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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속으로] 고졸 이혼녀, 아이 셋 낳은 전업주부 … 억만장자 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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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지 않았다. 가난한 이민자였던 부모의 작은 식당에서 어릴 때부터 냅킨통을 채우는 일을 했다(리틀시저스 피자 설립자 마리안 일리치). 부모가 낙농업자여서 사람들은 “시골 아낙네가 될 것”이라고들 했다(ABC서플라이 설립자 다이앤 헨드릭스).

 게다가 여성이었다. 결혼하면서 학교 공부를 포기해야 했던 이도 있었다. 많게는 7명의 자녀를 키우는 것도 이들의 몫이었다.

 하지만 결국 당당하게 자수성가했다. 최고 45억 달러(약 5조296억원), 최소 21억 달러(약 2조3471억원)라는 막대한 부를 일궜다.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 6월호가 선정한 ‘자수성가형 여성 부자’ 상위 10인 얘기다.

 본지는 이들이 여러 인터뷰에서 밝힌 내용을 토대로 자라온 환경 등을 살폈다. 그 결과 이런 공식이 도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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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①학벌은 중요하지 않더라=10명 중 5명이 고졸이다. 이 중 2명(다이앤 헨드릭스, 의류회사 포에버21 공동설립자 장진숙)은 고교 졸업 후 바로 생업에 뛰어들었다.

 다이앤 헨드릭스(68)는 고교도 마치기 전에 결혼했다가 금방 이혼녀가 됐다. 이후 집 파는 일을 하다 사업차 만난 지붕 재료업자와 두 번째 결혼을 했다. 남편은 고교 중퇴자였다. 부부는 부동산 투자 책을 읽기 시작했다. 헨드릭스는 “그게 바로 우리가 받은 교육”이라고 말한다. 대학가 주변 부동산을 사들여 돈을 모았고 1982년 건축자재 공급회사 ABC서플라이를 세웠다. 지역 개발의 선봉에 서서 성공신화를 썼다.

 부산에서 태어난 장진숙(본명 김진숙·52)씨는 고교 졸업 후 미용사로 일했다. 커피 배달을 하던 장도원씨와 결혼, 81년 미국으로 갔다. 접시 닦기와 사무실 청소를 하며 3년간 모은 돈으로 39㎡ 매장을 임차한 게 의류회사 포에버21의 시작이었다. 재봉틀로 셔츠를 만들던 장씨는 소비자의 욕구를 빨리 파악해 상품에 반영했다. 30여 년 만에 31억 달러(약 3조4654억원)를 버는 데 대학 졸업장은 필요 없었다.

 마리안 일리치(82)는 2년제 대학을 다니다 관두고 항공사에서 일했다. 야구선수이던 남편과 결혼한 뒤 아이 셋을 낳을 때까지 전업주부였다. 남편과 함께 59년 피자집을 열면서 숨어 있던 재무감각을 발휘했다. 마케도니아에서 이민 온 아버지의 식당에서 어렸을 때부터 일한 게 도움이 됐다. 그가 별도로 받은 회계 교육이라고는 짧은 대학생활 기간 들은 회계 수업 하나뿐이다. 하지만 그는 일리치홀딩스 부회장이자 회계 담당자로 활동하며 카지노·호텔 경영까지 넘나든다.

 명문대 졸업장을 스스로 포기한 이도 있다. 바이오벤처 테라노스 창업자 엘리자베스 홈스(31)는 스탠퍼드대(화학) 2학년이던 19세 때 지도교수에게 창업을 제안하고 학교를 그만뒀다. “내가 뭘 하며 살고 싶은지 깨닫는 순간 모든 게 쉬워졌다”면서다. 이후 피 한 방울로 200여 가지 의학검사를 하는 기술을 개발했다.

 어떤 이들은 결혼과 동시에 대학을 그만둬야 했다. 운송기업 J.B헌트 설립자 조넬 헌트(83), 편의점·주유소 체인 ‘러브스 트래블 스톱스 앤드 컨트리 스토어스’ 설립자 주디 러브(78)다. 대학 졸업장 없이 이들은 성공했다. 다만 주디 러브는 학업을 중단한 아쉬움이 컸는지 회사가 본궤도에 오르자 센트럴오클라호마대(인테리어디자인)에 돌아가 학위를 땄다.

