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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내 모습이 싼 단무지였다면, 지금은 최고급 불도장 된 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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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중국음식은 불과의 싸움이다. 이연복 셰프는 “여름 한철을 보내면 보통 5㎏ 정도는 쉽게 빠진다”고 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사람들은 그를 대가(大家)라고 부른다. ‘중화요리의 대가’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닌다. 요리경력 43년의 달인이라고도 한다. 셰프테이너(셰프+엔터테이너) 붐을 타고 벼락스타가 된 이연복(56)씨 얘기다. 지난 3월 말 JTBC ‘냉장고를 부탁해’에 출연하며 인기 절정에 오른 그는 요즘 웬만한 아이돌이 부럽지 않다. 낯선 사람도 무장해제시키는 편안한 미소, 귀신도 찜 쪄 먹을 현란한 칼솜씨로 시청자의 눈과 귀, 그리고 혀를 사로잡고 있다. 예능 프로그램이든 홈쇼핑이든 이 시대 대세(大勢)의 한 명으로 정신 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가 JTBC ‘냉장고를 부탁해’에서 만든 요리들. 위에서부터 연복쌈·복꽃엔딩·완소짬뽕.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시간이 너무 빡빡해요. 8월 말쯤에는 여유가 날 것 같은데….” 그에게 인터뷰를 청했지만 처음에는 퇴짜를 맞았다. 이런저런 연줄을 동원해 지난 19일 서울 연희동 중식집 목란(木蘭)에서 그를 만났다. 소문 그대로였다. 한창 바쁜 점심이 지난 시간, 예약 없이 들른 수많은 손님이 발길을 돌려야 했다. 다음 달 말까지 빈 좌석이 하나도 없다고 한다. 우리 시대의 권력은 ‘총’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일까.

 - 대가라는 말에 익숙해졌겠다.

 “정말 듣기 싫은 말이다. 어떤 분야든 세상에는 그 위에 수많은 고수가 있는 법이다. 대가는 너무 거창하다. 맞지 않는 옷을 입는 것 같다. 부담스럽다. 방송에서도 더 이상 그 말을 쓰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 양파든 마늘이든 재료 다루는 솜씨가 신기(神技)에 가까웠다. 주변 셰프들도 감탄했고….

 “몇 년 단련하면 누구나 할 수 있다. 놀랄 일이 아니다. 다만 몸에 배어야 한다. 실력이 없으면, 얼렁뚱땅하면 표가 날 수밖에 없다. 칼질 하나, 국자 동작 하나, 몸이 스스로 기억해서 할 정도는 돼야 한다.”

 - 명필 한석봉의 어머니도 생각났는데.

 “그건 한석봉이 어머니에게 사기당한 것이다(웃음). 불 끄고 떡 써는 건 쉬운 축에 속한다. 능수능란한 경지는 아니더라도 주방에 붙어 산 어머니라면 어둠 속에서도 칼을 부릴 수 있다.”

 - 요즘 너무 분주한 것 아닌가.

 “내 자신이 문제다. TV든 잡지든 누가 부탁하면 거절을 못한다. 소위 ‘쿡방(요리하는 방송)’ 시대다. 언젠가 이 열기도 식을 것이다. 하지만 셰프는 남을 것이다. 연예인과 비슷하다. 우리 세대가 사라지면 다음 세대가 뜰 것이다. 삶이 풍족해지면서 맛난 걸 찾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외국에선 다 겪은 일이다.”

 - 남자들의 스트레스가 크다. 여기저기 요리 프로다. 요리가 이 시대 남성의 필수조건처럼 됐다.

 “내가 생각해도 심하긴 하다. 그런데 요리가 들어가야 시청률이 나온다는데 어쩌겠나. 단, 요리는 여러모로 유익하다. 화제가 풍부해져 사교에 좋고 머리를 써야 하니 두뇌에도 좋다. 부부관계도 돈독해진다. 예전 한국 남자들은 설·추석 같은 명절에 아내·며느리에게만 일을 맡겼다. 자기들은 고스톱이나 치면서 말이다. 그게 바람직한 걸까.”

