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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주·이상용의 영화 속 철학 산책] 미드나잇 인 파리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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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7호 24면

누구에게나 현재는 지루한 법
과거를 통해 현재를 돌아보라

[영화 속에서] 이상용 영화평론가

우디 앨런의 ‘미드나잇 인 파리’는 미국의 대표 감독이 과거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 “현재를 보라”고 충고하는 영화다.

할리우드의 유명 시나리오 작가인 길은 아름다운 약혼녀 이네즈와 열애 중이다. 그런데 길은 시나리오보다 자신의 생각을 담은 소설을 쓰고 싶어하고, 그 꿈을 이뤘던 선배들이 즐비한 1920년대의 파리를 동경한다. 이네즈와 함께 파리에 온 길의 소망은 부풀어 오를 수밖에 없다.

길의 바람은 우연하고 신기하게 이뤄진다. 길 잃은 그의 앞에 오래된 푸조 자동차가 나타나고, 타고 있던 사람들의 권유로 길은 차에 오른다. 이들과 함께 가게 된 파티에서 스콧 피츠제럴드 부부, 헤밍웨이, 거트루드 스타인과 피카소를 만난다. 피카소의 연인 아드리아나와는 사랑에 빠진다. 이러한 상황이 몇 차례 되풀이되다 보니, 길의 관심은 현재로 돌아와도 늘 1920년대로 향해 있다. 길은 현재의 파리를 즐기지 못하고 헤밍웨이에게 보여 줄 소설을 쓰며, 1920년대 파리와 관련된 물건에만 눈길을 준다.

1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의 한 장면. 주인공 길은 우연한 기회에 1920년대 파리로 돌아가 당대의 예술가들을 만난다.

욕망의 판타지와 환멸을 절묘하게 묘사
그러다 길은 다시 시간 여행을 떠난다. 아드리아나와 함께 마차를 타고 19세기 ‘벨 에포크’ 시대로 가 화가 고갱드가로트레크 등을 만난 것이다. 아드리아나는 이 시대가 너무 좋다며 기뻐하지만 드가는 단호하게 말한다. “이 시대는 텅 비었고 상상력이 없어. 르네상스 시대야말로 좋은 시대야.”

그들과 헤어진 후 아드리아나는 이 시대에서 계속 살겠다며 의사를 밝힌다. 길은 반문한다. “피카소, 헤밍웨이와 피츠제럴드가 있는데도요? 그들은 최고의 예술가들이잖아요.” 아드리나아는 답한다. “그건 현재잖아요. 현재는 지루해요.”

길은 그 순간 깨닫는다. 누구나 자기가 속한 현재를 지루해한다는 사실을, 또한 모두가 저마다의 황금시대를 꿈꾼다는 것을.

‘미드나잇 인 파리’는 욕망의 판타지와 뒤이어 오는 환멸을 절묘하게 묘사해 낸 작품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운 대목 중 하나는 헤밍웨이가 길의 소설을 읽은 후 던지는 충고다. “완성된 소설이 마음에 들어요. 다만 한 가지가 걸리는데, 어째서 소설 속 주인공은 자신의 약혼녀가 현학적인 남자랑 바람피우는 걸 모를 수 있는 거지?”

길은 스타인에게 헤밍웨이의 말을 전해 듣고 황급히 현재로 돌아온다. 그는 현재의 연인 이네즈에게 그녀의 친구이자 잘난 척하는 교수 폴과 바람을 피웠는지 추궁한다. 역시 사실이었다. 이 사태의 책임은 바람을 피운 이네즈에게만 있는 게 아니다. 현재에 무심했던 길에게도 있다. 과거를 향한 그의 집착은 현재의 아름다운 연인을 속물처럼 만들어 버리고, 급기야 내팽개쳐 버린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반복되는 현실이다. 우리가 속한 사회는 열정과 취향을 강조하면서 소비를 부추기고 자꾸 현재를 무의미하게 만든다. 그래서 이제 중요하게 성찰해야 하는 것은 열정이 아니라 현재의 지루함이다. 근본적으로 인간의 삶은 지루함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이 지루함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노력이 예술과 문화를 만들었다.

