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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염병엔 ‘사회적 질병’ 요소 … 의학적 대처만으론 부족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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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1호 07면

13일 서울 을지로 국립중앙의료원 주차장에 음압격리텐트가 설치돼 있다. 의료원은 환자가 늘었을 때를 대비해 텐트를 준비했다고 밝혔다. 김춘식 기자

한국 사회를 강타한 중동호흡기증후군(MERS·메르스)은 ‘의료 강국 코리아’라는 자존심을 무너뜨렸다. 취약한 공공의료 인프라와 예방은 뒷전인 치료 중심의 시스템, 감염내과예방 전문의와 역학조사관 등 전문 인력 부족, 그로 인한 허술한 감염 관리 등 보건의료 제도의 취약성이 노출된 것이다.

[메르스 쇼크] 사회적 불안감 왜 커졌나

지난달 20일 최초 확진 환자가 발생한 이후 정부는 컨트롤타워 역할을 하지 못했고 지방정부와도 엇박자를 냈다. 정부의 무능 탓에 국민의 불안은 바이러스보다 빠르게 퍼졌다. 메르스 대응 실패가 질병의 확산을 막지 못한 데 그치지 않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메르스 사태를 ‘의학적’ 측면에서만 접근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염유식 연세대 사회학과(의료사회학) 교수는 “감염은 생물학적 현상이지만 그것이 폐쇄된 실험실에서 벌어지지 않는 이상 사회적 맥락에서 봐야 한다”며 “정부와 국민 사이의 신뢰와 소통, 권한과 책임 같은 정치·사회적 과정을 함께 들여다봐야 한다”고 말했다. 유명순 서울대 보건대학원(보건정책관리학) 교수도 “특정 질병이나 바이러스를 넘어 대중의 일상을 광범위하게 포괄하는 공중보건(public health)의 의미를 새겨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이번 기회에 컨트롤타워인 거버먼트(정부)와 더불어 전문가, 일반 시민 등이 참여할 수 있는 보건의료 거버넌스 구축을 논의할 것을 제안한다. 이는 13일 정부세종청사에서 열린 ‘한국-세계보건기구(WHO) 메르스 합동평가단’의 기자회견에서도 언급됐다. 이종구 WHO 합동평가단 공동의장은 “위험을 관리하는 거버넌스가 제대로 확립 안 돼 혼란이 있었다”며 “정보 소통과 지방정부 자원 동원 과정에 문제가 있었다”고 지적했다.

WHO는 2011년 발표한 ‘21세기 건강을 위한 거버넌스(Governance for health in the 21st century)’라는 논문에서 ‘보건 영역과 비보건 영역, 공공과 민간 부문 간의 협력’을 강조한 바 있다.

WHO “정보 비대칭이 혼란 초래”
환경 개선 덕에 흑사병·콜레라처럼 한 사회를 절멸시키는 역병은 사라졌다. 하지만 첨단 의학을 총동원해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없는 신종 바이러스는 주기적으로 출몰하고 있다. 2000년대 들어서도 세계를 공포로 몰고 간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SARS·사스·2003년), ‘21세기의 흑사병’으로 비유된 조류인플루엔자(2005년), 전 세계에서 대유행한 신종플루(2009년)가 발생했다. 과학이 발전해도 전염병은 인류에 위협적인 것이다.

규명되지 않은 신종 감염에 대한 해법은 대중의 이해를 높여 방역 행동을 준수토록 하는 데 있다. 유명순 교수는 “그래서 의학적 접근만이 아니라 민간과 공공의 이해당사자가 참여해 협조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메르스 사태가 발생한 지 한 달이 다 되도록 정부는 이 같은 사회적 맥락을 보지 못하고 있다. 정우진 연세대 보건대학원(보건정책학) 교수는 “지금 국가적 위기에 봉착한 건 치료적 부분이 아니라고 본다. 공중을 대상으로 하는 전염성 질병은 사회·경제적 요인이 작용하기 때문에 사회과학을 비롯한 타 영역 전문가를 함께 투입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정보 공개를 주저하고 불신을 자초해 방역에 필수적인 구성원의 행동을 관리하지 못해 공포와 분노를 키워놓고, 이를 해소할 방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디부터 잘못된 걸까. 전문가들은 “정부가 ‘좋은 거버넌스’와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일만 하고 있다”고 입을 모은다. 우선 협력에 반드시 전제돼야 하는 소통이 문제다.

