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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톡톡 인터뷰] ‘삶의 볼륨을 높여요' 이본 - ‘까만 콩’, RE BORN (다시 태어나다)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월간중앙] 방송 공백기 7년간 암투병 중인 어머니 병간호한 효녀… “대학원 공부와 골프·피트니스로 나를 가꿨다”

탤런트 이본이 고혹적이고 원숙한 매력지수의 볼륨을 한껏 높여 우리 곁으로 다시 돌아왔다.

1990년 대 후반. 매일 저녁 8시만 되면 KBS 라디오 89.1FMHz 에서는 신나는 오프닝 곡과 함께 카랑카랑한 하이톤의 경쾌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볼륨식구들~ 이본의 볼륨을 높여요. 시작합니다~!” 당시 유행하는 신곡들과 함께 톡톡 튀는 진행으로 늘 FM라디오 청취율 1위에 올랐던 방송이다. “제 웃음소리가 마음에 안 드신다는 분들, 그러면 주파수를 돌리세요!”라며 생방송 도중에 당돌한 멘트를 날리던 ‘쿨한 누나’. 그가 읽어주는 또래 친구들의 사연들을 들으며 방안에서 숨죽여 킥킥대고 눈물을 흘려본 기억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당신은 이미 중년에 들어섰거나 더 이상 청춘은 아닌 것이다.

SBS 공채 탤런트 3기 출신인 이본(43)은 90년대를 대표하는 연기자이자 쇼 MC, 라디오 DJ로 활약했다. 당시 배철수·유열 등에 이어 장수 라디오DJ로 활약하면서 팬들의 많은 사랑을 듬뿍 받았다. 그런 그가 어느 날 갑자기 라디오 DJ를 그만두며 연예계를 떠났다(2004년). 당장의 충격은 컸지만 조금씩 그는 잊혀갔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흘렀다. 누구나 비껴가기 힘든 세월이다. 단발머리 중학생은 직장인이 되고, 아이의 엄마아빠가 되고, 1990년대 풍미했던 ‘신곡’을 ‘복고풍’이라 부르게 됐다. 올해 초 자체 최고 시청률(22.2%)을 기록한 MBC <무한도전> ‘토요일 토요일은 가수다(이하 토토가)’에 그가 갑작스레 출연했다.

시청자 놀라게 한 녹슬지 않은 방송감각

이본은 1995년부터 2004년까지 9년간 KBS 쿨FM <이본의 볼륨을 높여요>를 진행하며 인기를 구가했다.

불혹을 넘긴 나이인데도 미리 방송을 준비해온 듯 화사한 모습에 대중은 놀랐을 것이다. 세월은 야속하게도 나에게만 흘러가나 싶을 정도로 혼자 유리관에 있다가 방금 나온 듯 그는 옛날 모습 ‘그대로’였다. 보이시한 숏컷, 커다랗고 살짝 올라간 눈매, 오똑한 코. 구릿빛 피부와 탄탄한 몸매는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다. 더 놀라운 것은 녹슬지 않은 그의 방송감각이다. 그간의 공백이 무색하리만큼 능수능란한 진행 실력을 보여주며 화려한 복귀식을 치렀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최근 JTBC 예능 프로그램 <엄마가 돌아왔다> MC까지 꿰차며 또 한 번의 비상을 꿈꾼다.

5월 6일 서울엔 봄비가 내렸다. 한남동의 한 스튜디오에서 그와 만나는 날이다. 발랄한 야구모자를 쓰고 몸매가 드러난 트레이닝복을 입고 나타난 그는 ‘아무렇게나 걸쳐도 이렇게 멋있을 수 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보는 사람을 위축시켰다. 통통 튀는 모습은 그대로였지만 10년간 성숙함은 더해져 더 노련해졌다.

MBC <무한도전> ‘토토가’ 출연을 결심하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요?