2 우디 앨런 감독

헤밍웨이의 낚시는 지루함과의 사투
길은 헤밍웨이와 피츠제럴드의 소설을 두고 열광만 할 줄 알았지 작가들의 지루함을 읽지는 못했다. 파리를 떠나 키웨스트에서 머문 헤밍웨이가 집착한 것은 잘 알려졌다시피 ‘낚시’다. 그것은 지루함과의 끝없는 사투였다. 말년에 쿠바에서 살게 된 헤밍웨이는 노벨문학상을 안겨 준 『노인과 바다』를 썼다. 삶의 지루함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는 최고의 소설이다.

‘미드나잇 인 파리’에는 부뉴엘, 살바도르 달리, 만 레이와 같은 초현실주의자들이나 당대를 주름잡았던 춤꾼들이 깜짝 등장한다. 그들은 1920년대 파리의 ‘핫 플레이스’를 돌아다니며 자신들의 ‘스웨그(swag: 약간의 허세)’를 뽐낸다. 그런데 당대의 지루함을 벗어나려는 이들의 몸짓은 지금도 쉽게 볼 수 있는 풍경 아닌가. 현재를 직면하지 않는 열광은 일시적 탈출을 가능케 할지는 몰라도 아드리아나처럼 또 다른 욕망을 품게 만들 뿐이다.

이네즈와 헤어진 후 이어지는 장면들은 길의 지루한 일상을 보여 준다. 노천 카페에 홀로 앉아 있거나 서점을 돌아다닌다. 그러다가 우연히 프랑스 여인 가브리엘과 마주친다. 두 사람은 골동품을 파는 거리에서 점원과 손님으로 만난 적이 있다. 가브리엘은 가게 사장이 콜 포터의 새로운 음반을 구입했다며, 며칠 전 당신이 생각났다고 말을 건넨다.

이처럼 과거의 예술은 현재를 이끌어 가는 교감의 코드로 작동하며 새로운 인연을 만든다. 과거의 걸작을 돌아보고자 하는 이유는 현재보다 과거가 좋다는 단순한 예찬이 아니라 과거를 통해 현재의 영화와 문화를 이야기하기 위함이다.


죽음 잊게 할 사랑이 불가능 할 때
스스로 세상과 이별한 헤밍웨이

[영화 밖으로] 강신주 대중철학자

헤밍웨이의 모든 작품은 생생히 살아 있다. 위기가 찾아올 때 인간적 품격과 가치를 지키려고 사투하는 정신 때문인지, 간결하고 그만큼 절절하다. 자유를 위해, 당당함을 위해, 인간적 품위를 위해, 그리고 사랑을 위해. 그는 이 모든 소중한 가치를 삶으로서 입증하지 못한다면,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믿었던 사람, 아니 남자였다. 나약한 자신에게 굴복하지 않으려고 했던 헤밍웨이와 그의 삶은, 자신이 잡은 청새치를 지키려고 상어와 사투를 벌이던 『노인과 바다』의 노인과 꼭 빼닮았다.

마초라고 불릴 만큼 강성의 남자였지만, 사실 그는 여린 사람이었다. 태생적으로 당당하고 강했던 사람이 아니라, 당당하고 강해지려고 무던히도 자신을 몰아세웠다. 엽총으로 자살한 가장 근본적인 이유도 바로 여기 있었던 것 아닐까. 자신이 나약해지는 데에 극도의 두려움을 품고 있었던 게 아닐까. 진정으로 강한 사람은 자신의 주어진 모습을 긍정하는 사람이다.

3 소설가 어니스트 헤밍웨이.

헤밍웨이 삶에서 영감 얻는 주인공 길
이제 우리는 그가 왜 파시즘, 사자, 상어, 그리고 여자들 틈바구니로 자신을 그토록 내몰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그는 강해질 수밖에 없는 조건 속으로 자신을 내던졌던 것이다. 동양 병법의 지혜를 빌리자면 일종의 ‘배수진(背水陣)’을 친 셈이었다.