 화려한 학벌을 갖춘 이들도 있다. 에픽시스템스(의료정보 시스템 회사) 설립자 주디 포크너(위스콘신대 컴퓨터과학 석사), 휼렛패커드 최고경영자 멕 휘트먼(하버드대 MBA)이다. 하지만 이들은 학교 이름값에 안주하지 않았다. 포크너는 대학원생 시절 만든 프로그램 코드를 회사 설립으로 발전시켰다. 휘트먼은 처음엔 의사가 되려고 프린스턴대에서 수학·과학을 공부했지만 여름방학 동안 잡지 광고를 팔아 본 뒤 경제학으로 전공을 바꿨다. 관심이 가는 분야를 찾아 파고들었다.

 ②‘여성스럽지 않은’ 분야에도 도전했다=건축자재업, 주유소 체인, 운송업…. 자수성가한 여성들은 이처럼 ‘남성적인 분야’에서도 성공했다. 남편이 사업 파트너였던 이들도 직접 전략과 재무 등에서 핵심 역할을 했다.

 틀에 박힌 여성 역할은 거부했다. 다이앤 헨드릭스는 시골 아낙네가 될 거라는 주변의 말에 짜증을 냈다. 자녀 일곱을 키우면서도 일뿐 아니라 기부활동, 공화당 지원에 적극적이었다. 그는 “일·기부·정치, 모두 좋다. 단 빨래하는 건 싫다”고 했다. 그는 남편이 갑작스러운 사고로 별세한 뒤에도 가장 큰 경쟁 업체를 인수하는 등 사업을 훨씬 키웠다.

 주디 포크너는 ‘보기 드문 여성 프로그래머’였다. 패션업체 갭 공동창업자 도리스 피셔(83)는 스탠퍼드대에서 경제학 전공으로 졸업장을 받은 최초의 여성이다.

 이들 중 일부는 부모에게 “여자라고 못할 일은 없다”는 교육을 받았다. 어렸을 때 바비인형 대신 공구세트를 생일선물로 받은 엘리자베스 홈스는 “내가 자라온 방식에서 멋진 점은 어느 누구도 ‘그런 건 할 수 없다’고 말하지 않았다는 것”이라고 했다. 멕 휘트먼도 “여자는 모든 종류의 멋진 일을 할 수 있다. 네가 원하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했던 어머니가 오늘날의 자신을 만들었다고 말한다. 실제 휘트먼의 모친은 제2차 세계대전 때 붕대 감는 일을 하던 다른 여성들과 달리 트럭·비행기 고치는 일을 했다. 중국어를 배우고 중국에 80번 갔다. 사업으로 바쁜 남편은 놔두고 아이 셋을 데리고 캠핑차로 3개월간 미국 곳곳을 다닌 적도 있다. 휘트먼은 “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은 어렵다. 만약 시도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할 수 있는지 절대 알 수 없다”는 모친의 가르침이 있었기에 이베이를 갔다고도 했다. 거대 완구기업에서 승승장구하고 있었지만 직원이 30명에 불과하던 이베이의 가능성을 알아보고 이직, 직원 1만5000명에 80억 달러를 버는 기업으로 키워 냈다. 이게 막대한 부를 쌓는 계기가 됐다.

 ③포화상태 시장에서도 성공했다=자수성가한 여성들은 포화상태로 보이는 시장(레드오션)에서도 차별화로 성공했다. 포에버 21의 장진숙씨가 의류업에 도전한 건 남편이 “주유소에서 일하면서 보니 좋은 차를 끌고 다니는 이는 의류업을 하는 사람이더라”고 한 게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이는 그만큼 의류업자가 주변에 많다는 얘기이기도 했다. 그러나 장씨는 어린 두 딸의 때 묻은 옷을 자주 갈아입히면서 “세탁비도 만만찮은데 입고 버릴 만한 값싼 일회용 옷은 없을까”라는 데 착안했다. 이게 핵심 차별화 포인트가 됐다.

 갭도 마찬가지다. 기존 리바이스 청바지가 다양한 치수와 색상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점을 공략했다. 회사 이름도 독특했다. 도리스 피셔가 ‘더 제너레이션 갭(The Generation Gap·세대 차이)’의 약자를 아이디어로 냈다. ‘팬츠 앤드 디스크(바지와 음반)’로 지으려던 남편을 설득했다. 이후엔 세계 최초로 패스트패션(SPA) 시스템을 도입하고 완전히 폐쇄된 드레싱룸을 업계 최초로 매장에 마련했다.