이본은 올해 초 MBC <무한도전- 토요일 토요일은 가수다>에 출연해 매끄러운 진행과 젊은 미모로 시청자들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정말 신기한 게 모든 일이 우연히 한꺼번에 일어나요(그는 몇 번이나 우연이라는 말을 언급했다). 어느 날 명수오빠한테 전화가 왔어요. 정말 오랜만이었죠. ‘본아, 무한도전에서 이런 프로그램 기획 중인데 너 나랑 MC한번 맡지 않을래?’라고 했고, 마침 함께했던 그리운 가수 친구들도 나온다고 하기에 흔쾌히 ‘그래, 한번 해보지 뭐’라고 했던 거예요. 그렇게 반응이 뜨거울 줄 몰랐죠.”

프로그램에서 많이 우셨어요. 어떤 감정이 들었기에 그렇게 운 거죠?

“원래 눈물이 많은 편이긴 해요. 그 시절에 참 재미있는 추억이 많았거든요. 사람마다 다 기억나는 시절이 있잖아요. 아직까지 잊지 않고 응원해주는 팬들이 있어서 눈물이 났고, 반갑기도 했고. 울었던 이유가 아마 스무 가지도 더 될 것 같아요.”

이본은 나이 스무 살에 길거리 캐스팅으로 한 커피 브랜드 광고에 출연하면서 연예계 데뷔했다. 당시 그는 톱 배우 손창민과 호흡을 맞췄다. 과감한 수영복 차림으로 파격적인 스타일링을 선보여 관심을 끌었다. 그 후로 SBS 공채 탤런트 시험에 응시해 합격했다. 작은 얼굴, 뚜렷한 이목구비, 구릿빛 피부로 ‘까만콩’이라는 별명을 얻으며 개성 뚜렷한 배우로 자리매김했다. 드라마 <느낌>·<창공>·<순수> 등으로 많은 사랑을 받으며 청춘스타의 반열에 올랐다.

어릴 때부터 주변의 시선을 받았을 것 같은데, 원래 연예인 하는 걸 생각하셨나요?

“중학교 때 사진관에서 사진을 찍은 적이 있어요. 어느 날 갑자기 남학생들이 저를 보고 웅성대는 거예요. 알고 보니 사진을 찍었던 사진관에서 제 사진을 크게 걸어놓은 거였어요. 내 또래의 남학생이 따라다니는 거나 시선을 즐기긴 했지만 TV에 나가서 뭘 하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어요. 사실 배고프지 않은 상태(절박하지 않은 상태)에서 데뷔를 했죠.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돼 광고 찍으러 간 곳이 사이판이었고요. SBS 탤런트 공채 시험도 합격하고, 드라마 <느낌>을 찍었는데 그걸로 인기스타가 됐죠. 그러니 얼마나 기고만장하고 콧대가 하늘을 찔렀겠어요.”(웃음)

10년 진행한 라디오 프로그램 그만둔 이유

이본은 뚜렷한 이목구비에 건강한 구릿빛 피부로 데뷔 초창기부터 젊은이들 사이에 큰 인기를 누렸다.

이본이 더 잘 알려진 것은 KBS 라디오 음악방송 <이본의 볼륨을 높여요>의 DJ를 맡고 나서다. 동시간대 프로그램 중 청취율 1위를 수년 동안 차지할 만큼 인기가 대단했다. 그가 처음 라디오DJ를 시작할 당시에는 우려의 시선도 적지 않았다. 가수도 작곡가도 아닌 연기자가 음악 프로그램의 DJ를 한다는 것이 생소한 때였다. 주변에서도 얼마 못 버틸 것이라고 수군댔다. 그런데 웬걸! 10년간이나 그 자리를 꿰찼다. 그가 연기자 출신의 라디오 DJ 1세대의 문을 활짝 열어젖힌 셈이다.

오기도 생기셨을 것 같아요. DJ를 하기 위해 공부를 많이 하셨나요?

“제가 라디오 프로를 처음 진행할 때, 네가 무슨 DJ냐는 소리를 많이 들었어요. 연기자 선배들은 ‘연기자는 연기를 해야지’라고 충고하셨고요. ‘아, 할 수 있는 한 이 자리를 꿰차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게 5년이 되고 10년이 된 거죠.”

