 조련했다. 메이지 조정의 방침을 거부했다.
1877년 2월 그는 거병을 했다. 주력은 사무라이. 정부군은 징병제의 평민 위주다. 지휘관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기병대 출신이다. 엘리트 사무라이 대(對) 보통 군인. 사쓰마의 무사도 대 조슈의 기병대 정신이 격돌했다. 사쓰마 사무라이의 검술은 지겐류(示現流)다. 위에서 아래로 내리치는 일격필살의 검법. 단순성은 돌격과 용기를 연출한다.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톰 크루즈 주연)는 그 세계를 담았다. 그해 9월 정부군이 승리했다. 풀뿌리 병사의 단합이 사무라이의 기백을 누른 것이다. 사무라이 신화는 종식됐다. 다카모리는 자결했다.
시모노세키·야마구치시=글·사진 박보균 대기자 bgpark@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