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약재 쓰는 한의원 … 노원구 주민들 스스로 만들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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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을 모아 불우이웃을 돕는 건 어때요.” 2013년 10월 서울시 도봉구 초안산 생태공원에서 공원 청소를 끝낸 두호균(51)씨가 나무 사이로 비치는 햇볕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나이가 들면 봉사도 못할 텐데 ‘지속가능한 봉사’를 해보는 겁니다.” 함께 공원 청소를 마친 자원봉사단 10여 명이 호기심 가득 찬 눈으로 두씨를 바라봤다. “태양광 발전소를 만들고 거기서 번 돈으로 불우이웃을 도우면 평생 좋은 일 할 수 있잖아요.” 일행은 두씨를 따라 하늘을 올려봤다. 머리 위에 쏟아지는 따뜻한 햇살을 바라보곤 조그만 탄성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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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날 두씨는 봉사자 7명과 함께 ‘지속가능한 봉사’ 모임을 결성했다. 태양광 발전기 설립 비용과 연간 운영비, 예상 수익 등을 조사했다. 문제는 수천만원에 달하는 설립 비용을 모으는 것이었다. 20㎾급 태양광 발전기 하나를 설치하는 데 총 6100만원의 비용이 들었다. 두씨는 평소 지역 봉사활동을 하며 알고 지낸 구청의 나현천 자치행정팀장을 찾아가 고민을 털어놨다. 구청 측은 선뜻 2900만원의 예산을 설립 비용으로 지원해주겠다는 제안을 했다.

 하지만 나머지 3200만원은 여전히 두씨와 주민들의 몫이었다. 그는 평소 봉사활동에 적극적이었던 사람들을 한 명 한 명 방문해 태양광 발전기 설립계획을 말하고 모금을 부탁했다. ‘지속가능한 봉사’라는 취지에 공감한 주민들이 한 명 두 명 모금에 동참했다. 주부 박경남(43·여)씨는 “한 번 설치하면 불우이웃에게 지속적인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아이디어가 마음에 들었다”며 100만원을 기부했다. 꼬깃꼬깃한 5000원짜리 한 장을 들고 온 고등학생부터 정성껏 모아둔 쌈짓돈 5만원을 들고 나온 할머니까지 구민 1100명이 동참했다. 모금 두 달 만에 3200만원이 모두 모였다.

 지난해 11월 도봉구립도서관 옥상에 설치된 태양광 발전기가 가동을 시작했다. 가로 17m, 세로 7.5m의 발전기는 매일 3시간씩 가동돼 60㎾의 전력을 생산한다. 이를 다시 한국전력에 팔아 연간 800만원가량의 수익금을 얻는다. 두씨는 “햇볕이 없어지지 않는 한 매년 800만원의 불우이웃 돕기 성금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구청의 구희관 에너지팀장은 “전력 생산 수익으로 연간 200가구의 저소득층 전기 요금을 지원할 수 있다”고 말했다. 주민들은 12월 2호기를 설치하는 등 발전기 개수를 늘려 전력 생산량을 늘릴 계획이다. 이동진 도봉구청장은 “주민들의 생생한 아이디어와 적극적인 참여를 구청이 뒷받침하면서 지역 발전의 새로운 모델을 선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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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의적인 아이디어로 지역의 미래를 바꾼 사례는 도봉구뿐만이 아니었다. 노원구에는 주민들이 직접 돈을 모아 만든 ‘함께걸음’ 한의원이 있다. 지난 11일 이 한의원에 장모(36·여)씨가 두 살배기 아들을 안고 찾아왔다. 장씨는 “아이에게 녹용을 달여 먹이고 싶다”고 요청했다. 장씨의 얘기를 한참 듣던 한의사 이상재(33)씨는 아이를 끌어안고 여기저기 맥을 짚더니 “약 지을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장씨는 처음엔 당황했지만 “건강하고 순한 몸에 부담을 줄 필요 없다는 한의사의 말에 더 큰 믿음이 생겼다”고 말했다.

 이 한의원은 과잉진료를 줄이고 좋은 약재를 쓰는 병원을 만들자는 취지에서 일반주민들과 의료봉사 활동을 해온 ‘함께걸음’ 사회적협동조합이 공동 설립했다. 500여 명이 1억5000만원을 모았다. 시중 한의원보다 약값 등이 20%가량 싸고 과잉진료를 하지 않기 때문에 주민들의 만족도가 높다. 기존 조합원이 아니더라도 가입비 5만원과 매달 1만원씩 회비를 내면 한의원을 이용할 수 있다. 이상재 한의사는 “영리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원산지가 확인된 좋은 약재만 쓴다. 입소문을 타고 다른 지역에서 오는 환자들도 종종 있다”고 말했다.

 한의원이 인기를 끌자 지난해 8월엔 치과도 개원했다. 주민 1200여 명이 3억원을 모았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매일같이 조합원 수가 늘더니 현재는 1400명이 넘는 인원이 가입돼 있다. 강봉심 함께걸음 이사는 “과거엔 항생제를 처방해 빨리 낫게 하는 병원이 좋은 병원이었지만 이제는 시간이 걸려도 ‘건강하게 병을 낫게 하는 병원, 병에 안 걸리게 하는 병원’이 좋은 곳”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런 믿음으로 조합에 가입하고 병원을 만들게 됐다”고 설명했다.

 병원에서 얻은 수익은 ‘건강한 마을’을 만드는 데 쓰인다. 건강체조교실, 똑똑한 의료소비자가 되기 위한 교육 등을 실시한다. 마을을 가꾸는 일에도 적극적이어서 장애인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식당 문턱을 없애고 마을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는 운동회도 연다. 내년부터는 사회복지공동모금회와 노원구의 도움을 받아 장애인 100명에게 주치의를 짝 지어주는 ‘마을 속 주치의’ 제도를 준비 중이다. 함께걸음 한의원 초대 원장 박수현(35·여)씨는 “봉사활동으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마을의 구석구석을 비추는 의료 복지제도로 진화했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윤석만·노진호·백민경·김민관 기자, 정현령·전다빈 인턴기자, 서울대 한국정치연구소 김준영·김한울 연구원 sam@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