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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오디세이] 70년이 흘러도 왜 싸우는가 … 압록강 단교는 묻고 있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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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압록강을 지나는 북한의 낡은 목선. 뒤로 신압록강대교가 보인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한반도에서 서해로 유입되는 강물은 연간 1200억t이다. 나는 숫자를 옮겨 적을 뿐, 이 물량의 규모를 상상하지 못한다. 압록강은 이 하해와도 같은 물의 23%(280억t)를 쏟아내고 한강이 16%, 금강이 6%, 황하가 40%를 차지한다.(고철환의 논문 『황해의 환경과 물질지수』 중에서)

 서해는 한반도와 중국 대륙 사이에서 오목하다. 밀물 때 서해의 힘은 북진한다. 물의 세력은 북쪽으로 갈수록 강력해져서 연안에 넘치고 발해만의 후미진 구석까지 가득 찬다. 그때 바다는 부풀어서 대륙을 압박하고 고깃배들은 물의 힘에 올라타서 포구로 돌아온다. 밀물 때 강들은 하구(河口·River Mouth)를 열어서 바다를 받는다. 조국의 강들은 남쪽부터 영산강·동진강·만경강·금강·한강·대동강·청천강 순서로 열리는데, 압록강 하구는 조차(潮差) 4m의 힘으로 바다를 받아들여서 먼 산골까지 바다의 기별이 닿는다. 강이 바다를 받아들이는 물리현상을 과학자들은 감조(感潮)라고 하는데, 나는 이 단어에서 산맥과 바다가 붙고 엉키는 조국 산하의 관능을 느낀다. 압록강은 이 관능의 북단이다. 

 나는 1948년, 분단된 한반도 남쪽에서 태어났고 그 자리에서 벌어먹고 살다가 늙었다. 이 운명은 내가 선택하거나 기획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별수 없이 이 질곡을 받아들이면서도 거기에서 벗어날 길을 찾아서 발버둥 쳤지만, 어느 쪽도 온전히 이룰 수는 없었고 버둥거릴수록 자기 분열은 깊어졌다. 나는 2015년 여름에, 남은 시간이 많지 않을 것임을 스스로 아는 나이가 되어서 처음으로 압록강·두만강·백두산과 그 언저리를 관능이 작동되는 가시적 거리에서 바라볼 수 있었다. 세월이 거꾸로 흘렀던지, 분단 70주년에 이르러 대량학살무기를 앞세운 적대관계는 극한으로 치달았고 여전히 갈 수 없는 강 건너 쪽 사람 사는 동네를 나는 겨우 망원경 구멍으로 들여다보았는데 그 구멍 속의 상념들도 1948년에 38선 이남에서 태어나 거기서 늙은 자의 자기 분열을 넘어서지는 못할 것이다.

 이번 여행에서 선양(瀋陽)은 다만 경유지였다. 선양공항에서 버스를 타고 단둥(丹東)으로 직행했다. 박지원(朴趾源·1737~1805)이 갔던 길을 거꾸로 가는 셈이었다. 선양에서 단둥까지는 일망무제의 벌판이었다. 좌청룡도 우백호도 거기에는 없었고 시선은 지평선 속으로 녹아들었다. 박지원은 대륙을 향해서 “한바탕 통곡하기 좋은 땅”이라고, 개벽하는 신천지의 감격을 토로했다. 그의 통곡은 살아 있는 인간의 몸과 대지와의 교감을 보여주는데, 아마 그 교감과 트임은 몸으로 걸어서 대륙을 건너가는 자에게 가능할 것이고 고속도로를 시속 80㎞로 달리는 버스 안에서는 걷는 자의 대지로부터 오는 직접성의 축복은 불가능해 보였다.

