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물결 앞에 선 쿠바 예술계 선 기대와 우려 교차

중앙선데이

입력 2015.06.13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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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1호 16면

1 아바나의 명소 말레콘 길에 설치된 거대 조각 ‘프리마베라(봄),’ 쿠바 작가 라파엘 미란다 산 후안의 작품이다. [AP] 2 한성필 작가의 설치작품 ‘조화로운 아바나’ 앞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아바나 시민들. 경주 감은사지로 순간이동한 듯 보인다. [AP]
3 엘 카피톨리오(옛 쿠바 국회의사당)와 마주 보게 설치된 한 작가의 ‘조화로운 아바나’ 4 아바나의 랜드마크인 아바나 대성당 5 카피톨리오 앞에 쿠바의 명물인 클래식카와 자전거 택시가 보인다.
올해 제 12회 아바나 비엔날레는 초청작가부터 관람객까지 현재 쿠바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함축해 보여준다. 44개국 200여 명에 이르는 참여 미술가 중 미국 작가가 35명이다. AP통신에 따르면 2500명에 이르는 미국 관람객이 6월 22일까지 열리는 비엔날레를 찾을 것으로 예상되며 그들 중 상당수가 쿠바 작가의 작품을 구매하려는 컬렉터와 갤러리 관계자들이다. 미국이 최근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쿠바를 삭제하며 양국 간 관계가 더욱 친밀해지고 있다. 그렇다면 쿠바는 이제 우리에게 무엇이 될 것인가. 그 변화의 현장을 찾았다.

중앙SUNDAY, 아바나 비엔날레를 가다

6 쿠바 작가 7인과 미국 작가 7인이 공동 전시를 하는 쿠바 파빌리온. 7 필리핀계 미국 작가 스테파니 시주코의 프로젝트 일환으로 에코백을 만들고 있는 퍼포머. 8 미국 미디어 작가이며 유튜브 스타인 케이시 니스탯의 단편영상을 보고 있는 관람객들.
경주로 순간이동한 듯한 한성필의 설치 미술
아바나 시내 중심부에 위치한 쿠바의 옛 국회의사당 엘 카피톨리오. 오후 5시쯤 되면 이 건물의 웅장한 돔이 기울어진 햇빛을 받아 맞은편 건물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거기에는 1300년이라는 시간과 지구 반대편이라는 거리를 뛰어넘어 이곳에 온 신라 감은사지 삼층석탑의 거대한 이미지가 걸려 있다. 한국 작가 한성필의 설치미술이다.

“돔의 그림자가 석탑 이미지와 겹쳐지는 이 시간이 제 작품을 보기에 가장 좋아요. 지난 50여년 간 국교가 없었던 대한민국과 쿠바가 만나는 시간이죠.” 한 작가는 세계 곳곳의 건물 가림막을 찾아 가림막에 프린트된 그림이나 사진이 주변 현실 풍경과 자연스럽게 연결되도록 사진을 찍어 가상과 실재의 경계를 허문다. 그런 사진을 다시 거대한 가림막으로 만들어 거리에 설치해 이중의 환영을 만들기도 한다. 한 작가의 설치 작품 ‘조화로운 아바나’ 역시 보수 중인 감은사지 석탑을 둘러싼 가림막을 사진으로 찍어 다시 가림막으로 만든 것이다. 높이 28m 너비 33m에 달하는 가림막 밑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아바나 시민들은 마치 한국의 경주로 순간이동해 감은사지 풀밭에 서있는 것처럼 보인다. 카리브해 섬나라 기후에 걸맞게 화려한 색채의 옷을 입은 시민들과 그들 앞을 지나가는 각양각색의 클래식카가 고요한 절터 이미지와 대조를 이루며 시시각각 멋진 그림을 만든다.

쿠바인들과 외국 관광객들은 종종 멈춰 서서 그 광경을 휴대전화나 카메라로 찍는다. 그런 이들 중에 쿠바인 하비에르 라브라도르도 있었다. “동아시아 탑의 이미지가 돔 그림자와 중첩되는 게 특히 멋지네요.” 놀랍게도 그는 한 작가의 의도를 듣지 않고도 그 점을 지적했다. 직업을 물어보니 영화 촬영감독이었다. 한국과도 인연이 있었다. “저는 가본 적이 없지만 여자 친구가 지난해 한국을 다녀왔어요. 저와 공동 연출한 영화(다큐멘터리 ‘호텔 누에바 이슬라’)가 2014년 전주국제영화제에 초청됐었거든요.”

