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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왕치산은 없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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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예영준 기자 중앙일보
예영준
베이징 특파원

시진핑 주석이 “호랑이와 파리를 다 잡겠다”며 반부패 캠페인을 선포할 때만 해도 중국인들은 그리 큰 기대를 걸지 않았다. 중국의 역대 지도자치고 부패 척결을 외치지 않은 이가 없었지만 부패는 확대재생산을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시 주석의 반부패는 옛날과 확실히 다르다”고 입을 모은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주도면밀한 능력에 과단성과 강단을 갖춘 왕치산(王岐山)을 반부패 사령탑인 중앙기율위 서기에 앉힌 용인술에 있다는 평가다.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 왕치산의 사냥감은 호랑이도 아니고 파리도 아니었다.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SARS·사스) 바이러스였다. 사스 발병 한 달 만인 2003년 4월 하순, 그는 베이징 시장대행으로 긴급 투입됐다. 그의 전임자는 유행을 넘어 창궐의 수준으로 번져가는데도 진상을 감추고 축소하는 데 급급했다. 왕치산은 패닉에 빠져 유령도시로 변한 수도 베이징을 인계받았다. 이대로 가다간 갓 출범한 후진타오-원자바오 체제의 기반이 흔들릴 수 있는 위기 상황이었다. 지금 돌아보면 절묘한 교체 타이밍이었다.

 아직 인터넷에 남아 있는 기자회견 기록을 보니 왕치산의 비장한 각오가 읽혀진다.

 기자:“베이징공항이 폐쇄된다는 소문이 사실이냐.”

 왕치산:“일만(명의 격리자)은 두렵지 않으나 만일(의 사태)이 두렵다(不<6015>一万就<6015>万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9999가지 조치를 취하고 있다. 확신을 가져달라. 사스는 퇴치할 수 있다.”

 만일 왕치산이 말만 앞세웠다면 아무도 그를 믿지 않았을 것이다. 왕치산은 모든 사실을 투명하게 공개해 믿음을 줬다. 동시에 군경을 동원한 초강력 격리조치에 착수해 한 치의 빈틈도 없게 했다. 그는 앞장서서 사스와의 전투 현장을 누볐다. 별로 빠질 것도 없는 그의 몸무게가 10㎏ 이상 줄었다. 헌신성과 능력을 검증받은 ‘사스 영웅’ 왕치산은 이후 부총리를 거쳐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승승장구했다.

 아직 이른 판단인지 모르나 메르스와 전쟁이 큰 고비를 넘어선 듯하다. 만약 이대로 퇴치에 성공한다면 그건 감염 위험을 무릅쓰고 환자들과 함께 격리된 상태에서 악전고투한 의료진의 공이다. 반면 정부는 큰 실망을 안겨줬다. 솔선수범과 소통으로 국민에게 믿음을 주고 안심시키는 공직자도 없었고 리더십은 허둥거렸다. 정부 대책은 혀를 차게 할 뿐이었다. 외국인에게 치료비와 여행경비를 부담할 테니 안심하고 여행 오라는, 필경 국무회의와 청와대 보고를 거쳐 나왔을 대책이 정작 외국인에게 얼마나 큰 허탈과 분노를 안겼는지는 인터넷 댓글을 찾아보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만큼 현장 상황이나 분위기를 읽지 못하고 겉돌았다는 얘기다. 본인 잘못은 아니겠지만 신임 총리가 뒤늦게 ‘컨트롤타워’를 자처하고 나선 게 공허하게만 느껴지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메르스와의 전쟁에서 우리는 이길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 공직자 중에선 ‘메르스 영웅’이 없다.

예영준 베이징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