 내 고향 서울은 이 길의 맨 끝이다. 선양에서 단둥으로, 단둥에서 압록강을 건너서 의주로(義州路)를 따라 남행하면 그 길의 맨 끝,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 고가차도 밑에 영은문(迎恩門)의 주춧돌 한 쌍이 남아 있다. 단둥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나는 내 고향 서울의 영은문 주춧돌을 생각하고 있었다. 헐리기 직전 사진을 봤더니 영은문은 날아갈 듯 경쾌했고 길 건너편에 가난한 백성들의 초가집이 모여서 마을을 이루고 있었고 웬 사내가 허리를 굽혀서 일하고 있었다. 단둥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나는 박지원과는 반대 방향을 향해 한바탕 ‘통곡’하고 싶었다. 방금 쓴 문장에서 나의 ‘통곡’은 과장되어 있을 것이다. 개인의 삶이나 나라의 역사가 영광과 자존만으로 성립될 수는 없겠고 치욕과 수난을 또한 감당해야 할 터이다. 세계의 질서가 인간의 편인 것도 아니고 강자가 못할 것이 없듯이 약자도 살아남기 위해 못할 것이 없을진대 영은문을 향해서 뒤늦게 통곡할 필요는 없으리라고 나는 나 자신을 위로했다. 그러나 나의 자위에도 불구하고 단둥으로 가는 길 위에서 영은문은 내 마음의 바닥에 남아 있었다.

 1897년 무렵 중국의 힘은 돌이킬 수 없이 무너져 있었다. 그때 개화적인 선구자들이 영은문을 헐고 ‘독립문’을 세웠는데, 내가 며칠 전에 가보니까 청소년들이 놀러와서 ‘문립독’이 뭐냐고 저희들끼리 물어보고 있었다.

 사나운 대륙의 군대들은 모두 선양에서 발진했다. 당나라 ·몽고 ·금나라 ·청나라 군대와 6·25 때 ‘항미원조전쟁’에 돌입한 마오쩌둥(毛澤東) 군대의 주력이 모두 선양에서 발진해 단둥에서 강을 건넜고 의주로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왔다. 외국 군대가 물러가면 사대(事大)의 긴 대열이 그 길을 따라서 선양으로 갔다. 대열은 소리를 지르고 꽹과리를 때려서 늑대를 쫓으면서 이 길을 따라서 눈 덮인 대륙을 건너갔다. 이 사대의 대열에 끼어들어서 전복과 저항, 해체와 재구성의 이념과 실천방안이 또한 흘러들어 왔으므로 ‘길에는 주인이 없어서 그 위를 걷는 자가 주인이다’라는 선인(신경준·申景濬·1712~1781)의 옛글은 여전히 새로운데 그 주인 없는 길이 바로 선양~단둥~서울을 잇는 의주로다.

 저녁 무렵 단둥에 도착했다. 단둥의 중심가는 온갖 접객업소들의 네온사인으로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다. 호텔 앞 4차로 건너편이 압록강이었다. 강둑에서 젊은 남녀가 오랫동안 키스했다. 남자들이 허연 허벅지를 드러낸 여자를 오토바이 뒷자리에 태우고 저무는 강의 하구 쪽으로 질주했다. 압록강을 거슬러온 밀물이 호텔 앞 둑방에 와서 철썩거렸다.

 단둥의 본래 지명은 안둥(安東)이었는데, 문화대혁명의 기운이 태동하던 1965년에 마오쩌둥 정부는 이 도시의 이름을 단둥(丹東)으로 바꾸었다. 동방을 붉게 물들이는 최전선의 도시, 혁명의 수출기지라는 뜻이었다. 강 건너 신의주는 불빛이 없고 순결한 고구려의 밤이 보존되어 있었다. 국경의 서치라이트가 어둠을 훑었다. 단둥은 강 건너 쪽을 붉게 또는 어둡게 물들이는 데 성공한 것으로 보였는데 단둥의 첫인상은 휘황찬란하고 생기발랄하고 자본의 도시였으며, 그 자본은 이제 초기의 축적 단계를 넘어서 투자를 끌어들여서 팽창을 도모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호텔 방에서 밤의 단둥 거리를 망원경으로 살폈더니 ‘사회주의의 핵심 가치를 보존하자’는 정치구호가 적힌 현수막이 여기저기 걸려 있었다. 팽창하는 자본의 힘 앞에서 단둥은 전환을 향한 자기 분열을 일으키고 있었다. 