DJ와 음악방송 MC를 오랫동안 하면서 음악에 대한 조예가 더 깊어졌을 거 같아요(그는 사진 촬영을 하는 동안에도 스튜디오에 흐르는 음악에 몸을 맡긴 채 리듬을 탔다. 작게 흥얼거리며 따라 부르기도 했다).

“음악에 대한 조예가 깊은 건 아니고요.(웃음) 원래 음악 듣기를 좋아해요. 제가 라디오 DJ를 할 때 음악들이 정말 신났었어요. ‘토토가’ 열풍처럼 지금 90년대 음악이 다시 사랑받는 이유 중 하나가, 노래들이 가장 노래다웠기 때문일 거예요. 클럽에 가면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고 모든 사람이 엉덩이를 들썩일 정도로 신나는 노래가 많았었죠. 지금 들어도 전혀 손색없을 정도로 가사와 멜로디가 정말 많잖아요.”

그러던 2004년, 이본이 돌연 라디오 DJ를 그만두고 방송계를 떠났다. 당시 프로그램 홈페이지에 ‘DJ 이본, 그녀와의 마지막 두 시간’이란 제목의 글로 사퇴 사실을 공지하면서 눈물을 흘리며 마지막 방송을 했다.

어떤 마음이셨어요? 무슨 일이 있었나요? 서운해 하는 팬들을 뒤로한 채 떠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그만둔다고 말한 게 떠나기 4일 전이었어요. 갑작스럽게 얘기하고 떠나지 않으면 정 떼기가 힘들어서 못 떠날 것 같았거든요. 더 이상 청취자들을 진심으로 대할 자신이 없었어요.”

너무 갑작스러운 퇴장이라 무슨 사연이 있을 거라 생각했죠.

“그런 건 전혀 아니에요. 그렇지만 ‘제가 너무 부족해서 다시 채워서 오겠습니다’라고 일일이 말하는 것은 제 방식이 아니었어요. 어느 날부터인가 ‘틀에 박힌 프로그램과 자연스레 굴러가는 일상에 몸만 실어 방송을 쉽게 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지금 생각해보면 옳은 방법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타협점을 찾아볼 수도 있었을 텐데 그때는 어렸을 때라 극단적인 결정을 한 것 같아요.”

하지만 사실 그는 “공백기간이 이 정도로 길어질 줄은 몰랐다”고 고백했다. 1~2년만 쉬고 돌아오면 자신을 반갑게 맞아주고 바로 일을 시작할 줄 알았다. 하지만 현실은 냉담했다. “걔 왜 나왔대?”, “돈이 궁하대?” 등의 이야기가 들리는가 하면, “쉴 만큼 쉬고 놀만큼 놀고 나서 다시 오면 누가 너 써줄 줄 알았어?” 등의 얘기를 면전에서 들은 적도 있었다. 그동안에 재기를 시도한 것도 여러 번이었다. 2008~2009년쯤 재기를 시도했으나 연예계의 빠른 유속에 적응하지 못했고, 2012년 KBS 2TV 일일시트콤 <패밀리>에 출연했지만 큰 조명을 받지도 못했다.

연기로 재기하려고 했나요?

“네. 제가 원래 하고자 하는 것은 연기였으니까요. 예전에는 드라마 현장에 폐를 많이 끼쳐서 선배들에게 혼이 나다 보니 어린 나이에 정말 단순하게 안 혼나는 쪽으로 자꾸 가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본업인 연기보다 MC나 라디오DJ의 일을 더 오래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다시 돌아왔을 때도 제일 탐나는 게 연기고, 미련이 제일 많이 남죠.”

그래서 장진 감독이 있는 ‘필름있수다’로 가게 된 건가요?