거리에서 만난 쿠바인들은 생각보다 많이 한국을 알고 있었다. 한국과 국교를 단절하고 북한과 오래 친교를 유지해온 사회주의 국가인데도 아바나 시민들은 ‘코리아’라는 말을 ‘노스’가 아닌 ‘사우스’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았다.

“한국 관광객이 이미 연간 5000명에 달하거든요. 정치적 교류는 없었지만 지난 몇 년간 경제적· 문화적 교류는 점점 활발해지고 있습니다.” 아바나에서 만난 다큐멘터리 영화감독 정호현 씨는 이렇게 설명했다. 그녀는 2007년 쿠바 남성과 결혼해 쿠바 영주권을 지닌 유일한 한국인으로서 양국 문화 교류에 주도적 역할을 하고 있다. “최근에는 한국 드라마의 인기가 대단합니다. 반면 K팝의 인기는 약한 편이에요. 쿠바가 워낙 여러 라틴음악의 종주국이다보니.”

9 쿠바 작가 아를레스 델 리오가 말레콘에 설치한 인공해변 ‘레사카(숙취)’.
10 말레콘의 폐허가 된 집에서 김일성 동상 등 거대한 전체주의 모뉴먼트를 역설적으로 조그만 벽화로 그려 넣는 쿠바계 미국 작가 글렉시스 노보아.
관객에게 시장 경제 토론시키는 티노 세갈
한 작가는 93년 박불똥 작가 이후 한국 작가로는 처음으로 아바나 비엔날레에 초청됐다. 게다가 박 작가는 반미의식을 드러낸 민중미술가인 반면, 한 작가의 작품은 정치적인 것과 거리가 멀다.

“사실 비엔날레 기획은 미국과의 국교정상화 논의 이전부터 시작됐기 때문에, 그걸 감안해서 미국 작가들을 더 많이 초청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것은 사실이죠.” 쿠바 파빌리온에서 만난 비엔날레 예술감독 마르가리타 곤잘레즈 로렌테가 설명했다. 쿠바 파빌리온에서는 쿠바 작가 7명과 미국 작가 7명의 공동 전시가 열리고 있다.

아바나 구시가지에 위치한 쿠바 국립미술관에서도 뉴욕 브롱스 미술관의 소장작품 전시인 ‘와일드 노이즈’가 열리고 있다. 거의 50년 만에 처음 있는 쿠바 미술관과 미국 미술관의 교환전시다.

그런 가운데 아바나 구시가의 윌프레도 람 현대미술 센터에서 접할 수 있는 작품 하나가 눈길을 끌었다. 독일의 행위예술작가 티노 세갈이 기획한 관람객 참여 프로그램이다. 관람객은 두 명의 경제학 전공 쿠바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시장경제에 대해 토론하게 된다. 토론이 끝나면 관람객은 1 쿠바 페소(약 50원) 동전을 받는다. 앞으로 쿠바에 닥칠 거대한 변화, 특히 미국과의 국교정상화에 따라 피할 수 없는 자본주의의 침투에 대해 숙고해보게 하는 작품인 것이다.

비엔날레 부대 전시 중 인기가 많았던 ‘비하인드 더 월’ 프로그램에서도 변화에 대한 기대와 우려를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이 전시는 아바나의 명소인 방파제 길 말레콘에서 열리고 있다. 페이스북 ‘좋아요’ 아이콘을 확대한 큼직한 설치작품이 웃음을 자아냈는데, 작품 옆에서 서성거리던 쿠바 작가 알렉산데르 게라 후르타도는 이렇게 귀띔했다. “미국 온라인 서비스의 아이콘과 요새가 함께 보이잖아요. 이런 아이러니를 의도했죠.”

그가 말한대로 ‘좋아요’ 아이콘 속 바다 너머로 모로 성을 볼 수 있었다. 16세기 에스파냐 식민지 건설자들에 의해 아바나 항구를 지키는 요새로 지어진 곳이다. 쿠바 혁명 당시엔 체 게바라가 군사본부로 사용했다. 지금은 무선인터넷은커녕 유선 인터넷도 느리기 짝이 없지만, 머지 않아 빠른 인터넷망과 미국발 소셜네트워크서비스의 물결이 밀어닥치리라. 그때 기존 체제를 지켜낼 요새는 있을까.

