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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 대국의 영화와 상상 초월 포도밭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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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0호 25면

1 가파른 두로계곡에 마련된 포도밭.

한때 세상을 호령했던 해양국가 포르투갈. 달콤한 포르토 와인의 명산지인 두로 계곡과 이 곳에서 생산한 와인을 전세계로 실어 나른 포르토의 오래된 항구는 그 명성을 확인시켜준 곳이었다.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포르토 마을과 두로 강을 따라 형성된 계곡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의 포도밭을 조성하고 와인을 만들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897km에 달하는 굽이진 두로 강만큼이나 웅숭깊은 이야기를 품고 있을 터였다.

세계문화유산, 포르투갈 포르토와 두로 계곡

2, 3 포르토에서 바라본 두로 강가.

포르토, 해양 왕국의 발원지
1394년 포르토에서 영국 여왕과 포르투갈 왕 사이에 태어난 인판트 디 엔리케 왕자는 포르투갈 부흥에 한 획을 그은 인물이다. 그가 이끈 함대가 1415년 모로코 세우타의 이슬람 항구를 점령함으로써 최초로 해외 원정에서 승리한 포르투갈은 차후 해양국가의 꿈을 실현한다.

포르투갈이 포르토를 중심으로 거대 해양 국가로 발전하면서 유럽에서 가장 큰 조선소가 포르토에 세워지고 함대의 명성은 커갔다. 18세기에는 포트 와인 무역으로 급부상했다. 경제적으로 윤택해지면서 포르토에는 유명 건물들이 들어선다. 이탈리아 건축가를 초청해 바로크 스타일의 건물들을 지었고 영국의 영향을 받은 아름다운 네오 클래식 건물들도 등장했다. 그 중 하나가 클레리고 성당의 타워다. 포르토 마을 서쪽 언덕에 서있는 이 타워는 포르토의 랜드마크이기도 하다. 이렇게 만들어진 보석 같은 건물들 덕분에 1996년 유네스코는 포르토의 구 시가지를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세계 문화유산 거리를 걷다
날씨는 맑았고 햇살은 강했다. 내가 서 있는 곳은 리베리아 반도를 가로질러온 두로강이 마침내 대서양과 만나는 지점이다. 강이 바다로 흘러가는 방향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오른쪽 가파른 언덕에 지어진 형형색색의 집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사진에서 보던 쿠바나 아르헨티나의 낡은 골목 풍경과 스페인 부흥 시대에서 느낄 수 있는 웅장한 건물 모습이 조화롭게 섞여 있었다.

한참을 걸어 언덕 정상에 있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카테드랄 세(Se)에 도착했다. 포르토 시가 한눈에 보였다. 72m 높이를 자랑하는 돔 루이스 I 다리가 발 아래 펼쳐졌다. 포르토 시와 강 건너편 빌라 노바 데 가이아 지역과 연결해 주는 이 2층 다리는 1886년 에펠의 제자가 철을 사용해 지은 것으로 매우 아름답다.

4 언덕에서 바라본 가이아 지구 모습.
5 크라스토의 오래 된 포도밭. 6 편암 기둥이 있는 포도밭 앞에서 설명하고 있는 크라스토 오너, 미구엘. 7 크라스토가 만든 두로 드라이 와인.

두로 와인의 명가, 킨타 도 크라스토
뱀처럼 휘어진 계곡 길 옆은 가파른 낭떠러지였다. 가만히 있어도 오금이 저릴 정도인데 자동차는 속도를 냈다. 차는 1시간 반 정도를 달려 두로 계곡의 수많은 언덕 중 하나의 정상에 올랐다. 그 곳엔 킨타 도 크라스토(Quinta do Crasto) 와이너리가 있었다. 몇 백m 아래로 두로 강이 유유히 흐르고 주변 계곡에는 등고선 모양으로 높이를 달리하며 포도나무들이 심어져 있었다. 와이너리 주변엔 오렌지와 레몬 나무가 보였다. 딴 세상이었다.

와이너리 소유주의 아들 미구엘이 포도밭으로 안내했다. 돌밭이었다. 한옥에 구들을 놓을 때 사용하는 편암 천지였다. 가지를 지탱하는 선을 묶기 위해 세우는 기둥조차 편암이었다. 어떻게 이런 곳에 포도나무를 심을 생각을 한 것일까. 편암은 결이 있어 쪼개기 쉽고 이 결 때문에 포도나무 뿌리가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연명할 수 있다고 했다. 더 놀라운 것은 포도밭의 경사다. 돌을 한번 굴리면 끝없이 굴러내려갈 듯했다.

수확한 포도들은 양조장으로 옮겨와 크게 두 종류의 와인, 두로 드라이 와인과 달콤한 포트 와인을 만든다. 포트 와인을 만드는 전통적인 방법은 라가르(Lagar)라는 화강암 네모 통에 포도를 넣고 사람이 직접 들어가 발로 으깬다. 이는 남자들만 하는데 육체적으로 무척 힘들기 때문이다. 보통 6~8명이 한 조가 되어 6시간 동안 촘촘히 밟는다.

이렇게 만들어진 와인은 풍부한 색과 힘있고 부드러운 타닌을 갖게 된다. 1차 알코올 발효 중간에 77%의 브랜디를 첨가하면 더 이상 발효가 일어나지 않고 잔류 당분이 와인 속에 그대로 남게 된다. 이 와인이 바로 포트 와인이다. 드라이 와인도 이 방법을 사용해 만들면 색이 깊어지고 강건한 와인을 만들 수 있다. 요즘에는 사람 대신 기계를 사용해 같은 효과를 낸다고 한다.