“네. 그런 면도 있어요. 연기 쪽을 좀 주력하고 싶었어요. 연기가 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포털사이트에 ‘이본’을 검색해보면 연관 검색어에 가장 많이 뜨는 것이 ‘이본 엄마’, ‘이본 어머니’일 만큼 이본과 어머니와의 관계는 각별하다. 그는 연예계에서 소문난 효녀다. 7년째 암 투병 중인 어머니를 극진히 간호해온 사실이 알려졌다. 인터뷰 중간에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는데 바로 어머니였다. 애정이 듬뿍 담긴 목소리로 안부를 주고받은 그는 “엄마, 나 신경 쓰지 말고 맛있는 것 많이 먹고 푹 쉬어”라며 당부했다. 최근 방사선 치료를 막 끝낸 어머니를 위해 호주 여행을 보내드렸다고 했다.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그의 눈시울은 내내 붉었다.

불러보기만 해도 눈물 나는 이름, ‘엄마’

오랫동안 방송계를 떠나 있었던 이본은 지난 7년간 어머니의 병구완을 해온 효녀로 소문났다. 그러나 정작 그는 “긴 병에 효자 없다”며 겸손해 했다.

언제부터 병환을 앓으셨어요?

“2006년 갑상선 암 수술을 받으셨어요. 그때 수술은 가볍게 끝나서 2008년 방송에 복귀하려고 했는데 다시 유방암 진단을 받으셨죠. 그래서 ‘어차피 나를 대하는 현실도 냉정하고, 엄마는 아프고 하니 병간호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때부터 어머니의 항암치료를 돕게 된 거죠.”

위중하셨나요?

“초기 암이긴 했는데, 엄마가 되게 예민한 성격이에요. 음식도 잘 못 드시고 잠도 잘 못 주무시고….그런 사람한테 항암제를 투여한다는 것은 참 견디기 힘든 것이에요. 제가 엄마가 드시고 싶어하는 것을 5분 대기조로 있다가 사다 드렸어요. MSG 안 들어간 음식 위주로 드리고, 식욕촉진제 처방도 받아서 드시게 했어요.”

그 전에도 어머니께 잘하셨나 봐요?

“대화를 살갑게 하는 스타일은 아니에요. 그런데 아프시면서 같이하는 시간이 많아졌죠. 엄마가 항암치료를 하면서 머리카락이 다 빠지니까 가발 쓰고 밖에 나가지 않으려고 하시는 거예요. ‘엄마, 이제 가발 쓰지 말자’고 말했죠. 항암치료를 받느라 머리카락을 일부러 밀었는데, 두상이 너무 작고 예쁘신 거예요. 색깔 별로 두건을 샀어요. 엄마가 핑크색, 연두색, 주황색 같은 화려한 색을 좋아하세요. 노란색 니트를 입으면 노란색 두건을 씌워줬어요. 두건 위에 모자도 씌워 엄마를 데리고 나갔던 것 같아요. 그랬더니 사람들이 ‘예쁘다, 잘 어울린다’는 얘기를 하니까 다시 기분이 좋아지셨어요. ‘색깔 테라피’라고 할까요?”

어머니 병 간호를 위한 시간은 이본 씨 개인한테는 희생의 시간이었을 것 같은데요? 많이 힘들었죠?

“힘들죠.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을 절감했어요. 엄마가 아프고 나서 6개월 정도는 정말 눈 뜨면 모든 생활을 같이했어요. 아침부터 잠들 때까지. 그러다 보니까 쉽게 지치더라고요. 간병이 단시간에 끝날 것 같지 않았어요. 그래서 학교를 택했어요. 그동안 일하느라고 학부 졸업도 못했었으니까요. 연예계에서는 아직 나를 받아주지 않으니 차라리 내실을 더 키우자고 생각한 거죠. 그때부터 24시간 엄마한테 달라붙어 있던 시간을 조금씩 줄여나갔어요. 저는 학교에서 에너지를 얻었다가 엄마한테 방전하고, 이렇게 해서 제가 장기전을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이본은 현재 공부 중이다. 단국대학원 문화예술대학원 공연예술학 석사과정을 밟고 있다. 올가을에는 논문준비를 해야 한다. 어머니의 병간호를 하면서 학교도 졸업하고 석사까지 마치겠다고 다짐했다.