 인터뷰에 응한 이씨는 단서 하나를 달았다. “예전 힘겨웠던 시기는 두 번 다시 묻지 말아 달라”고 당부했다. ‘힐링캠프’ ‘현장토크쇼 택시’ ‘해피 투게더’ 등 여러 방송에서 꺼낸 얘기를 반복하고 싶지 않다는 이유에서다. 초등학교 6학년 중퇴, 나무배달통으로 시작한 중국집 인생, 명동 사보이호텔 호화대반점 수련 시절, 주한 대만대사관 주방장 발탁, 일본에서의 10년 유랑, 한국에서의 정착과 성공 등 가난을 딛고 일어선 지난 세월을 우려먹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20대 중반 축농증 수술로 후각을 잃고 오직 미각 하나로만 승부를 걸어온 그의 전설 같은 사연도 잠시 접어두었다.

이연복씨의 상징과도 같은 중식칼. 그의 이름 석 자가 선명하게 찍혀 있다(사진 위), 이연복 셰프의 팬이 직접 만들어 보내준 캐릭터 스티커. 이씨는 “너무 귀여워 깜짝 놀랐다”고 했다(사진 아래).

 이씨와 마주 앉은 때는 오후 3시. 배가 부르면 혀가 무뎌지기에 그 시간에야 아침을 먹는다는 그다. 그날도 “점심 손님이 모두 나가고 간단하게 요기를 했다”고 했다. 그리고 기자에게 달콤한 캔커피를 권했다. 그는 “냄새를 못 맡기에 아메리카노 커피는 한약과 같다”고 말해왔다.

 - 저녁은 언제 드시나.

 “평소 하루 두 끼만 먹는다. 일과를 다 마치고 밤 9시쯤 집에 돌아가 주전부리를 한다. 맥주 한 잔을 곁들이며 하루의 피로를 푼다. 미각을 유지하기 위해 과음은 하지 않는다. 담배도 13년 전에 끊었다.”

 - 그러고도 체력을 유지할 수 있을까.

 “습관이 되면 문제없다. 소식을 하는 거다. 때론 과식을 하기도 한다. 회와 초밥을 좋아한다. 집에선 거의 밥을 안 먹는다고 보면 된다. 대장장이 집에 식칼이 노는 꼴이다. 진짜 먹고 싶은 게 있으면 사 먹는다. 지인들과 함께 1년에 대여섯 번 모여 다른 맛집을 찾아간다.”

 - 방송 때문에 매출이 줄었다고 하던데.

 “한때 그랬다. 한 달에 2000만원이 준 적이 있다. 원래 코스 위주로 예약을 받았는데 TV를 본 손님들이 짜장면·짬뽕·탕수육을 즐겨 찾았다. 최근 매출이 회복됐다. 2000만원 정도 늘었다. 요즘처럼 행복한 때도 없다. 지난 세월에 대한 보상심리로 방송에 나갔는데 많은 사람이 반겨주니 이보다 더 즐거울 수 없다.”

 - 음식으로 본인의 삶을 정리한다면.

 “인생을 동파육(東坡肉)에 비유한 적이 있다. 동파육을 만들려면 삼겹살을 6시간 이상 조리해야 한다. 반드시 전날 예약을 해야 한다. 그렇듯 삶이란 오랜 기다림이다. 열셋 철부지 나이에 중국집 배달을 했을 때의 모습이 값싼 단무지였다면 지금은 최고급 보양식인 불도장(佛跳牆)이 된 것 같다. 불도장에는 삭스핀·전복·오골계·생선부레·돼지발굽 힘줄 등 값진 재료가 다 들어간다.”

 - 바삭바삭한 탕수육이 화제가 됐다. 홈쇼핑에서도 히트했다. 감자·옥수수 전분에 식용유를 넣은 튀김반죽 비법을 공개했는데.

 “중식 튀김은 일식처럼 튀김옷이 양념소스에 무너지면 안 된다. 전분 비율(감자 대 옥수수 7:3)과 식용유 양을 놓고 많은 실험을 했다. 그 정도는 공개해도 된다. 중요한 건 정성이다. 사람들이 귀찮아서 안 할 뿐이다. 예컨대 짬뽕의 경우 잘 우린 육수와 신선한 해물, 쫄깃한 면발 3박자만 갖추면 된다.”

