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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 정치와의 충돌은 해법 안 돼…안정적 정치의 전제는 소통

중앙일보

입력

윤성이 경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1990년대 사람들은 지하철 안에서 신문이나 책을 있었다. 이제는 그 자리를 스마트폰이 대신하고 있다. 2000년대 들어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뉴미디어가 급속히 확산되면서 우리 삶의 방식은 완전히 바뀌었다. 디지털 세대라 불리는 젊은 층에 인터넷 없는 세상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디지털 시대의 정치 또한 과거 산업사회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다.

한국의 정치에 디지털 미디어가 개입한 건 2000년부터였다. 그해 4·13 총선에서 후보들은 개인 홈페이지를 열었고 인터넷을 홍보에 활용했다. 이때 ‘DJ 민주당’ 깃발을 들고 부산에 출마했던 노무현은 낙선했다. 그의 홈페이지는 최초의 정치인 팬클럽 ‘노사모’의 출발점이 됐다. 지역주의 벽을 넘지 못한 노무현 후보를 지원하기 위해 지지자들은 그해 5월 ‘노사모’를 결성했다. 노사모의 활동은 2002년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과 대선에서 승리의 밑거름이 됐다.

디지털 정치는 2002년 대선을 기점으로 급속히 확장하며 끊임없이 기존 제도 정치를 위협했다. 이미 오래전부터 정부·국회·정당 등 제도 정치에 대한 국민의 불신은 높았다. 그러나 소수 엘리트가 끌고 가는 대의제 민주주의 아래서 국민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디지털 기술은 침묵하던 시민들에게 정치적 불만을 표출하고 행동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 줬다. 디지털로 무장한 시민들은 더 이상 고립된 개인이 아니다. 네이버와 다음 같은 포털 사이트에서 매일 수백만 명이 정치 뉴스를 읽고 정치권을 비판하는 글을 올린다. 온라인 커뮤니티와 트위터·페이스북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촘촘히 연결된 개인들은 그 어떤 정치집단보다 강력한 정치세력으로 변모할 토대를 갖추고 있다.

2008년 광우병 촛불시위는 대의제도와 네트워크 정치가 충돌한 전형적인 사례다. 석 달 가까이 계속된 촛불시위는 한 고등학생이 다음 아고라에 ‘이명박 대통령 탄핵 온라인 청원’을 하면서 시작됐다. 각종 포털과 온라인 커뮤니티에 정부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대한 비판이 넘쳐날 때였다. 이들은 온라인 공간에만 머물지 않았다. 전국적으로 수십만 명의 시민이 길거리로 나와 촛불을 들었다. 이명박 정부는 두 차례 사과성명을 발표했다.

네트워크로 연결된 개인들의 순수한 참여는 오래가지 못했다. 촛불시위가 시작되고 한 달쯤 지나자 개인들은 점차 힘을 잃고 기존의 정치집단이 그 자리를 채우게 됐다. 체계적인 조직이나 지도부가 없는 네트워크 정치가 갖는 본질적 한계 때문이다.

뉴미디어 활용을 통해 네트워크 정치는 일상화됐다. 그러나 이게 제도 정치를 대체할 수는 없다. 여전히 우리 정치의 미래는 정부·국회·정당을 중심으로 하는 제도 정치에 달려 있다.

여기서 2008년 촛불시위가 향후 한국 정치에 남긴 교훈을 되새겨야 한다. 시민의 목소리를 소홀히 하고서는 제도 정치가 안정적으로 유지되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네트워크로 연결된 개인들은 더 이상 정치적으로 무관심하지도, 무능력하지도 않다. 이들은 언제라도 제도 정치를 위협할 준비가 돼 있다.

결국 우리 정치의 미래는 제도 정치와 네트워크 정치 간의 융합에 달려 있다. 제도 정치는 이제까지 누려 오던 기득권을 과감하게 내려놓아야 한다. 제도 정치의 제일 밑단에서부터 네트워크 개인들의 목소리를 수용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정부와 정당은 정책안을 준비하는 첫걸음부터 네트워크 개인과 함께해야 한다. 네트워크 공간 속으로 들어가 국민과 항시적으로 소통하고 있어야 한다.

지금까지 숱한 정치 개혁안이 만들어졌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었던 것은 변화된 정치 환경, 즉 네트워크 정치에 대한 이해와 수용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정치는 사람을 대상으로 한다. 21세기 정보사회를 살고 있는 디지털 세대의 삶의 방식과 정치 인식은 과거와는 확연히 다르다. 그렇다면 정치제도와 정치하는 방식도 이에 맞춰 변해야 한다.

윤성이 경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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