JTBC 프로그램인 <엄마가 보고 있다> MC를 맡게 됐는데, 프로그램에 대한 애착이 남다른 거 같아요.

“요즘은 자기 위주로 돌아가는 세상이잖아요. 기본적인 것을 잊고 살아가는 때인 것 같아요. 그중 하나가 ‘엄마’인 것 같아요. 엄마라는 타이틀을 걸고 시작하는 프로그램인 만큼 진정성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엄마의 소중함을 아는 출연자들이 이렇게 모인 거면 굉장히 많은 사람한테 사랑을 받겠구나 하는 자신감이 생겼어요. ‘내가 열심히 안 해도 이 프로그램은 굴러 갈거야’가 아니라 ‘내가 이 자리에 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마음만 잊지 않는다면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인생을 살아가는 지혜 알려준 골프

아마추어 여성골퍼로 소문난 골프실력을 자랑하는 이본은 구력 8년차로 ‘3오버’ 최저타 기록(우정힐스CC)을 갖고 있다.

그는 아마추어 골퍼들 사이에서는 수준급의 골퍼로 유명하다. 8년차 구력으로 최저타 기록은 우정힐스 75타다. 전문가들로부터 그의 골프 실력은 “자세나 거리, 스윙 궤도, 어프로치 능력, 퍼팅 등에서 기본기가 충실해 전체적으로 나무랄 데가 없다”는 평을 듣는다. 2013년 연예인 골퍼로 전국의 클럽챔피언들을 만나 골프 대결을 펼치는 SBS골프의 <용감한 원정대2>에 MC로 출연하기도 했다. 골프를 시작한 건 주변의 권유에서다. 엄마 간병에 심신이 지쳐 있는 그에게 주위 어르신들이 운동을 추천했다고 한다. “골프를 통해 인생을 배우게 됐고, 제 삶도 조금 더 길게 보고 더 여유롭게 지켜볼 수 있게 됐죠.”

어려운 시기를 극복할 수 있을 만큼 도움이 되셨나요?

“네. 골프를 권하신 분들이 저보다 스무 살은 더 많은 어르신들이었어요. ‘이러저러한 일이 일어났는데 어떻게 해요?’라고 여쭈면 ‘다 지나갈 것이다’고 답해주세요. 지금 보고 있는 이 그림이 전부 다가 아닐 수 있겠다는 걸 알게 됐죠. 원래 제가 평상시에 말수가 적고, 낯도 엄청 가려요. 상대방이 하는 얘기를 듣는 걸 좋아하죠. 어르신들이 하는 얘기를 듣는 게 좋더라고요. 그분들을 따라다니면서 골프도 시작하게 된 거고요.”

골프의 가장 큰 매력은 뭐라고 보세요?

“골프는 ‘인생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팁을 많이 얻을 수 있는 운동’인 것 같아요. 어떤 상황이 어떻게 벌어질지 모르잖아요. 저 같은 경우는 저밖에 모르고 잘난 척하고 살다가 골프를 배우니까 인내도 배우게 되고 내 실력을 드러내야 할 때가 따로 있다는 걸 배우게 된 거죠.(웃음) 인생의 ‘피크 앤 밸리’를 겪는 것이 비슷해요. 골프에는 에티켓이 있고, 룰이 있고, 한 번 공을 칠 때 집중력이 필요하고 다른 사람이 칠 때 기다림도 필요하죠. 내 인생에 안 좋은 상황이 펼쳐지고 다른 사람에게만 좋은 상황이 놓였을 때도 비교해볼 수 있어요. 내 볼이 좋은 곳에 놓여 있고, 상대가 오비(아웃 오브 바운스)가 났을 때도 비슷한 상황이죠. 골프를 인생이랑 비유하시는 프로님들 많잖아요. ‘골프는 인생이다, 삶이다’. 왜 그렇게 비유를 하는지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아요.”

