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현듯 1200여 년 전 처용의 얼굴이 궁금해졌습니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조각칼을 손에 쥐었죠. 3평 남짓한 공방에서 하루 종일 나무를 깎고 또 깎았습니다.”
울산에서 28년째 처용탈을 만들고 있는 김현우(61)씨의 말이다. 김씨는 울산시 중구 우정동에 위치한 ‘처용탈방’에서 홀로 처용탈을 만들고 있다.
경북 영주 출신의 김씨는 1970년대 울산의 목재소에서 일했다. 그러다 87년 김춘수 시인의 ‘처용단장’이란 시를 접했다. 그는 “시를 읽는 순간 처용의 얼굴이 궁금해졌다”고 했다. 처용 설화의 발원지가 울산이라는 사실이 궁금증을 키웠다. 각종 서적을 뒤적이던 김씨는 그때 처용탈을 쓰고 하는 ‘처용무’ 공연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공연을 보러 갔습니다. 그런데 처용탈의 모습이 제가 갖고 있던 이미지와 다르더군요. 역신을 용서하는 너그러움이 아니라 그냥 무서운 모습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처용탈을 직접 만들어보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직장을 그만두고 탈방을 차렸다. “5살짜리 아들이 있는데 어떻게 살려고 그러느냐”며 반대하던 부인(52)도 김씨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생계는 부인이 미용실을 운영하며 꾸렸다.
처음엔 공연 때 본 처용탈 모양을 따라 만들었다. 하나 만드는 데 꼬박 1년이 걸렸다. 뭘 어떻게 만드는지 아는 게 하나도 없어서였다. 점점 탈 만드는 작업이 손에 익을 무렵, 김씨는 조선시대 서적 ‘악학궤범’에 실린 처용의 얼굴 그림을 봤다.
“거기서 눈이 크고 너그러운 처용의 본 얼굴을 찾아냈습니다. 그게 언제부터인가 눈이 찢어진 모습으로 바뀌었던 겁니다. 일제 강점기에 왜색이 더해진 게 아닐까 합니다.”
‘평양감사연희도’같은 다른 조선시대 그림에서도 눈이 큰 처용의 모습을 확인했다. 이를 바탕으로 지금의 처용탈을 만들게 됐다.
그가 만든 처용탈은 서울 남산타워 박물관과 일본 나고야 박물관 등 국내외 8개 박물관에 소장·전시돼 있다. 전국 공예품 경진대회 장려상 등 31차례의 수상과 표창 경력도 있다.
이런 김씨가 “처용탈 제작을 그만두고 귀농할까 생각하기도 한다”고 말한다. 지난해 울산시에 무형문화재 지정을 신청했지만 “스승이 없어 계보가 없다”며 퇴짜를 맞아서다. 이에 대해 울산시 측은 “무형문화재 지정을 위해선 3~4대 이어지는 계보가 필요한데 처용탈은 그게 없다”며 “우선 해당 구청에서 비지정문화재로 지정해 육성한 뒤 기능이 대물림되면 시 무형문화재로 지정하는 등의 방안을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울산=유명한 기자 famous@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