 - 음식을 맛있게 하는 다른 팁이 있다면.

 “짜장면에 콩가루를 넣어주면 더욱 고소해진다. 또 한식에는 두반장과 굴소스가 어울린다. 아귀찜·낙지볶음·떡볶이 등 한국인이 좋아하는 음식은 매콤달콤하면서도 감칠맛이 있는데, 여기에 두반장과 굴소스를 첨가하면 맛이 깊어진다. 그리고 뭐든 튀겨 먹으면 다 맛있다. 단맛·신맛·짠맛·쓴맛·감칠맛 외에 기름맛이라는 ‘제6의 미각’이 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 유학파 셰프가 많다. 학력 콤플렉스는 없나.

 “전혀 없다. 나 같이 가방끈이 짧은 사람도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지 않았나. 그런 사람이 많이 나오는 사회가 건강하다. 모두 다 공부만 잘하면 세상이 얼마나 재미없겠는가.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다고 자부한다. 젊어서 한때 일자리도 없이 방황한 적이 있다. 내가 나태해지면 가족들이 얼마나 불행해질 수 있는지 절감했다.”

 - 본인이 꼽는 대가가 있다면.

 “글쎄, 옛날 대선배들은 무엇 하나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았다. 후배들을 괄시하곤 했다. 노년이 쓸쓸한 경우가 많았다. 그래도 꼽는다면 서울 서교동에서 진진을 운영하는 왕육성 선배가 있다. 모든 걸 베푸는, 예수나 부처 같은 분이다. 방송을 하면서 유재석·신동엽이 대단하다는 걸 느꼈다. 대스타이면서도 막내 작가·스태프까지 챙긴다. 한마디로 배려, 그게 대가의 자세라고 생각한다.”

[S BOX] ‘칼잡이’ 43년 만에 … 후계자 두 명에게 ‘칼’ 물려줘

지난 5월 29일 이연복 셰프는 본인의 페이스북에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다. “오늘 정식으로 후계자 두 명을 임명했다. 앞으로 내 후계자이자 제자들에게는 내가 사용하는 칼을 징표로 물려준다.”

 칼에는 ‘이연복(李連福)’ 석 자가 오롯이 박혀 있다. 그가 TV에서 사용하는 중식도(中食刀)와 같은 종류다. ‘칼잡이 인생’ 43년 만에 처음 맞은 제자, 불교용어를 빌리면 그의 ‘법(法)’을 물려받은 이는 박형한(35)·이형근(26)씨다. 이씨가 칼에 자기 이름을 새긴 건 방송으로 유명해진 이후의 일이다. “나름 스타가 된 까닭인지 자칭 제 밑에서 배웠다는 사람들이 생겼어요. 저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데 말이죠. 이래선 안 되겠다, 그런 생각에서 칼을 제자의 징표로 삼게 됐죠.”

 이씨가 제자로 삼는 조건은 첫째도 인품, 둘째도 인품이다. “실력이 조금 늘었다고 건방 떨기 시작하면 그건 끝장입니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고 하잖아요. 기술은 배우면 됩니다. 시간이 흐르면 일정 수준에 오를 수 있어요. 하지만 마음만은 그렇게 할 수 없죠.”

 박형한씨의 팔은 기름으로 덴 화상투성이다. “셰프님은 늘 청결과 겸손을 강조하세요. 저희 사이에 ‘잘한다’ ‘맛있다’ ‘최고다’라는 말은 금물입니다”라고 답했다. 이씨에게는 비공인 연예인 제자가 둘 더 있다. ‘냉장고를 부탁해’에서 사제의 연을 맺은 웹툰 작가 김풍과 또 다른 방송 ‘오늘 뭐 먹지’에서 만난 가수 성시경이다. 그들에게도 번쩍이는 칼이 수여됐다.

글=박정호 문화·스포츠·섹션 에디터 jhlogos@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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