여성 골퍼들의 전성시대잖아요. 처음 골프 배우실 때만 해도 여성골퍼가 많았나요?

“제가 좀 앞서가는 게 맞는 것 같아요(웃음). 패션도 그랬고, 운동도 그랬고. 20대부터 피트니스클럽에서 PT(Personal Training: 일대일 개인지도)를 받았었다니까요? 요즘 PT 한창 유행이잖아요.”

하지만 그의 골프실력이 알려지면서 오해와 소문도 무성했다. “사실 참 속상한 것 중에 하나가 제가 방송 안 하는 동안에 남자들이랑 골프 치면서 돈을 따서 생활했다는 말이 돌았다고 해요. 말도 안 되는 소문이 많았어요. 한번은 (탤런트) 손지창 오빠한테 전화가 왔었어요. ‘본아, 너 몇 번째 홀에 있냐?’ ‘그게 무슨 말이에요?’ ‘너 지금 몇 번째 홀 나무 밑에서 담배 뻑뻑 피우고 있다며?’ 저는 그날 골프장에도 안 갔고 담배도 안 피우거든요. 20대 때도 그런 내용은 아니었지만 다른 걸로 저를 오해하는 사람이 많았거든요. 내가 지금 마흔이 넘어서 그렇게 얘기한다 한들 뭐가 달라지겠어요. 다행히 저의 제일 큰 장점이 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그 사람에 대해서 얘기하지 않는 거예요. 20대에도 썼던 말인데, ‘라면을 먹어봐야 싱거운지 짠지 알 거 아니냐’는 거죠. 지금도 똑같아요. 직접 확인하지 않으면 그냥 두는 거죠. 소문으로 생기는 그런 소수점들은 버리자고 생각하긴 하지만, 골프로 인해 그런 소문이 도는 건 상처를 받죠.”

“결혼이 이렇게 늦어질 줄 몰랐죠”

혹시, 일부러 골드미스를 선택하신 건가요?

“저는 결혼을 이렇게 늦게 할 거라고 생각도 못했고, 결혼이 이렇게 뒷전이 될 거라고도 예상 못했어요. 과거에 팬들이 보내준 백문백답이 유행했어요. 우연히 읽어봤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제 생각이 일관돼요. 다만 달라진 게 하나 있다면 결혼할 나이더군요.(웃음) 처음에는 25세 했다가 29세, 30세, 36세….”(웃음)

어머니 마음을 잘 이해하는 딸이잖아요. 진짜 엄마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으세요?

“사실 갑갑해요. 그 생각하면. 제가 자라온 가정환경은 굉장히 유복하고 따뜻하고 사랑이 넘치지만 이 직업이 평이하지 않고 환경 자체가 다르죠. 제가 결혼하면 전 우리 엄마처럼 자녀한테 또 올인할 것 같아요. 그러고 싶지는 않아요. 우리 큰언니도 애들을 그렇게 키워요. 엄두가 안 나죠. 아직 부모님도 제가 더 모셔야 하고요. 고등학교 1학년 조카 과외도 제가 시켜주고 있어요. 아직은 지금이 좋네요.”

9년 열애한 남자친구가 있다고 하셨잖아요. 결혼을 재촉하진 않으세요?

“그러질 않아요. 저랑 생각이 비슷해요. 얼마만큼 기다렸다가 일을 시작하게 됐는지 아니까 편안하게 해줘요. 저도 간섭하지 않고요. 제가 가족에게 쏟는 에너지를 이해해주는 넓은 아량을 가진 남자에요. 지금은 현실이 눈앞에 내다보이고 이렇게 해주면 훨씬 더 좋다는 걸 어느 누구보다 잘 아니까 그런 걸로는 서로 부딪히지 않아요.”

‘남자는 하늘’이라고 표현하신 적이 있다면서요?