 리틀시저스 피자도 경쟁자가 많던 59년에 사업을 시작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전쟁에서 돌아온 병사들이 이탈리아 현지에서 맛본 피자를 찾으면서 피자집이 우후죽순 생기던 때다. 이미 피자 체인점 셰키스(Shakey’s·54년 설립), 피자헛(Pizza Hut·58년 설립)도 있었다. 하지만 1+1 전략, 어린이용 메뉴, 대학 기숙사와 군대까지 공략해 차별화에 성공했다.

 이 밖에 자수성가한 여성들은 공통점이 많다. 우선 수도자 같은 삶을 사는 이가 적지 않다. 엘리자베스 홈스의 집에는 TV가 없고, 다이앤 헨드릭스는 비틀스가 누구인지 모른다. 장진숙씨는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회사 쇼핑백에 요한복음 3장 16절(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을 새겼다.

 가족애는 대단하다. 미혼 2명을 제외한 8명은 평균 3.75명의 아이를 낳았다. 자녀를 7명 낳은 이도 2명이다. 6명은 남편을 사업 파트너로 삼았다.

 기부활동도 많이 한다. 도리스 피셔는 공립학교에, 마리안 일리치는 지역에 기부를 많이 한다. 주디 러브는 자선활동으로 지난해 교황에게 메달을 받기도 했다. 주디 포크너는 세상을 떠날 때 자산의 99%를 기부하기로 했다. 그는 “난 아이들에게 ‘부모에게 받아야 하는 두 가지가 뭐냐’고 물었다. 아이들은 ‘음식과 돈’이라고 했지만 나는 ‘뿌리와 날개’라고 했다. 내가 99%를 기부하려는 건 다른 이에게 음식과 쉼터, 교육과 같은 뿌리를 갖게 도와 그들 또한 날개를 갖게 해 주고 싶어서”라고 말했다.

백일현 기자 keysme@joongang.co.kr

[S BOX] 미혼모 딸 윈프리, 웨이터 출신 소로스 ‘자수성가 지수’ 만점

‘자수성가지수(self-made score)’라는 게 있다. 1점은 완전히 부모에게 부를 받은 사람(Silver Spooners), 10점은 입지전적으로 자수성가한 사람(bootstrapper)이다. 포브스가 지난해 처음 만들었는데, 부모와 부자가 되기 전 사회·경제적 지위를 엄밀히 따져 매긴다. 10점을 받은 이는 중산층보다 가난했던 이들로 학대·차별의 경험까지 있다. 끔찍한 가난 속에서 미혼모 엄마와 할머니 손에 자랐고 남자 친척에게 성적으로 학대받은 방송인 오프라 윈프리, 헝가리에서 나치의 압제를 받다 이민한 뒤 웨이터 등으로 일하며 공부한 세계적인 투자가 조지 소로스가 10점이다. 반면 페이스북 창업자 마크 저커버그는 자수성가하기는 했지만 중산층 이상의 배경이 있었기에 8점이다.

 자수성가형 여성 부자 상위 10인의 점수는 어떨까. 포브스는 이들 중 부모와 사회·경제적 지위가 명확히 규명된 7명에게만 점수를 매겼다(장진숙, 주디 러브, 마리안 일리치 제외). 그 결과 10점의 오프라 윈프리를 빼면 다이앤 헨드릭스(9점), 엘리자베스 홈스·주디 포크너(각 8점), 도리스 피셔·조넬 헌트(각 7점) 순으로 점수가 높았다. 멕 휘트먼은 직접 창업하지는 않았기에 6점을 받았다.

 포브스는 “1984년 포브스 400대 부호 중 자수성가한 이는 절반 정도였는데, 지난해 400명 중에선 69%였다”면서 “아메리칸드림은, 살아 있고 건강하다”고 말한다. ‘자수성가의 질과 시대적 의미’까지 따지는 미국과 비교하면 한국에선 ‘개천에서 나온 용’에 반짝 관심은 보여도 제대로 된 연구는 부족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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