 23일 오후에 유람선을 타고 압록강 하구를 돌아보았다. 배는 강 건너 신의주 쪽으로 바싹 접근했고 위화도 어귀에서 유턴했다. 북한 여인들이 강가에서 빨래를 하고 있었다. 북한 여인들이 머리에 수건을 쓰고 쪼그려 앉은 자세는 어렸을 때 내 엄마나 이모의 폼과 똑같았다. 빨래를 마친 여인들이 대야를 머리에 이고 돌아갔다. 멀어서, 북한 여인에게 말을 걸 수 없었다. 멀었지만, 여자라는 느낌은 전해져 왔다.

 그 여인들의 마을은 칠을 하지 않은 단층 건물들이 회색빛 자연 취락을 이루었고 그 건물 위에 ‘선군 조선의 태양 김정은 장군 만세’라고 적힌 선홍색 현수막이 걸려서 회색과 선홍색이 극명한 대비를 보여주었다. 사내들이 허리를 굽혀서 뻘에서 무언가를 줍고 있었다. ‘인흥433’이라는 선명(船名)을 가진 배는 7~8t쯤 되어 보였는데 강의 상류 마을과 하류 마을 사이에서 여객과 짐을 실어나르고 있었다. 작은 배들도 모두 인민공화국 깃발을 달고 있었는데, 깃발은 해풍에 삭은 것이 없고 모두 다 선명했다. 배들은 강을 가로질러서 단둥 쪽으로 오지 못하고 위아래로 오르내렸다. ‘중강진’이라는 이름의 배는 1호에서 6호까지 보였는데 모두 대형 크레인을 장착한 준설선이었다. 압록강 하구에서 모래 파기는 매우 중요한 사업으로 보였다. 

 임진왜란 때 임금은 이 강가까지 쫓겨와서 문장을 지었다.

 “우리 땅이 다 끝났으니, 나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신하들이 끌어안고 울었다. 6·25전쟁 때 끊어진 압록강 단교(斷橋)에도 이 극변(極邊)의 정서는 배어있었다.

 1950년 10월 하순에 중공군은 이미 북한의 산하로 이동하고 있었다. 미군은 중공군의 개입 규모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없었고 공군력이 없는 중공군의 군사적 능력을 과소평가했다. 중공군 30만 명은 눈이 내리듯이 조용히 북한의 산하로 이동했다. 펑더화이(彭德懷) 사령부는 선양에 병참기지를 건설하고 선양~단둥~신의주의 보급축선으로 군수물자를 운송했다.