“있어요. 지금도 저는 결혼을 안 했으니까 중대사를 결정할 때는 제가 확실하게 얘기할 수 있지만, 여자가 해야 할 일을 구분짓는 편이에요. 웬만하면 집에서 설거지를 할 때 남자가 나서지 않게 해요.”

‘2억원 대 외제차와 70평 아파트 소유’가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요?

“사실 20대 때 데뷔한 후 일만 했어요. 그 돈을 고스란히 부모님께 보냈고 용돈을 받아 썼어요. 부모님이 재테크를 잘해놓으신 것 같아요. 그래서 공백기도 너무 조이지 않게 지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저는 정확히 제가 얼마를 벌었는지 몰라요. 제가 벌어서 부모님께 드린 돈이 나중에 내게 반드시 돌아와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부모님이 알아서 쓰고 싶을 때 마음껏 쓰셔도 상관없고요.”

이본의 철저한 자기관리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데뷔 이후 6시 이후로는 거의 음식을 입에 대지 않았단다. 20대 때는 1년에 6시 이후로 먹는 횟수가 10회 미만이라고 했다.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매일같이 운동을 한다. 좋아하는 노래 한 곡을 재생하고 콧노래를 부르며 집의 19층 계단을 오른다. 2분 50초. 현관문 앞에 도착하면 노래 한 곡이 채 안 끝난다고 한다. 9년간 계속된 습관이다. 그간 생활체육지도사 3급, 보디빌더 3급 자격증을 땄고, 일주일에 5일은 플라잉 요가를 한다.

“40대에는 30대로, 50대에는 40대로 살아야죠”

40대 나이지만 꾸준한 자기 관리로 놀랄 만한 젊음을 유지하고 있는 이본은 “50대에도 40대처럼 살고 있을 것”이라며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어릴 때부터 운동을 그렇게 좋아했나요?

“저 원래 운동을 잘해요. 운동신경이 뛰어나죠.(웃음) 운동을 잘하니까 빨리 배우기도 하고 운동을 하면서 에너지를 받는 성향이에요.”

6시 이후에 정말 아무것도 안 먹는다고요?

“네. 그런 관리에는 완벽한 사람이에요. 식습관은 길들여져 있는 것 같아요. 식상한 얘기긴 한데, 지금 근력운동을 해놓잖아요? 그럼 40대 때 30대처럼 살 수 있어요. 20대에 저는 PT 받고 운동을 했잖아요. 그게 30대에 득을 본 거고 30대에 운동을 게을리 하지 않은 게 40대에 득을 볼 것이라는 자신감이 있어요. 저는 (관리를) 게을리 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렇게 노력했는데 40대로 보이는 건 억울하죠.”

지금은 30대처럼 살고 계시겠네요?

“그렇게 살고 싶어요. 나이가 들어가는 게 서글퍼서가 아니라 내 삶의 질을 위해서요. 50대에도 저는 40대로 살고 있을 것 같아요. 이게 지금 100세 시대에 가져야 할 마인드가 아닐까요?”

“세월은 추락하는 것이 아니라 오래된 바이올린이 되어가는 과정이다.” 이본과의 대화 중에 머릿속을 맴돌던 문구다. 20년 전만 해도 라디오에서 특유의 웃음소리로 깔깔대던 ‘뽄이 언니’는 훨씬 더 고혹적이고 원숙한 매력지수를 한껏 높여 돌아왔다. 마치 오래된 바이올린처럼 한층 깊고 풍성해진 소리로 삶의 음악에 멜로디를 더하고 있었다. 선곡하는 대로 발랄해졌다가 섬세해졌다가 잔잔한 감동으로 이어지는 그의 진심에 예전의 청취자처럼 자꾸 귀를 기울이게 됐다.

“사람들에게는 정말 때가 있는 것 같아요. 모든 시간은 지나가게 돼 있고 자신을 잃지 않고 기다리다 보면 자신에게 맞는 때가 오는 것 같아요.” 이본은 그간의 세월을 입고 다시 태어난 듯하다.

글=박지현 월간중앙 기자·맹서현 인턴기자 사진=전민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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