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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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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7호 14면

일제가 한국의 외교권을 강탈한 이후 간도(間島)지역 조선인들은 큰 곤란에 처하게 되었다. 간도는 현재의 중국 지린(吉林)·랴오닝(遼寧)성 일대의 서간도와 두만강 북부 북간도의 통칭이다. 고종 20년(1883) 청나라의 지린·훈춘 초간국(吉林琿春招懇局) 진영(秦煐)과 청나라 둔화(敦化)현 지현(知縣) 조돈성(趙敦誠)이 함경도 경원부와 회령·종성부에 공문을 보내면서 이 문제가 본격화되었다(『통리교섭 통상사무아문 일기(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日記)』). 두 청국 관원은 “올해 추수를 마친 후 9월 안으로 ‘토문(土門) 이북과 이서(以西) 지방의 조선 사람들을 모두 쇄환(刷還:외국 등지에 있는 사람을 데려감)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해당 지역의 조선인들은 자신들이 개간한 토지가 ‘백두산정계비(白頭山定界碑)’에 명시된 토문강과 두만강 사이의 조선 영토라고 주장했다. 이로 인해 ‘백두산정계비’ 해석 문제가 불거졌다. 백두산정계비는 숙종 38년(1712, 강희 51년) 두 나라가 백두산 분수령에 “(양국 경계는) 서쪽은 압록이고 동쪽은 토문이다(西爲鴨綠, 東爲土門)”라는 내용을 새겨서 세운 비다.

청나라는 토문을 두만강이라고 주장했지만 ‘토문(土門)’과 ‘두만(豆滿)’은 음과 뜻이 모두 달랐다. 『청사고(淸史稿)』 길림(吉林)지리지 ‘영안부(寧安府)’조에도 “훈춘강에서 동북으로 토문령이 나온다(琿春河, 出東北土門嶺)”며 토문을 만주 지역의 지명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인들은 직접 백두산정계비를 찾아가 강의 발원지를 답사한 뒤 종성부사 이정래(李正來)에게 청국의 처사가 부당하다고 호소했다. 이때 경원부에 있던 서북경략사(西北經略使) 어윤중(魚允中)이 종성 사람 김우식(金禹軾)을 백두산으로 보내 정계비와 토문의 원류(源流)를 조사하라고 명하였다. 김우식은 백두산정계비와 토문의 발원지를 조사한 결과 조선 백성들의 주장이 맞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그래서 어윤중은 고종 20년(1883) 7월 종성부사 이정래에게 둔화현에 공문과 함께 ‘토문강과 그 이남 강토에 대한 옛 지도 모사본과 새 지도(土門江·分界江以南 舊圖移摸·新圖)’ ‘백두산정계비 탑본(榻本:탁본)’을 보내게 하였다. 어윤중은 양국에서 각자 관리를 파견해 백두산정계비와 강의 발원지를 답사하고 그 내용에 따라 국경을 분별하자고 요구할 정도로 자신이 있었다.

1903년 의정부 참정 김규홍(金奎弘)은 고종에게 간도시찰관 이범윤(李範允)을 북간도(北間島) 관리(管理)에 임명하자고 요청하였다. 그러면서 “북간도는 바로 우리나라와 청나라의 경계로…수십 년 전부터 함경북도 연변의 각 고을 백성들이 이주하여 농사를 지으며 사는 사람이 수만 호에 10만여 명이나 되는데, 청나라 사람들에게 혹독한 침탈을 받고 있다(『고종실록』 40년 8월 11일)”고 말했다. 김규홍은 “백두산정계비 이후 토문강 이남 구역은 우리나라 경계로 확정되었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조선은 서간도를 평안북도에, 동간도(북간도)를 함경도에 편입시키고 이범윤을 북간도 관리로 임명해 간도에 상주시켰다. 이후 간도 백성들은 대한제국에 세금을 납부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1909년 9월 4일 북경에서 ‘간도에 관한 청·일 협약’을 맺어 남만주철도 부설권을 얻는 대신 간도를 청나라에 넘겨주었다. “도문강(圖們江)을 청·한 양국의 국경으로 하고 강의 발원 지역은 정계비를 기점으로 하되 석을수(石乙水)를 양국의 경계로 할 것”(제1조)이라고 정해 토문(土門)을 도문(圖們)으로 둔갑시켰다. 1907년 12월 28일 하야시(林) 외무대신은 소네 부통감에게 보낸 ‘한·청(韓淸) 국경 논쟁의 사적(史的) 배경 설명과 앞으로의 해결과제 지시’에서 청나라 진영(秦煐)이 석을수를 국경으로 주장한다고 하였는데, 결국 일본이 청의 요구를 그대로 인정해준 것이다.

1909년 9월 2일 일본의 고무라(小村) 외상은 소네 통감에게 ‘청·일 간 간도 문제 해결에 따른 간도파출소 철퇴 대비 건’이란 문서를 보내 “간도 문제에 관해서는 청국의 영토권을 승인하는 것 외에 또 잡거 한국인에 대한 재판권을 청국에 주고 …간도 주재 파출소는 머지않아서 철퇴할 필요가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1909년 10월 19일 통감부 총무장관 이시즈카(石塚)는 고다마(兒玉) 서기관(書記官)에게 ‘간도파출소 철퇴의 건’을 보내 “간도파출소는 이달 27일께 철퇴 예정”이라고 전하였다. 이렇게 일제는 한국의 외교권을 강탈하고 한국의 영토 간도를 불법적으로 청에 넘겨줌으로써 현대 한국사의 지형에 큰 변화를 초래하였다.

요약=김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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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제221호 2011년 6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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