11 미국 SNS 페이스북의 ‘좋아요’를 형상화한 쿠바 작가 알렉산데르 게라 후르타도의 ‘스위트 이모션’. 작품 너머로 체 게바라의 군사본부였던 모로 요새가 보인다. 12 미국 작가 듀크 라일리가 설치한 아이스링크 작품. [신화통신] 13 쿠바 작가 그룹 스테인레스의 ‘옥시덴테 콘 에스테로이데스’. 스테로이드가 주입된 서구라는 뜻이다.
14 쿠바 작가 류드밀라 로페즈의 붉은 미끄럼틀 ‘파르토 아 라 리베르타드(자유로의 탄생)’. 15 아바나 비엔날레에는 시민 참여적 작품들이 많이 전시됐다. 16 아바나 거리 풍경
설치 작품과 겹쳐지는 쿠바의 낡은 풍경들
말레콘은 평소 아바나 시민들이 사랑하는 산책로이자 낚시터라 이곳에 설치된 작품 중에는 관람객 참여를 유도하는 것들이 많았다. 열대 기후에 사는 아바나 시민들이 아이스 스케이팅을 체험해볼 수 있게 해주는 미국 작가 듀크 라일리의 스케이트장이 대표적이다. 쿠바 작가 아를레스 델 리오의 인공해변은 좀더 아이로니컬하다. 전형적인 서구식 리조트를 연상시키는 파라솔과 긴 의자에서 관람객들은 자유롭게 시간을 보낼 수 있다. 바다를 향해서 이 인공해변을 보면 참 자연스러운 풍경이다. 그러나 바다를 등지고 인공해변 너머 도로에 줄지어 선 쿠바의 낡을 대로 낡은 건물들을 보고 있으면 묘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좀더 정치적인 색을 띄는 작품도 있다. 쿠바계 미국 작가 글렉시스 노보아는 각국의 거창한 모뉴먼트, 특히 북한의 김일성 동상같은 전체주의적 기념비를 역설적으로 아주 조그만 벽화로 폐허가 된 집에 그리는 작업을 선보였다.

미국으로 떠난 쿠바 작가가 쿠바에서 전시를 하는 일은 이번 비엔날레 전부터도 종종 있었다고 로렌테 예술감독이 설명했다. 탈북 작가가 평양에서 전시를 하거나 월북 작가가 서울에서 전시하는 일은 상상할 수 없는 한반도 상황과는 다르다. 사실 쿠바에 다녀온 한국 관광객들은 북한의 경직된 분위기와는 다른 쿠바인의 여유 있고 예술적인 분위기에 놀랐다는 말을 많이 한다.

그러나 그것이 쿠바 현실의 전부는 아니다. 노보아 작가는 북한과 쿠바의 미래에 대한 질문에 대해 모호한 대답으로 말을 아꼈고, 자신은 어떤 비판적 메시지를 말하는 것은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뉴욕타임스의 미술평론 전문기자 홀랜드 코터가 지적했듯, 이번 아바나 비엔날레에 전시된 많은 쿠바 작가들의 작품은 정치적인 것에 직접 비판적 메시지는 피하는 경우가 많았다. 예외적으로 쿠바 출신 작가 타니아 부르게라가 비엔날레 기간 중 독일 정치이론가 한나 아렌트의 저서 『전체주의의 기원』 을 낭독하며 쿠바 정부를 비판하는 퍼포먼스를 했다. 그리고 그 결과 검열 당국에 의해 일시적으로 구금당했다.

한 작가가 작품을 설치한 과정 역시 쿠바의 현실을 반영한다. 그는 사회주의 국가 특유의 관료주의로 인해 공사가 한없이 지연되고 만성적인 물자 부족으로 한국에서 썼던 것 같은 튼튼한 버팀목을 구할 수 없어서 무척 당황했었다고 털어놓았다. “대신 쿠바 사람들이 작품을 잘 이해해주는 건 참 좋습니다. 이곳 사람들은 태생적으로 예술적인 데가 있어요.”

이렇게 각종 문제와 매력과 가능성과 불안이 뒤섞여 있는 곳이 지금의 쿠바다. 이곳이 한국의 역동성과 장차 어떤 화학작용을 일으키게 될 것인가.

아바나(쿠바) 글·사진 문소영 기자 symoon@joongang.co.kr, 사진 외신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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