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침에 환자 회진을 도는데 어제 갑상선 전절제와 좌측 측경부 림프절 곽청술(림프절 전이가 심해 광범위하게 청소하듯이 제거 하는 것) 환자의 케찹통에 우유 빛깔 액체가 가득 차 있다. 병실 간호사가 오늘만 벌써 두번째 케찹통을 비웠다고 한다.
한나가 묻는다 "왜 우유 빛깔이에요, 교수님?"
"환자가 먹다 남은 우유를 넣었나 보지, 아니면 우유를 많이 마셨나 보지" 필자가 장난스럽게 대답한다.
그러나 속 마음은 " 아이쿠 이 환자 고생 좀 하겠다" 다.
"이 환자 지금부터 NPO(아무 것도 못 먹게 하는 것)다. 그리고 주사로 영양제 투여한다".
그러고는 거즈 뭉치로 좌측 아랫쪽 쇄골 상방 목에 압박 드레싱을 해 둔다.
영문을 모르고 걱정스러워 하는 환자와 환자가족에게 "큰 일은 아니고 림프절 뗀 곳에서 림프액이 나오는 것입니다.
포도송이 뗀 가지에서 나무진이 나오는 것과 비슷한 거지요" 하고 안심시키나 마음 한구석에는 좀 캥기는 점도 있다.
"근데 왜 굶어야 해요?"
"아, 장속으로 음식이 들어 가면 이런 액체가 많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왜 이런 일이 생길까? 왜 우유 빛깔 액체가 나올까?
우리 몸을 순환하는 피는 크게 두 종류로 나뉜다. 하나는 동정맥혈인 붉은 혈액이고, 하나는 림프액이다.
림프액은 다시 맑은 림프액과 우유및의 탁한 림프액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림프액은 전체 순환 혈액의 20%가량 된다.
우리 몸 구석구석 말초조직에서 나오는 림프액은 맑은 색이고 창자에서 흡수된 지방분이 섞인 림프액은 탁한 색을 보인다.
마치 진곰탕 국물과 같이 걸죽한 액체다. 이를 젖과 비슷하다 하여 유미액 또는 카일(chyle)이라 부른다.
옛 신라 시대 "이차돈의 피(춘원 이광수의 소설)"가 흰 피였다는데 혹시 카일?
이 림프액은 우리몸 최말단 세포나 조직에서 나오는 체액과 림프구를 말단림프관-림프관-중간 정거장인 림프절을 거쳐 좀더 큰 림프관을 지나 양쪽 측경부 아랫쪽에 있는 흉관(thoracic ducts)으로 모여-완두 정맥(bachiocephalic vein)으로 유입되고, 다시 심장을 거쳐 전신으로 순환된다. 보통 좌측 흉관이 크고 우측은 흔적처럼 아주 작다.
림프액은 림파구, 말단 조직에서 나온 지꺼기, 이물질, 암세포 등을 실어 나르는 일을 한다. 림파구는 세균과 싸우고 림프절은 지꺼기, 암세포, 세균 등을 걸러내는 일을 한다.
갑상선암이 림프절로 전이되었다는 것은 갑상선암에서 나온 림프액과 암세포가 목 림프절에 잡혀 자라고 있는 상태인데 이는 암이 더 이상 멀리 퍼지는 않도록 하는 일종의 방어 기전이다. 측경부 림프절 방어선이 무너지면 암이 전신으로 퍼지게 되어 있다.
갑상선암이 중앙경부 림프절을 지나 측경부 림프절까지 퍼지면 수술이 좀 커진다. 갑상선 전절제술. 중앙 경부 림프절 청소술, 측경부 림프절 청소술을 해야 한다. 어렵고 시간 걸리는 작업이다.
그런데 림프절이 많이 모여 있는 부위가 흉관이 완두 정맥과 만나는 부위다. 그러니 전이 림프절들이 자갈밭처럼 와글 와글 이 부위에 얽혀 있으면 흐물흐물 얇은 투명막으로 된 흉관에서 림프절 제거후에 림프액이 새어 나오는 수가 있다.