 50년 11월 8일 미 공군 전투기 600대가 신의주를 폭격했고 소이탄 8500발로 신의주를 불태웠다. 미군은 압록강 하구에 항공모함을 대놓고 함포사격을 퍼부었다. 신의주는 가루가 되었다. 압록강 철교 폭파작전에는 미 극동군 소속 B-29 폭격기 79대가 출동해서 교량에 450㎏의 폭탄을 투하했다(자료:『6·25전쟁 1129일』 이중근 편저). 압록강 철교는 북한 쪽에서부터 4개 교각 구간이 끊어졌는데, 중국 쪽 국경선을 건드리지 않으려고 폭격기 조종사들은 고난도 기술을 발휘했다. 이날 날씨가 맑아서 조종사들은 넓은 시야를 확보할 수 있었고 목표물 식별에 어려움이 없었다. 지금 압록강 철교가 끊어진 자리에는 녹아내린 철강재들이 용암이 흘러내리는 모습으로 굳어져 있다. 단교는 ‘고전적 혁명유적지’로 보전되어 있고 30위안의 입장료를 받는 국제관광명소다. 단교 입구에는 북한으로 진공하는 인민해방군 보병 대열의 모습이 투박한 부조상으로 조각되어 있다. 보병들의 무장은 소총 한 자루뿐이었다. 그 뒤에는 만주로 진공하던 시절 일본 군대의 토치카가 ‘침략의 증거물’로 보존되어 있다. 중국 측 설명문에는 “침략자 미군이 중국 정부의 경고를 무시하고 전쟁의 불씨를 압록강까지 몰고 와서 중국 국경에서 총질을 함으로써 중국 인민에게 엄중한 위협을 가했다”라고 적혀 있었다. 50년 연말부터 중공군은 30여 개 사단으로 밀고 내려왔다. 국군과 유엔군은 압록강·두만강 전선에서 후퇴했다. 동부전선은 장진호 전투에서 수많은 사상자·동사자를 내면서 흥남 철수에 성공했고 서부전선은 의주로를 따라 밀려 내려와 1월 4일 서울을 다시 내주었다. 후퇴한 부대들이 압록강물을 수통에 담아와서 이승만 대통령에게 바쳤다. 대통령은 물을 마셨다. 그때, 내 엄마는 두 살 된 나를 포대기로 업고 부산으로 피란 갔다. 아 젊은 엄마는 어린 우리 삼남매를 끌고 어떻게 눈보라 속에서 부산까지 갔던 것일까.

 내가 자라서 신문을 읽을 수 있게 되었을 때 나는 내가 두 살 때 이 나라에서 발행된 신문을 모두 찾아서 읽었다. 지옥이 현실 속에서 펼쳐져 있었다. 1월 초부터 대통령은 시민들에게 말했다. 피란을 가고 안 가는 것은 각자 임의로 하라, 정부가 관여할 수 없다. 갈 곳이 있고, 갈 수 있는 사람은 가는 것도 무방하겠다. 피란은 명령이 아니고 권유도 아니다. 다만 날씨가 추우니 피란을 갈 때는 식량과 이부자리를 지참하라. 근신자재하고 태연자약하라. 경거망동하지 말고 일희일비하지 마라. 질서를 지켜서 문명한 국민의 성숙도를 보여달라 ….

 50만 피란민의 대열이 300리에 걸쳐서 남쪽으로 이어졌다. 고관대작들이 군용차, 관용차를 징발해서 가재도구와 처자식을 싣고 피란민들의 대열 사이로 먼지를 일으키며 질주했다. 국방부 참모가 성명을 발표해서, 제발 이런 짓을 하지 말라고 호소했다. 국방부 성명은 피란민들에게 버리고 가는 김치나 간장·된장이 있으면 가까운 군부대에 전달해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이 모든 지옥의 참상은 선양에서 단둥으로, 압록강 단교를 건너서 밀려 내려온 것이었다. 내 생애의 시발점에서, 압록강 철교는 끊어져 있었고, 그 지옥이 빚어내는 모든 조건들이 내 삶의 기초 환경이었다. 그러므로 내 고향은 의주로 맨 끝인 서울이 아니라 바로 이 압록강 단교일지도 모른다.

 지금, 끊어진 압록강 철교의 녹슨 철강재들이 여름의 폭양을 받아서 뜨거운 비린내를 풍기고 있다. 그 단교에서는 강의 로망이나 강의 서정을 생각할 수 없었다. 너는 지금 어떠한 나라, 어떠한 시대에 살고 있느냐. 너의 두 살 때부터 지금까지 무엇이 변했고 무엇이 변하지 않았는가. 너는 왜 같은 자리에 주저앉아 있는가, 너희들은 왜 70년 전의 싸움을 아직도 싸우고 있는가를 그 끊어진 다리는 가혹하게 묻고 있었다. 강 건너 마을에서 이집 저집 연기가 올랐다. 무엇을 끓이는지 무엇을 태우는지 알 수가 없었다.

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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