간단한 식사를 하며 와인을 시음했다. 화이트에선 계곡에서 느낄 수 있는 강렬한 신선함이, 레드 와인에선 태양과 거친 환경의 이미지보다는 부드럽고 깊이가 있었다. 2003 빈티지는 강건함이 살아 있었고 균형이 잘 맞았다. 1987년산 포트 와인은 갈색으로 변해 있었지만 맛에서는 신선함이 느껴졌고 특히 말린 과일, 조린 과일의 풍미가 일품이었다. 포도밭 환경과 균형을 이루려는 철학이 배어있었다.

8, 10 다우 포트를 숙성시키는 오크 통 9 뮤직센터

포트 와인의 명가, 다우
포트 와인의 중심지며 수많은 와인 회사가 몰려 있는 가이아 마을은 로마제국 시절 칼레(Calle)라 불렸는데 그 자체로 오래된 박물관이었다. 관광객에게도 오픈하는 오래된 양조장들이 많아 산책하며 와인도 마실 수 있는 멋진 곳이다.

다우(DOW’s)는 시밍톤 패밀리 5인 가족이 소유한 200년 넘는 역사와 뛰어난 품질을 자랑하는 영국의 포트 와인 회사다. 셀러에는 4단으로 싸놓은 검정색 숙성 오크통이 수백 개 있으며 단일로 세계 최대 크기의 포트 저장 오크 통(13만3568 리터)도 보유하고 있다. 또 가족 저장고에서 숙성 중인 빈티지 포트들의 규모는 나의 상상을 초월했다.

두로 계곡에서 생산된 와인은 13세기부터 본격적으로 포르토 항구로 옮겨졌다. 당시 영국과 포르투갈은 정식 무역 조약을 맺었는데 영국 양모는 세금 없이 수입됐고 포르투갈 와인은 영국으로 수출할 때 세금을 부과하는 조약이었다. 이는 영국이 프랑스 와인에 매기는 관세의 1/3정도 수준이었다. 영국과 프랑스 간 100년 전쟁의 발발로 영국이 프랑스 와인의 수입을 전면 중단한 틈을 파고든 것이다.

그러나 영국으로 수출되던 두로 와인은 운송 중 변질되는 문제가 빈번하게 발생했고, 이를 해결하고자 와인에 브랜디를 넣어 보존 성을 높이면서 포트 와인이 탄생하게 됐다. 포르토에 최초로 영국 무역 포스트가 세워진 것은 1717년, 포트 와인 생산이 영국 회사로 이관되면서다. 그 후 포르토 와인의 상업은 영국의 주도하에 발전하게 됐다.

다우의 철학이 담긴 곳, 킨타 도 봄핑
다우는 1890년과 1896년 사이에 최상급 포도밭에 투자한 최초의 영국 포트 회사다. 그 결과 세계 프리미엄 포트 와인 시장의 30%를 점유하고 있다. 다우는 두로 계곡 두 곳(세노로 다 리베라, 봄핑)에 와이너리(Quintas)를 갖고 있다. 나는 봄핑(Bomfim)을 방문했다. 두로 계곡 상부로 최고급 포도밭이 몰려 있고 역시 유네스코가 세계유산으로 지정한 곳이다.

봄핑 와이너리가 있는 핑양은 아주 조용한 마을이다. 강줄기가 한번 휘어져 작은 만을 형성해 아늑한 느낌을 준다. 포도 밭은 강 쪽으로 내려갈수록 토양의 품질이 좋아 최상급으로 분류된다. 두로 계곡은 대륙성 기후에 해당돼 겨울엔 매우 춥고 여름엔 무척 더우며 강수량이 적다.

봄핑의 포트 와인은 젊었을 땐 짙은 보라색과 매콤한 타닌을 보여주다가 시간이 지나면 검은 초콜릿 향이 일품이다. 다우가 만든 전설적 빈티지는 1896, 1924, 1945, 1994, 2007이 있다. 나는 이날 저녁 1977년산 포트를 블라인드 시음했다. 갈색으로 충분히 변한 색은 나이를 짐작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고 맛에서는 달지만 지루하지 않은 신선함, 그리고 드라이하게 끝나는 맛이 매혹적이었다. 검은 신사, 다우 포트의 맛을 실감할 수 있었다.

포르토를 떠나는 날 특별한 건물을 방문했다. 과감한 디자인의 초현대식 건축물, 뮤직 센터였다. 18세기 번영의 시대에 건축된 위대한 건물들 숲에 들어선 아르누보식 건물은 충격이었다. 네덜란드의 저명 건축가 렘 쿨하스의 이 작품은 2005년 오픈 하자마자 포르토의 명소가 됐다. 이 음악당은 대로와 연결돼 해변까지 직선으로 도달할 수 있다. 모양은 어디서 보든 같은 경우는 없다. 프랭크 게리가 디자인한 스페인 빌바오의 구겐하임 뮤지엄과 비교하는 평론가도 있다.

천년 고도에서 이런 획기적인 건물을 시가 받아들였다는 자체가 놀라웠다. 나는 건물을 한 바퀴 돌아 모든 각도에서 살펴 보았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서있는 모습이 마치 하늘에서 내려앉은 거대한 운석 같았다. 두로 계곡의 수많은 언덕을 한데 모아 놓은 것인지도 몰랐다. 먼 과거에서 긴 홀을 지나 미래의 공간으로 떨어진 듯한 느낌. 그러나 과거와 미래는 공존하는 모습이다. 나는 바닷가 카페에 앉아 오래된 포트 한 잔을 마신다. 두로 강이 대서양과 만나는 해변에는 연인들과 가족들이 행복한 산책을 하고 있었다.

포르토(포르투갈) 글·사진 김혁 와인 컨설턴트 & 칼럼니스트 www.kimhyuck.com, 사진 게티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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