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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소련, 북한군을 남진에 써먹을 것”… 전쟁 가능성 예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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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1948년 4월 22일 평양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에 참가한 김구 선생(위 사진 오른쪽)이 김일성과 함께 회의장으로 걸어가고 있다. [사진 중앙포토·우드로윌슨센터]

1948년 4월 19일. 김구 선생은 38선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는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 협력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밝히고 평양으로 향했다. 유엔이 5월 10일 남한에서 단독선거를 예정해 둔 상황이었다. 그는 김규식 선생과 함께 평양 ‘남북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에 참석해 김일성 위원장을 만났다. 당시 김구 선생의 북한행에 대해 진보·보수 진영은 물론 학계에서도 여러 평가가 나온다. 김구 선생이 남한에 단독정부가 수립되는 것을 막기 위해 죽을 각오로 북한과 협상에 나섰다는 견해가 우세하지만, 일각에서는 대한민국의 건국을 반대하고 공산주의자에 속아 이용당했다는 부정적 평가도 나온다.

 미국 외교안보 싱크탱크인 우드로윌슨센터의 ‘북한 국제문서 프로젝트’는 지난달 24일 ‘김구-리우위완(劉馭萬)’의 비밀 대화록(1948년 7월)을 공개하며 보고서를 냈다. 대화록은 당시 장제스(蔣介石)의 중화민국 서울 공사인 리우위완이 1948년 7월 11일 경교장으로 김구를 방문, 북한 방문에 대해 묻고 답한 내용이다. 이승만박사 기념사업회 측은 몇 년 전 이화장에서 발견된 대화록을 학계에 공개했고 일부 진영에선 김구 선생이 ‘대한민국 건국에 반대했다’는 논거로 사용해 왔다.

대화록을 작성한 리우위완 중화민국 서울 공사(왼쪽)와 우드로 윌슨센터가 공개한 김구·리우위완 대화록(오른쪽)의 일부. [사진 중앙포토·우드로윌슨센터]

 ◆김구 “남한에서 무슨 노력을 하더라도 공산군에 맞서는 군대를 건설할 수 없다”=대화록에서 김구 선생은 “내가 (평양에서 열린) 남북한 지도자 회의에 참석한 한 가지 동기는 북한에서 실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알아보려는 것”이라며 북으로 간 이유를 스스로 밝혔다. 그러면서 “공산주의자들이 앞으로 북한군의 확장을 3년간 중단하고, 그사이 남한에서 무슨 노력을 하더라도 공산군의 현재 수준에 맞서는 군대를 건설하기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일부 진영에선 이 발언이 ‘한반도의 공산화가 불가피하다는 인식’이라고 주장한다. 그가 “소련 사람들은 아주 손쉽게 북한군을 남진하는 데 써먹을 것이고, 단시간에 여기서 인민공화국이 선포될 것”이라고 언급해서다. 하지만 우드로윌슨센터의 보고서는 “김구는 스스로를 공산주의자로 생각하지 않았다”며 “그는 평양에서 생각보다 북한이 더 위험하다는 걸 알게 됐다”고 분석했다. 남한 지도자가 북한의 군사력 확충과 전쟁 가능성을 인지한 것이 핵심이라는 것이다.

 ◆리우위완 “소련은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이에 대해 리우 공사는 “소련은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며 “유엔을 통해 세계 여론이 일어나면 소련은 그 충격 앞에서 다시 굴복할 것”이라는 견해를 밝힌다. 두 사람의 시각은 당시 ‘남북협상파’와 ‘단독선거파’로 갈라진 남한 지도자들의 생각을 대변한다. 보고서는 두 시각 모두 전쟁 주체가 ‘소련’이 아니라 ‘북한’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했다고 분석했다. 보고서는 “소련이 남침에 녹색등을 켜주긴 했지만 김일성의 강력한 요구가 있었기 때문에 전쟁이 발생했다”며 “김구는 미국이 한국 방어를 위해 나서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지만 그 부분도 틀렸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당시 북한은 북조선인민위원회를 수립하고 16만 명의 군대를 양성하고 있었다. 한국의 지도자들은 ‘소련이 전쟁을 벌일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김일성이 스탈린을 설득할 것’이라는 판단은 하지 못했다.

