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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면서 가해자 ‘14번’의 악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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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중동호흡기증후군(MERS·메르스) 14번 환자(35)가 완치돼 22일 오후 서울대병원에서 퇴원했다. 메르스 환자 175명 중 절반가량인 81명을 감염시킨 ‘수퍼 전파자’로 알려져 있다. 지난달 27~29일 삼성서울병원 응급실에 사흘간 머물면서 다른 환자와 가족, 의료진을 감염시켰다. 그는 지난달 30일 메르스 양성 판정을 받아 지금까지 14번 환자로 통했고 확진 23일 만에 자유의 몸이 됐다. 본지 기자가 23일 그에게 여러 차례 통화를 시도했으나 그는 그때마다 “통화할 상황이 아니다”고 딱 잘라 말했다.

 이동우 인제대 상계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이 환자는 가해자이면서도 피해자”라고 진단했다. 81명 감염이란 결과만 보면 가해자다. 하지만 그는 보건당국의 초기 방역 실패의 피해자이기도 하다.

 그가 처한 기구한 상황은 지난달 10~20일 폐렴 때문에 평택성모병원에 입원하면서 시작됐다. 거기서 1번 환자(68)에게 감염됐다. 그의 아버지(60)는 “평택성모병원에 있는데 병세가 호전되지 않아 일단 퇴원했고 고열이 지속돼 평택 굿모닝병원에 사흘 있다가 악화돼 삼성서울병원으로 갔다”고 말했다.

 삼성병원 응급실에서 사흘째 되던 지난달 29일 밤 보건당국이 이 환자에게 “메르스가 발생한 평택성모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으니 격리 대상”이라고 통보했다. 그는 이 사실을 병원에 자진 신고해 격리됐다. 첫 번째 확진환자가 나온 지 9일이 지나서야 보건당국은 14번의 존재를 파악했으며 이 환자는 이미 이 병원 응급실을 사흘째 돌아다니면서도 메르스가 뭔지, 평택성모병원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알 길이 없었다. 평택성모병원이란 이름은 그때만 해도 보건당국의 병원명 비공개 원칙에 따라 철저히 숨겨져 있었다.

 전병율(전 질병관리본부장) 연세대 보건대학원 교수는 “14번 환자는 메르스를 몰랐고 단지 폐렴을 고치러 간 것이다. 보건당국이 1번 환자가 입원한 평택성모병원 8104호에만 집착하지 않고 전 병동으로 넓게 방역 그물을 쳤다면 14번 환자가 삼성서울병원으로 갈 일이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삼성서울병원 CCTV엔 14번 환자가 응급실 안팎을 마스크도 쓰지 않고 기침을 하며 돌아다니는 장면이 잡혔다. 응급실에서 폐렴이라는 호흡기 질환 환자는 마스크를 항상 써야 하는데 14번 환자는 그 규칙을 지키지 않았다. 하지만 응급실에서 마스크를 쓰지 않고 돌아다니는 환자를 제지하지 않은 병원의 책임도 있다.

이 교수는 “병원 측은 그런 위반행위를 강하게 지적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않았다”며 “환자도 병원도 ‘룰’(규칙)을 지키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14번 환자가 사흘간 머무는 동안 893명이 응급실 내에 있었을 정도로 이 병원 응급실은 ‘도떼기시장’과 같았다. 환자나 병원 모두 룰을 지키기 어려웠다. 후진적인 의료환경이 있었기에 대규모 3차 감염이 벌어진 것이다. 전 교수는 “삼성서울병원 응급실에 호흡기 질환자를 위한 제대로 된 격리실이 있었으면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대형병원 응급실에 이런 시설을 갖춘 데가 흔치 않다. 현행 응급실 수가로는 이런 걸 설치하기 쉽지 않다.

 14번 환자는 확진 판정을 받은 뒤 국가격리병상에 입원해 인공호흡기 치료를 받았다. 병세가 호전돼 그걸 떼기 전까지는 바깥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랐다. 병실에서 뉴스를 접하고 14번 환자를 알게 됐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자신이 14번인지 몰랐다고 한다. “저렇게 많이 감염시킨 사람이 있어요”라고 의료진에게 물을 정도였다. 의료진은 그가 충격을 받을까 봐 함구했다. 며칠 후 친구나 친인척에게 들었는지 14번이 자신임을 알게 됐다고 한다. 당시 비교적 담담한 표정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감염자들에게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미안한 생각이 든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그는 메르스 트라우마(정신적 외상)에 직면해 있다. 본지와의 통화에서 “왜 자꾸 괴롭히느냐”고 말했다. 정부가 심리치료를 한다지만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미지수다.

신성식 복지전문기자, 노진호·박병현 기자 sssh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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