2005년 WHO는 ‘전염병 소통 가이드라인(Outbreak Communication Guidelines)’을 만들었다. 여기엔 ▶신뢰(Trust) ▶조기 공지(Announcing early) ▶투명성(Transparency) ▶경청(Listening) ▶계획(Planning)이 원칙으로 포함됐다. <표 참조> 당장 정확한 정보를 내놓을 수 없는 미지의 질병이 닥쳤을 땐 소통이 질병의 확산을 제한한다는 연구 결과도 제시했다. 시민의 혼란을 줄이고 자발적인 감시와 보호 행동을 강화하기 때문에 의료적 대응만큼 중요한 질병관리 요소라는 것이다.

같은 이유로 미국의 질병통제예방센터(CDC)에는 커뮤니케이션 조직이 따로 있다. 정보 공개와 의견 청취뿐만 아니라 원활한 소통을 위한 교육도 한다. 대중이 정보를 제대로 읽어낼 수 있도록 하는 ‘헬스 리터러시(health literacy)’ 증진을 위한 노력이다. 전문 용어가 난무하는 보건의료 분야에선 전문가와 비전문가 간의 정보 불균형이 심하다. 메르스 관련 보도에서도 에어로졸·비말(飛沫)감염 등 일반인에겐 생소한 용어가 반복 등장한다. 소통 전문가가 필요한 이유다. 하지만 한국의 질병관리본부 조직도엔 대변인조차 없다. 이종구 공동의장은 13일 기자회견에서 “위기 상황에서 혼란을 일으키는 원인은 정보의 비대칭”이라며 “신속한 정보 공개가 제일 중요했고 (그렇게 못한 것이) 초기 대응 실패 원인 중 하나로 본다”고 진단했다.

최재욱 고려대 의대(예방의학) 교수는 “상향식 접근(bottom up approach)은 보건의 원칙이다. 시민이나 지역 사회가 함께 가지 않으면 어떤 보건사업도 실패한다”며 “소통 실패로 신뢰가 무너지자 시민들이 통제권을 벗어나 각자도생을 도모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슈화 쉬운 복지에 보건은 홀대 당해
‘매뉴얼로 해결하려 하면 반드시 실패한다’는 말은 안전 관리의 제1 원칙이다. 이는 메르스 같은 신종 감염병 대응에도 해당한다. 최재욱 교수 말대로 “새로운 변수에 선제적으로 유연하게 대응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최 교수는 “공중보건 전문가가 리더로 나서고 그 아래 치료·역학·세균학·독성학 등 보건의료 영역과 통계·언론홍보·사회학 등 비보건 영역 전문가들이 모여야 한다”고 말했다. WHO가 강조한 ‘협력 거버넌스’다. 염유식 교수도 “메르스 사태가 발생했을 때 여러 부처가 협력하고 그런 부처를 이끌 사람에게 책임을 지우고 권한을 이양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며 “정부가 사소한 것까지 직접 챙기려 하는 게 문제”라고 주장했다. 유명순 교수도 “정치적 이슈로 부각되기 좋은 복지보다 보건이 홀대당하는 경향이 있다”며 “이참에 공중보건에 대한 인식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다른 미래 전염병에 대비할 적기라는 지적도 나온다. 염유식 교수는 “WHO의 가이드라인에 나온 ‘계획’ 단계부터 시작해야 한다”며 “다시 위험에 노출될 때를 대비해 국민의 신뢰를 쌓고 어떤 이들에게 권한을 위임할지 정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홍주희 기자 hongh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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