 ◆리우위완 “이승만, 김규식과 함께 협력해 달라”=대화록의 도입부를 보면 리우 공사는 “제 말이 거슬릴 수 있지만 오늘 정직한 사람 간의 대화를 위해 방문했으니 이해해 달라”며 작심한 듯 이야기를 쏟아낸다. 주로 김구 선생을 회유했는데, 그는 “선생의 아들 김신을 나의 친구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하는 말이 거슬리시더라도 아들이 자신의 아버님에게 진심으로 드리는 말씀이라고 생각해 달라”며 읍소한다. 리우위완은 유엔한국위원단의 일원으로 김구 선생이 견지하던 단정 반대 입장과는 거리가 있었다.

 리우 공사는 중국 국민당 위티에청(吳鐵城) 비서장과 외교부장 왕스제(王世杰), 장제스 총통의 편지를 언급하며 “이승만·김규식과 함께 협력해 달라”고 요구한다. 그러면서 “만약 선생께서 공산주의에 가담하실 생각이라면 부디 말씀해 주셔야 한다”고 말한다. 김일성을 만나고 온 김구 선생을 의심하는 발언이었다. 리우 공사는 “선생이 평양 남북한 지도자 협의회에 관계하신 일은 그동안 찬란한 애국 활동에 타격이 된 일”이라며 “중국에서 공산주의자의 포로가 된 조선인들이 ‘김구 지지자’라며 목숨을 구걸한다”는 이야기까지 한다.

 ◆김구 “나는 반미주의자로 색칠당했다”=이에 김구 선생은 “나도 잘 알고 있다. 모든 사람이 내 입장을 곧 알게 될 것”이라고 공산주의와 선을 긋는다. 이어 “그렇다고 내가 남한 정부에 참여한다는 뜻은 아니다. 귀하도 알다시피 이(승만) 박사는 한민당의 포로가 되어 그들이 하자는 대로 해야 하는 신세”라고 비판한다. 민족주의에 기반한 중도 입장을 다시 한번 밝힌 것이다. 이어 김구 선생은 “나는 중국과 미국만이 한국에 도움이 되는 나라라고 생각하는데도 한 특정 정당의 비방전에 의해 반미주의자로 광범위하게 색칠당했다. 우리가 나라를 건설하는 데는 미국의 도움이 필요한데 내가 정부에 들어가면 미국인의 동정심에 찬물을 끼얹어 국가 이익을 해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반미주의자라는 일각의 오해에 대해서도 반박한 것이다.

 지난달 26일은 김구 선생이 육군 소위 안두희에게 저격당해 서거한 지 66년이 되는 날이었다. 광복이 된 지 7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보수·진보 진영 및 학계에서는 김구 선생에 대해 서로 다른 시선을 드러내고 있다. 리우위완 대화록에 드러나는 김구 선생에 대한 평가도 극명히 갈린다. 한시준 단국대 동양학연구원장은 “김구·리우위완 대화록은 지금까지 ‘김구 선생이 북한이 남침할 것을 알면서도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는 논거로 사용되어 왔지만 좀 더 객관적인 접근이 필요한 사료”라고 말했다.

[S BOX] 1948년 4월 평양에서 남북지도자회의 → 5월 남한 단독선거 → 김구, 무효화운동

한국은 1945년 해방 후 12월 모스크바 3국(미·영·소) 외상회의에서 신탁통치안이 결정돼 미·소공동위원회의 통치를 받고 있었다. 김구 선생은 “민족 자결의 원칙을 고수하는 한민족의 총의에 위반된다”는 입장을 밝히고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를 만들어 반탁운동을 전개 중이었다. 소련은 46년 2월 북조선인민위원회를 수립하고 인민군 16만 명을 양성하고 있었다. 미국은 한반도 총선거로 합법적 민주정부를 수립하고자 했지만 소련의 반대로 무산됐고 한국 문제는 47년 9월 유엔으로 이관됐다. 유엔은 11월 ‘유엔 감시하에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할 것’을 결의했다. 이즈음 한민당 장덕수 정치부장 암살 사건이 발생했고 이승만과 한민당 등은 김구 선생을 배후로 의심하며 관계를 단절했다.

 이후 소련은 48년 1월 유엔 임시위원단의 입국을 거절하고 북한은 4월 남북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를 개최키로 했다. 김일성과 김두봉은 김구·김규식 등 남한 인사를 초청했고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던 김구 선생은 북한 연석회의에 참석했다. 김구 선생이 돌아온 후 5월 10일 남한에서 단독선거가 치러졌다. 김구 선생과 김규식 박사는 6월부터 통일독립촉성회를 결성하고 선거무효화운동을 펼쳤다. 리우위완 공사와의 비밀 대화는 이즈음인 7월 11일 이뤄졌다.

정원엽 기자 wannab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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