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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를 여행으로 배웠네]<26>나의 에단 호크를 찾아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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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다 영화 ‘비포 선라이즈’ 때문입니다.

이게 다 너 때문.

유럽의 어느 열차 칸에서 에단 호크를 만나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 건요. 미천한 중생이었지요. 사회 초년병 시절이었습니다. 로마 인, 파리 아웃 왕복 티켓을 끊고, 마음이 있는대로 부풀었습니다. 일단 유럽에 가면 당신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접니다. 리즈 시절의 에단 호크.

비행기를 타기 전부터 마음이 두근두근 했습니다. 왠지 옆 자리에 에단 호크가 앉을 것 같았거든요. 10시간 넘게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단독 찬스’가 될테니까요. 그런데 이게 뭐람. 창가 자리에 앉자마자 제 옆으로 아주머니 두 분이 나란히 앉으시더군요.

로마에는 로베르토 베니니라도 있겠지.

“아유, 아가씨 혼자 가나봐. 애인은 있고?”
행복해보였습니다. 자식들이 효도 관광을 보내준거라네요. 10시간 넘게 아주머니들의 수다에 동참했습니다. 아주머니들께 탈탈 털리고 보니 진이 빠졌습니다. ‘그래, 이제 시작이니까.”

로마의 가을은 청명했습니다. 왔노라, 보았노라, 사귀었노라를 마음에 새기고 예약해두었던 한인 민박 집으로 향했습니다. 여행의 매력이란 출신 성분이나 사회적 배경을 제쳐두고 본연의 나 자신으로 돌아가는 것이겠지요. 누구를 만나더라도 우리는 벌거벗고(심적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 꿈에 부풀어 민박집에 들어섰습니다. 일단 사람이 많더라고요. 남자도 많고요. 그런데 스무살 꼬맹이들이란게 문제였습니다.

누나, 누나! 트레비 분수 사줘요!

“누나, 누나! 맛있는 거 사줘요!!”
어찌나 다들 넉살이 좋던지요. 저는 졸지에 유치원 교사가 되었습니다. 아이들을 이끌고 로마의 밤거리를 걸었습니다. 트레비 분수에서 괜히 뒤돌아 동전도 던져보고 스페인 광장도 하이에나처럼 어슬렁거려 보았습니다. 애들이 목이 마르다면 술을 사주고, 입이 심심하다면 아이스크림을 사줬습니다. ‘그래, 배낭여행객들이 무슨 돈이 있겠니.’ 그런데 뭐랄까요. 남 걱정하다가 로마에서 제가 거지가 될 판이었어요. 훌쩍.

책이나 보자.

피렌체로 향했습니다. 기차에서는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로마의 밤거리를 어찌나 ‘파워 워킹’했던지 곯아 떨어져 버렸거든요. 피렌체에서 저는 진정 혼자였습니다. 괜히 두오모 꼭대기에 올라 ‘냉정과 열정 사이’의 아오이와 준세이를 흉내 내봤습니다. 찬바람이 얼굴을 때렸습니다. 더 서글퍼졌습니다.

여긴 두오모. 춥다.

베니스의 아침이 밝았습니다. 두둥. 저는 이 곳 민박집에서 드디어 에단 호크 비스무리한 남자를 만났습니다. 신은 저를 버리지 않으셨더라고요. 괜찮은 청년이었고, 말도 잘 통했습니다. 이상하게 일정이 맞아서(맞춰서) 함께 여행을 다녔습니다. 페리를 타고 인근 무라노 섬과 부라노 섬을 돌아보며 꿈만 같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베니스에선 너를 만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날 저녁! 우리는 술을 마시기로 했습니다. 유후. 취기가 오르고, 분위기도 무르 익었습니다.
"문자 왔셩! 문자 왔셩!"
호크님의 방정맞은 문자 알림음이 들렸습니다. 문자를 재빨리 확인한 호크의 낯빛이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더니 갑자기 훌쩍거리더군요.
‘이건, 뭐지. 나를 만난 게 그렇게 감격스러운가.’
“왜 그래, 왜 울어? 무슨 일이야.”
“나 사실……. 여자 친구가 있었는데, 갑자기 헤어지자고 하길래 열받아서 비행기를 탄거야. 그런데 지금 연락이 왔어. 자기가 미안하대. 내가 보고싶대.”
“아.....”
제기랄. 저는 이역만리 베니스의 술집에서 우는 아이를 한참 달래다가 숙소로 돌아왔습니다. 아. 베니스에도 신은 없었습니다.

베니스에서의 죽음.

마지막 행선지인 파리에서 저는 헛된 욕망을 버리고 관광에 집중했습니다. 하지만 단 한 곳, 꼭 가봐야 할 데가 있었습니다. ‘비포 선라이즈’에서 헤어진 두 사람이 9년 후 재회했던 ‘비포 선셋’ 기억하시죠. 두 사람이 다시 만난 곳이 바로 파리의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라는 작은 서점이었습니다. 마침내 이 서점에 당도한 저는 한참을 기다리고 기다렸습니다. 당신은 나타나지 않더군요. 저는 누구를 기다린 것일까요. 저는 서점에 딱 한 권 남았던 ‘비포 선라이즈’와 ‘비포 선셋’ 대본집을 샀습니다. 그 책을 가슴에 품고 스스로를 다독였습니다. ‘이걸로 됐다. 이걸로 된거야.’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 서점.

에필로그) 다시 휴가의 계절입니다. 그렇게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고 몸소 겪고 나서도, 또 다시 열차 칸에서 우연히 당신을 만나기를 고대합니다. 가보기 전엔 모르는게 여행의 매력이라고,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에단 호크는 '비포 선라이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은 혼자되기 두려운 두 사람의 도피 같아. 무조건 주는 게 사랑이라는 건 다 개소리야. 사랑은 이기적이지." 미리 공지해드릴게요. 8월 셋째주 수요일 오후 3시, 파리의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 서점에서 혼자되기 두려운 당신을 기다리겠습니다. 그러니까 거기서 만나요.

우리 거기서 만나요.

줄리 델피 기자 MeetMeThere@joongang.co.kr

※기자 이름과 e메일 주소는 글 내용에 맞춰 허구로 만든 것입니다. 이 칼럼은 익명으로 게재됩니다. 필자는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 중 한 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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