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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의 향기

존엄과 품격을 지키며 살아가는 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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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정여울
문학평론가

몇 년 전부터 ‘자존감’이라는 화두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어떻게 내 흔들리는 자존감을 지켜야 할지 알 수 없는 상황이 자꾸 발생하기 때문이다. 자존감이라는 단어가 해를 거듭할수록 더 자주 쓰이는 이유 중의 하나는 ‘우리의 자존감이 위협받고 있다’는 집단적 불안 때문이 아닐까. 메르스로 인해 개인의 존엄뿐 아니라 사회 전체의 존엄이 흔들리는 지금, ‘개인의 존엄’과 ‘사회의 존엄’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안과 밖이 구분되지 않는 구조임을 깨닫는다. 위험의 최전방에서 메르스 환자를 치료하느라 힘겨운 사투를 벌이는 의료진들의 가족이 학교나 직장에서 ‘잠재적 보균자’로 배척당한다는 소식을 들으니, 억장이 무너진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커다란 응원을 받아 마땅한 분들, 가장 큰 감사를 드려야 할 분들과 그 가족들이 고통 받고 있다는 사실이 또 한번 우리 사회가 지켜야 할 ‘존엄의 마지노선’을 무너뜨리고 있다.

 사회적 존엄은 물론 ‘내 한 몸의 존엄’도 지키기 어려운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첫째, 위기가 닥쳤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매뉴얼’이 아니라 ‘나 자신의 양심과 상식’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물론 매뉴얼과 시스템이 잘 갖춰진 상황에서는 구성원 전체가 일사불란하게 규칙을 따르면 되겠지만, 그런 이상적인 상황은 잘 발생하지 않는다. 사고가 일어나는 지점은 매뉴얼의 틈새, 시스템의 취약성, 개개인의 무관심이 삼박자를 이루었을 때이기 때문이다. 위기에서 지혜롭게 탈출하고 상처를 극복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평소의 상식과 신념과 양심에 따라’ 급박한 상황에서도 평정심을 잃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화려한 매뉴얼이나 견고한 시스템보다 먼저 가르쳐야 할 것은 정의와 양심이며, 실수를 저질렀을 때 부끄러워할 줄 아는 마음과 사과할 줄 아는 지혜다.

 둘째, ‘나의 자존감이 상처받았다’고 생각하기 이전에, ‘내가 원하는 것들’이 과연 옳은 것인지를 비판적으로 질문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매일 쉴 새 없이 미디어와 광고의 자극적인 메시지를 흡수하며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진정으로 내가 원하는 것’과 ‘남들이 좋다고 하는 것, 남들이 원하는 것’을 구분할 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다. 자존감에 상처를 입는 경우는 많은 경우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서다. ‘저 사람에게는 당연한 듯 주어져 있는 것들이, 왜 내게는 없을까’ 하는 자기파괴적 질문이 스스로의 자존감에 상처를 입힌다. ‘우리가 원하는 것들’이 옳지 않거나 터무니없는 욕심일 때도 있다. 탐욕과 질투와 경쟁의 시선을 내려놓고 보면, 진짜 위협당하는 것은 ‘자존감’이 아니라 ‘나는 과연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에 대한 성찰 자체임을 아프게 깨닫곤 한다. 나는 ‘당연히 대접받아야 할 존재’가 아니라 나의 실제 행동과 양심에 따라 매번 평가받는 존재임을 잊지 않을 때, 스스로의 존엄과 품격도 지켜낼 수가 있다.

 셋째, 커다란 위기에 처했을 때가 곧 자신의 잠재력을 시험할 수 있는 최고의 실험장임을 잊지 말자. 위기를 무조건 피하려고만 하면 변명과 자기 합리화의 길이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위기를 차라리 절실한 기회로 인식할 수 있다면, ‘반짝반짝 빛나는 성공의 길’이 아닐지라도 ‘더 깊은 나 자신과의 만남’이라는 또 하나의 매혹적인 길이 열린다. 헤르만 헤세는 조국 독일의 전쟁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자국 내에서 출판을 금지당하자 스위스에서 묵묵히 글쓰기를 계속했다. 아내가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나치즘의 위협도 만만치 않았다. 그가 ‘독일의 영광스러운 승리의 길’에 지지를 보냈다면 훨씬 쉽게 성공가도를 달릴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전쟁에 반대하는 글을 끊임없이 썼고, 나치즘에 동조하는 지인들과도 모조리 인연을 끊었다. 그는 묵묵히 글쓰기에 몰두했고, 마침내 더 크고 깊은 내면의 자아와 만나는 데 성공했다. 그는 자기만의 개인적 존엄을 지키려 한 것이 아니라, 고통받는 타인들의 존엄을, 전쟁으로 죄없이 스러져가는 인류의 존엄을 지키려 했다. 『데미안』은 그 위대한 존엄성의 기록이다. 나의 자존감은 소중하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것이 정말 이 세상에 도움이 되는 것일까’를 치열하게 질문하는 비판적 지성은 더더욱 소중하다.

정여울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