이것이 유미액 누출(chyle fistula)이다. 하느님도 짖궂으시지 흉관 벽을 좀 튼튼하게 만들지 않고.......
세계 문헌에는 측경부 곽청술후에 1-3%의 유미액 누출(chylous fistula)을 보인다고 한다(Ann Ital Chir 2010;89:311-4)) . 케찹통에 고인 액체의 색갈을 보고 유미액누출인지 아닌지 짐작 할 수 있다.
맑은 액체. 약간 누른 빛 액체, 죽은 피가 섞인 케찹색이면 정상으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오케이다.
그런데 우유 빛이나 딸기우유 빛이면 유미액이다. 식사를 하면 장에서 지방이 흡수되어 유미액 량이 증가 한다.
특히 아이스크림, 고기 등 지방식이 때 더 그렇다. 이렇게 되면 집도의사는 머리가 아파온다.우선 장에서 음식이 흡수되면 유미액이 증가하기 때문에 구강 섭취는 제한해야 한다.또 장의 활동과 분비물 감소를 위해 소마토스타틴(somatostatin)을 피하로 주사한다.(요게 빠근하게 아프다) 그리고 주사로 고영양공급(total parenteral nutrition)을 한다. 이렇게 해서 유미액을 말리려고 한다. 효과가 좋으면 5-7일내에 유미액 량이 줄고 누출 부위가 막힌다. 대부분은 이렇게 치료된다.이렇게 해도 누출량이 500cc 이상이면 재수술로 누출 부위를 찿아 막아줘야 한다.
이 결정이 쉽지 않다. 곧 막힐 것 같이 누출량이 줄었다 늘었다 할때다. 필자는 이때 과감히 재수술을 결정한다. 500cc가 아니라 300cc라도 재수술을 한다. 이렇게 해야 회복도 빠르고 환자나 의사의 마음 고생을 종결 시킬 수 있다. 그 외 발등의 림프관을 통해 목까지 아주 가느다란 관을 삽입해서 누출부위를 약으로 막아 보려는 시도 등 여러가지 치료방법이 제시되고 있으나 흔하게 사용되지는 않는다.
어쨌든 유미액 누출이 생기면 입원기간이 길어지고 환자와 의사의 고생이 이만 저만 아니다. 제일 좋은 치료는 이런 합병증이 생기지 않게 하는 것이다. 역시 수술 종결때 흉관으로 부터 유미누출이 있는지 "보고 또 보고" 해야 한다. 문제는 유출이 없다는 걸 확인 했는데도 나중에 음식물 섭취 후에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눈으로는 안보이는 현미경적인 작은 유출공이 림프액량이 증가함에 따라 점점 커져 유출량이 늘어 나는 것이다. 최근 필자는 이런 현미경적 유출을 예방하기 위해 "histoacril" 이라는 순간 접착제 비스무리 한것을 수술종결 전에 흉관 주위에 뿌려 준다. 지금까지의 효과는 만족스럽다.
아.... 다시는 "앗, 케찹통에 왠 우유가" 이런 소리는 듣고 싶지 않다. "알았제, 한나야?"
☞박정수 교수는...
세브란스병원 외과학 교실 조교수로 근무하다 미국 양대 암 전문 병원인 MD 앤드슨 암병원과 뉴욕의 슬론 케터링 암센터에서 갑상선암을 포함한 두경부암에 대한 연수를 받고 1982년 말에 귀국했다. 국내 최초 갑상선암 전문 외과의사로 수많은 연구논문을 발표했고 초대 갑상선학회 회장으로 선출돼 학술 발전의 토대를 마련한 바 있다. 대한두경부종양학회장, 대한외과학회 이사장, 아시아내분비외과학회장을 역임한 바 있으며 국내 갑상선암수술을 가장 많이 한 교수로 알려져 있다. 현재 퇴직 후에도 강남세브란스병원에서 주당 20여건의 수술을 집도하고 있으며 후진 양성에도 힘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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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수 기자 sohopeacock@naver.com <저작권자 ⓒ 중앙일보헬스미디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저작권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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