여기 배수진이라는 극단적 상황에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영화인이 있다. 우디 앨런이다. 그의 외모에서 풍기는 나약하고 소시민적 이미지는 헤밍웨이와 완전 딴판이다. 또 그가 연기하고 감독했던 영화들은 당당한 기개를 뽐내는 헤밍웨이의 소설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그런데 우리가 우디 앨런에 대해 지닌 이런 인상이 정말 옳은 것일까. 우리는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영화는 길이 파리, 그것도 자정(미드나잇)에 겪은 환상적인 체험을 다룬다. 할리우드 자본이 요구하는 흥행 시나리오 집필에 신물이 난 주인공은 진정한 작가가 되려는 꿈을 품고 있다. 그래서 문학과 예술의 도시 파리로 오게 된 것이다. 한편 파리로 함께 온 그의 약혼녀는 애인의 꿈을 순간적인 일탈 정도로만 치부한다. 그녀는 돈맛을 본 애인이 소설을 집필하는 데에 실패하면 언제든 다시 시나리오 작가로 돌아올 것이라 확신하고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길은 1920년대 파리로 시간 여행을 떠나게 된다. 그곳은 속물들과 무관한, 진정한 예술가들이 우글대는 곳이었다. 그러니 그가 얼마나 행복했을지 미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우디 앨런의 모든 영화가 그렇듯, 주인공 길은 바로 감독의 분신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디 앨런이 좋아했던 예술가들이 누구인지 쉽게 알 수 있다. 자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진정한 작가가 되기로 결심한 주인공 길에게 가장 커다란 영감을 주는 인물은 바로 헤밍웨이다.

열정적 사랑은 우디 앨런이 공포 이겨내는 법
놀라운 반전 아닌가. 창작자로서 자신의 뿌리를, 본인과 가장 어울릴 것 같지 않은 헤밍웨이로부터 더듬어 찾고 있으니 말이다. 결국 ‘미드나잇 인 파리’는 헤밍웨이에게 바치는 오마주였던 셈이다. 이 영화는 결코 마초가 되지 못한 한 소시민의 이뤄질 수 없는 꿈이었던 것일까. 그렇지 않다. 우디 앨런은 마초라는 휘장에 가려진 나약한 헤밍웨이의 맨얼굴을 읽었다. 그래서 길에게 젊은 헤밍웨이가 들려준 이야기는 음미할 가치가 있다.

“진정한 사랑은 죽음마저 잊게 만든다네. 두려운 건 사랑하지 않거나 제대로 사랑하지 않아서야. 용감하고 진실한 사람이 죽음과 맞설 수 있는 건 열정적인 사랑 때문이라네. 죽음을 마음속에서 몰아내기 때문이지. 물론 두려움은 언젠가 돌아오지. 그럼 또 뜨거운 사랑을 해야 하고.”

여기에서 ‘죽음’은 문자 그대로 누구도 대신할 수 없고 누구와도 함께할 수 없는, 개개인의 죽음을 의미한다. 그러니 그건 고독이자 공포의 대상이라고 할 수 있다. 홀로 있다는 건 홀로 죽는다는 것에 다름아니니까. 그러니 여자든, 자유든, 글이든, 물고기든, 사자든 상관없다는 말이다. 무엇이든지 사랑하게 되면, 잠시나마 우리는 죽음과 관련한 모든 외로움과 공포를 두려워하지 않게 되니까.

우디 앨런은 ‘마초’ 헤밍웨이의 이면에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그것을 이기려는 처절한 의지를 발견한다. 그는 강함 속에서 약함을, 당당함 속에서 우유부단함을, 고독 속에서 사랑을 찾아냈다. 일흔이 훨씬 넘은 노감독은 그렇게 강해 보이던 헤밍웨이가 왜 자살로 삶을 마쳤는지 직감한 것이다. 헤밍웨이는 죽음을 잊을 수 있을 정도의 강렬한 사랑이 아예 불가능해졌을 때 그 공포에 집어삼켜져 버렸다. 이제야 알겠다. 이 노감독이 고령에도 불구하고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들면서까지 사랑을 다시 시작했던 이유를, 그리고 아주 힘차게 영화를 꾸준히 만들고 있는 이유를. 우디 앨런은 죽음이 던지는 외로움과 공포를 열정적인 사랑으로 이겨내려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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